27화
표정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싸늘해진 현태를 보며 수정은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현태는 질투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하는 질투가 아니었다. 현태는 단순히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남들보다 강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는 아직 가까운 게 아니야. 아직 현태는 나하고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아.
수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잘은 모르지만 가족이었으면 내 앞에서 그냥 받지 않았을까?”
현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수정은 이왕 말을 뱉은 김에 더 나가자 싶었다.
“내 앞에서 받긴 좀 곤란했나 보지. 내가 네 친구라고 이야기했거든.”
레스토랑에 들어왔을 때 수정이 있는 것을 보고 이미 희우와 인사는 했겠구나 짐작은 했다. 수정은 무척 기억력이 뛰어난 친구였다.
결혼식 때 본 희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했고, 그녀의 성격에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목소리 들으니까 남자 같던데.”
수정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현태는 희우를 따라가려던 것을 멈추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수정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환해졌다.
현태는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서둘러 왔더니 뒤늦게 갈증이 느껴졌다.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희우의 얼굴이 목에 걸린 것처럼 지워지지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나도 어차피 먹어야 하고. 너도 배고프지? 벌써 8시가 다 되어가.”
수정이 메뉴판을 펼치며 상냥하게 물었다.
이곳은 미국으로 가기 전 현태와 자주 들렀던 레스토랑이었다. 근방에서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현태 입맛에도 맞는 곳이었기에 그의 행로를 예상하는 건 수정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현태의 비서 도움을 받긴 했다.
“아, 나는 이거 먹을…….”
신나게 메뉴판을 보며 식사를 고르던 수정은 갑자기 생긴 그늘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얌전하게 앉아 있던 현태가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왜?”
수정이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물었다.
“미안. 밥은 혼자 먹어야겠다.”
“가려고?”
수정이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서며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현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현태의 시선은 이미 희우가 나가고 없는 레스토랑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정은 현태의 옆얼굴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이미 다른 사람 만나러 갔잖아.”
수정이 말하는 사람은 희우였다. 현태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식사는 다음에 하자.”
현태는 수정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현태야, 기현태!”
수정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지만 현태는 이미 멀어진 후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수정은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망연한 시선으로 현태가 나가고 없는 입구를 응시했다. 어쩐지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릎 위에서 동그랗게 말아 쥔 수정의 주먹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 * *
레스토랑을 급하게 나온 희우는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바르르 느껴졌다.
희우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현태에게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휴대폰 화면에 찍힌 발신자는 상우 엄마였다.
“하아…….”
어쩐지 길고 싫은 밤이 될 것 같았다.
최악이야.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던 희우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현태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안내 음만 들렸다.
-남자 같기도 하고. 목소리는 얼핏 들리니까.
머뭇대며 말하던 수정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탐스럽게 피어 있던 망할 수국 바구니까지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제 것이 분명한 대상에게 다른 놈이 집적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국이 아니라 수국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될 일이었다.
현태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안내 음이 반복되었지만 현태는 희우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구와 통화 중이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시퍼런 수국 꽃다발이 눈앞에 아른댔다.
그딴 건 못 들고 오게 했어야 했는데.
집에 가면 바로 버려야겠다 다짐하며 현태는 통화 버튼을 다시 눌렀다. 하지만 여전히 통화 중이라는 안내 음만 이어졌다.
“받아.”
현태가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도돌이표 같은 상우 엄마와의 통화를 끝낸 후 만신창이가 된 희우는 버스를 탈 힘이 없어서 콜택시를 불렀다. 다른 날 같으면 돈 아까워서 절대 못 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린고비 지수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훨씬 높은 날이었다.
다행히 택시는 금방 도착했다.
하아, 살았다.
희우가 막 택시 문을 열었을 때였다.
“잠깐.”
막 택시 문을 연 희우의 팔을 누가 붙잡았다.
희우는 택시를 가로채려는 거라 생각하고 험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저를 붙잡은 것은 낯선 누군가가 아니라 현태였다.
그는 뛰어왔는지 평소보다 호흡이 거칠었다.
“죄송합니다. 일행이라서요. 택시비는 드리겠습니다.”
희우가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현태가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열려 있는 조수석으로 내밀었다.
“뭐예요?”
희우가 질문했지만 현태는 택시 기사를 향해 성의 있게 인사하느라 듣지 못했다. 현태가 희우와 눈이 마주친 건 택시가 출발하고 나서였다.
“뭐냐니까요. 여기 왜 있어요.”
질문도 아니고 질책도 아닌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왜 혼자 갑니까.”
희우가 건넨 질문에 현태는 또 다른 질문으로 답했다.
“일행이 있어 보여서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가 희우는 마지막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러면 꼭 질투하는 것 같잖아.
이런 분위기를 원한 건 아니었다. 기현태가 누구와 식사를 하든, 누구를 만나든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왜 자꾸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지. 이 사람과 무슨 사이라고.
희우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현태의 시선이 느껴졌다. 또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수정의 여유 있는 표정과 현태의 거만한 표정이 겹쳐 보였다. 어쩐지 두 사람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꼴 보기 싫어.
“내 일행은 그쪽이라.”
그런데 그 여자가 왜 거기로 와요? 혹시 기현태 씨가 불렀나요?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우연히 합석한 거라고 들었지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문 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건 또 무슨 마음인 건지. 희우는 납득하기 어려운 유치한 마음에 저절로 눈썹이 구겨졌다.
“그곳이 별로였습니까?”
현태가 희우를 지그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어쩐지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희우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에요. 그냥 좀 일이 있어서.”
장소는 마음에 들었다. 아니, 훌륭했다. 하지만 거기서 만난 사람이 문제였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걸려온 전화도 신경질이 났고.
“어디 가던 길입니까?”
다소 공격적인 말투였다. 하지만 훨씬 더 끈질기고 뾰족한 말을 삼십 분 넘게 듣다 보니 현태의 말투는 그나마 예의 바르게 느껴졌다. 이런 게 상대적 도덕성인가.
“집에 가려고요.”
짧은 한숨 끝에 나온 희우의 대답에 현태는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됐다.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려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약속은 지켜야죠. 아니면 다른 보상도 괜찮고.”
보상이라는 말에 희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울한 감정을 못 이기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희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약속 지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거 이거 하나는 말하고 넘어갑시다.”
희우가 검지 손가락을 빳빳하게 세우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현태가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희우를 응시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당신이 밖에서 누구를 만나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기현태 씨가 미국에서 함께 지낸 여자분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아무래도 아까 저분인 것 같은데.”
“아니, 그건!”
“쉿!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어요. 할 말 있으면 끝까지 다 듣고 나서 하세요.”
중간에 끼어들려고 하는 현태를 향해 희우가 손바닥을 쫘악 폈다. 세상 단호한 희우의 표정과 말투에 현태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 근엄한 표정이 가소롭고…….
“말해요.”
귀여웠다.
현태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지만 심사가 잔뜩 뒤틀린 희우의 눈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은 마음속에서 들끓는 말을 뱉어내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미친년처럼 소리라도 질러 버릴 것 같았다.
인내심과 희우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미하게 존재하는 인내심은 항상 교실에서 다 쏟아내고 나왔으므로 지금 기현태 앞에서 참아줄 인내심 따위는 코딱지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진상 학부모 상담을 하느라 내일 치 인내심까지 대출해서 쓴 후라 더더욱 날이 섰다.
“저분과 다시 시작하고 싶으면 이혼 후에 하세요. 물론! 아기 운운하는 엿 같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마시고요. 마음은 다른 사람한테 있으면서 무슨 짓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