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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24)화 (24/75)

24화

침대에 엎드려 있던 희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볼멘소리로 답했다.

“네?”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이야기 못 하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맨날 이야기하재.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희우는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왜요?”

수정이 준 마카롱 상자를 들고 한참이나 희우 방 앞에 서 있던 현태는 머뭇대다 용기 낸 노크에 뚱한 반응이 돌아오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다른 사람 앞에서 말발로 밀리거나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이상하게 독고희우와 이야기를 하다 보며 자꾸만 코너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이깟 것으로 포기할 현태가 아니었다.

“잠깐 나오죠.”

그리고 거실로 가 테이블 위에 마카롱 상자를 올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도 들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현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 목표는 희우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귀찮은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했다.

다행히 희우는 밖으로 나왔고 테이블 위 마카롱을 발견했다. 눈이 커다래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게 뭐예요?”

“마카롱입니다.”

“어디서 났어요?”

“누가 줬어요.”

“누가요?”

“친구.”

마카롱을 주는 친구라. 어쩐지 남자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거 받으러 나갔다가 온 건가?

“여자?”

현태는 예리한 희우의 질문에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남자끼리 마카롱 선물을 주고받진 않죠.”

희우가 소파에 기대어 앉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알록달록한 마카롱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카롱은 색깔도 모양도 다양했다.

여자 친구인지, 여자 사람 친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기분 상한 티를 낼 자격이 있는지는 알 수 없어서 희우는 마카롱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고희우 씨하고 같이 먹으라더군요.”

“그래요?”

“먹어봐요.”

현태가 마카롱 박스를 희우 앞으로 슬쩍 밀어주며 말했다.

조금 전 저를 얼려 죽일 것처럼 노려보던 사람과 다른 사람 같았다. 희우는 현태의 일관성 없는 태도에 짜증이 났다.

“기현태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현태가 희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희우는 당장 저 달달하고 부드러운 마카롱을 입 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메바처럼 행동할 때가 아니었다.

“저는 기현태 씨 기분에 따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에요.”

“무슨 뜻입니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심각한 대화에 현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분명 나무라는 말투였다. 자신은 저런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찬 바람 쌩쌩 불더니 갑자기 마카롱을 먹으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조울증 있어요?”

현태는 그제야 수국 바구니 때문에 자신의 표정이 살벌했던 걸 깨달았다.

“그쪽,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더 잘못이죠. 잘못한 것이 없는데 기현태 씨 때문에 내 기분까지 상했으니까요. 이럴 거면 꽃바구니는 왜 보낸 거죠?”

희우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침착하고 냉랭했다. 화가 난 건 알겠는데 평소보다 오히려 더 차분해진 모습에 현태는 아차, 싶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보낸 게 아닙니다.”

“뭐가요.”

“꽃바구니.”

“네? 그럼 누가 보냈어요, 그걸?”

희우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조금 전까지 살벌하게 화를 내고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희우의 머릿속엔 이제 꽃다발을 보낸 사람이 누구일까로 가득 차서 조금 전 현태의 똥 씹은 얼굴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희우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고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떻게 압니까?”

대답하는 현태의 눈썹이 화악 구겨졌다. 말투에도 짜증이 묻어나 삐죽삐죽 날카로웠다.

“세상에…… 헉! 그러면 혹시!”

희우가 입을 틀어막으며 다급하게 말을 멈췄다.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질문하는 현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임자도 있는 여자에게 어떤 간 큰놈이 함부로 꽃바구니 따위를 보내는지 궁금했다.

“학부모가 보냈을까요? 그 꽃다발 삼만 원이 훨씬 넘어 보이던데……. 어쩌죠? 내일 다시 가지고 가야 하나? 그렇다고 애들한테 물어볼 수도 없잖아요.”

분명 한국말인데 현태는 희우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삼만 원은 또 무슨 말인지. 꽃바구니니까 당연히 삼만 원이 넘겠지.

현태는 당연한 소리를 희한하게 하는 희우를 가만히 바라보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삼만 원이 중요합니까?”

“당연하죠! 김영란법에 걸리잖아요. 요즘엔 현장학습 갈 때 애들한테 캔 커피도 안 받는다고요.”

그깟 꽃바구니, 얼마나 한다고 저 난리인지.

희우는 고민이 되는지 잔뜩 인상을 쓰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른 남자에게서 받은 꽃바구니일까 내심 기분이 상했던 현태는 전혀 그런 방향으로는 짐작조차 하지 않는 희우의 태도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내일 저녁 같이 먹죠.”

현태가 두 번째 데이트를 제안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희우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현태의 제안에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기현태 씨가 정하는 차례지요?”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수국 꽃다발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지?

현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희우는 잠시 시간을 계산했다.

“그러면 내일 오후에 시간과 장소 문자로 보내줘요. 시간 맞춰서 갈 테니까.”

마음 같아선 픽업을 하러 학교로 가고 싶었지만 희우의 퇴근 시간과 현태의 퇴근 시간이 맞지 않았다.

어느새 희우는 상자로 손을 뻗어 마카롱을 입으로 쏙쏙 넣고 있었다. 소름 끼치게 단 마카롱을 쑥떡 먹듯이 날름날름 먹는다.

문득 마카롱을 먹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은 얼마나 달까 궁금했다. 현태의 시선이 희우의 말랑한 입술에 머물렀다.

“아, 미안해요. 너무 나만 먹었죠?”

희우가 마카롱 하나를 집어 건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현태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희우가 내미는 마카롱을 받아 들었다.

지금은 마카롱이라도 먹어야 달콤한 게 먹고 싶은 마음을 충족시킬 수가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날, 희우는 혹시라도 꽃바구니를 보낸 사람이 연락을 해 올까 봐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보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꽃바구니를 보낼 사람이 없었다. 기우돌 회장님이 보내신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만약 그랬다면 벌써 전화가 와도 몇 통은 왔을 것이었다.

게다가 기 회장님이라면 겨우 꽃바구니를 보낼 것 같진 않았다. 꽃집 문서라면 몰라도.

희우는 잠시 고민하다 아이들이 제출하고 간 일기장을 펼쳤다. 오늘은 일주일에 두 번 일기를 써서 제출하는 날이었다. 6학년이라고 13줄 이상 쓰라고 했더니 별의별 요령을 다 부려서 열세 줄을 채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 줄에 다섯 글자 쓰는 녀석,

말도 안 되는 시로 열세 줄을 채우는 녀석.

“민호는 이렇게 띄어쓰기가 안 돼서 큰일이네.”

나름 성실한 민호는 한 페이지 빼곡하게 일기를 써 왔으나 너무 따닥따닥 다 붙여 써서 읽으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한참 일기를 검사하고 있는데 교실 밖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방과 후를 마친 아이들이 다시 교실로 오는 경우가 있었기에 희우는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 기울인 희우가 다시 일기장 검사를 시작했다. 아기자기한 그림과 함께 깨알같이 답글을 적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똑똑.

열심히 일기장 검사를 하고 있는데 앞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슬이었다.

희우는 검사하던 일기장을 옆으로 치우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이슬을 보며 방긋 웃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슬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선생님, 혹시 26일에 시간 있으세요?”

이슬이 수줍은 얼굴로 물었다. 양 볼이 빨간 게 꼭 사춘기 여학생처럼 귀여웠다.

희우가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뒤적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방학식 다음 날? 아뇨, 아직 다른 약속은 없어요.”

“다행이다. 이거 선생님께 제일 먼저 드리고 싶었어요.”

선홍빛 입술을 살짝 깨물며 미소 지은 이슬이 희우의 책상 위에 네모난 봉투를 올렸다.

“이게 뭐예요? 헉! 설마?”

희우가 봉투를 열기도 전에 눈을 크게 뜨며 이슬을 빤히 쳐다봤다. 이슬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저 결혼해요.”

“진짜? 정말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왜 이렇게 빨리해요?”

“오빠 집에서 서둘러서요. 오빠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그 뒤로도 희우는 이슬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슬은 이야기하는 내내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소녀처럼 깔깔 웃기도 했다.

“제가 선생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가 볼게요.”

“아니에요. 제일 먼저 알려줘서 고마워요.”

이야기하느라 한참 동안 앉아 있던 이슬은 미소 지으며 앞문으로 나가려다 뭔가 생각난 듯 뒤로 휙 돌아보며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아까 앞문에 서 계시던 분은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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