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23)화 (23/75)

23화

수정의 시선은 이제 희우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저였으면 이렇게 무심한 얼굴로 서 있진 않았을 텐데. 현태의 행복을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할 텐데.

처음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농담인 줄 알았다. 그를 알아 왔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현태가 결혼에 대해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접근하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현태가 관심을 가지고 만나는 여자는 없었다.

물론 거기엔 다가오는 여자들을 철저하게 방어했던 수정의 노력도 한몫했다. 하지만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훅 치고 들어왔다.

기우돌 회장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수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왜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정과 현태의 어머니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현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사람은 돈독한 사이였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희우가 휴대폰 속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기현태 옆에 있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나뿐이야.”

현태의 결혼식 날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미련 없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따라갔다. 억지로 한 결혼이었기에 현태가 진정 원하는 사람은 저라고 생각했다.

그건 미국에서 지낸 4년 동안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현태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요즘 현태의 행동이 이상했다. 겉으로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오랫동안 옆에서 현태를 보아왔던 수정은 미묘한 차이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까득.

이대로 지난 10년 세월을 버릴 순 없었다.

“현태 옆자리는 내 거야. 나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잘 손질된 손톱을 물어뜯는 수정의 눈에 짜증이 가득했다. 저와 떨어진 곳에서 민수가 열심히 자료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정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련 없이 일어섰다. 물론 공 대리에게 먼저 퇴근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 *

기분 좋게 현관을 들어섰던 희우는 냉기를 풀풀 풍기며 선 현태를 보고 흠칫 놀랐다. 꽃바구니를 보낼 때는 언제고 저 태도는 뭐람?

현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받은 게 있으므로 일단은 참자 싶었다.

“꽃바구니 고마워요. 카톡 보냈는데 바빴나 봐요.”

답장을 기다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읽었으면 답장을 하는 게 비즈니스 관계에서 중요한 거 아닌가?

“바빴습니다.”

하지만 현태에게선 전혀 미안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시퍼런 수국에 머물러 있었다. 희우는 이상하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어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조금 놀라긴 했는데 기분은 좋았어요. 고마워요.”

“…….”

현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희우가 꽃바구니를 들고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실에 둘까요? 예쁜 건 같이 보면 더 좋으니까.”

“아니요.”

“알았…… 네?”

알겠다고 말하려던 희우는 현태의 싸늘한 대답에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꽃바구니를 향한 현태의 눈빛은 혐오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싫어할 거면서 꽃바구니 같은 건 왜 보낸 거지?

기껏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마음 한 톨도 담기지 않은 이깟 꽃바구니 하나 받고 실실 웃었던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희우는 꽃바구니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신경질적으로 한쪽 구석에 던지듯 놓았다. 바구니 속 풍성한 수국이 신경질이 가득 담긴 손짓에 탐스러운 꽃잎을 출렁였다.

“그래. 꽃이 무슨 죄야. 준 사람이 별로인 거지.”

희우는 수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구니를 화장대 위로 올렸다. 얼마나 풍성한지 거울이 다 가릴 정도였다. 희우는 결국 다시 바구니를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심스러웠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살짝 정이 갔다가도 학을 떼며 달아나게 만들 인간이었다.

희우는 다시 한번 정을 주지 말자고 다짐하며 바닥에 떨어진 자잘한 꽃잎을 주웠다. 이 와중에도 수국은 청승맞게 예뻤다.

방으로 들어간 희우는 그 뒤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꽃바구니 때문에 열 받은 탓도 있지만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서둘러 왔던 현태는 짜증이 났다.

조금 전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꿈에도 모르는 현태는 희우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았다.

“하아…… 노친네 진짜.”

희우를 보며 가진 걸 다 퍼줄 것처럼 말랑하게 굴던 기 회장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희우의 마음 한 자락이라도 얻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결국 현태는 자신과의 타협을 끝내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였다.

지잉, 지잉, 지이이잉-

현태의 휴대폰에 주머니 안에서 정신 사납게 떨었다. 현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주머니 안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수정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수정은 늘 그렇듯 다짜고짜 하고 싶은 말부터 불쑥 뱉어냈다. 항상 있는 일이라 새로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 때문일까. 오늘따라 굉장히 피곤하게 다가왔다. 친구도, 아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저녁이었다.

“아니. 왜?”

-그렇게 나갔으니까. 걱정돼서. 집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 설마 와이프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눈치 하나는 귀신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현태가 아니었다.

“용건이 뭐야.”

-말 참 못됐게 해. 잠깐 내려와 봐.

“어딜.”

-어디겠어. 집 앞이지.

“왜?”

현태의 시선이 거실의 통유리로 향했다. 거기서 본다고 해서 밖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내가 엄청 맛있는 마카롱 집을 찾아냈거든. 그래서 내 거 사는 김에 네 것도 샀어.

“됐어.”

-여자들이 마카롱 얼마나 좋아하는데.

솔깃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여자니, 달달한 걸 먹이면 기분이 좀 좋아지려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수정은 현태라면 됐다고 하고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급하게 덧붙인 말에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현태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고민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지만 수정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천천히 하면 돼. 급할 것 없어. 결국에 나밖에 없다는 걸 현태도 깨닫게 될 거야.

-특별히 예쁜 걸로만 골라왔으니까 와이프랑 같이 먹어.

여자가 준 거라고 눈치챌 수 있게.

하지만 여전히 현태는 답이 없었다. 수정은 결국 비밀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빨리 내려와. 나 피곤해. 다리도 아프고.

현태의 눈썹이 짧게 꿈틀댔다. 예전에 났던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던 수정은 컨디션이 저조한 날이면 다리에 통증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기다려.”

현태는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방 안에서 꿍하게 앉아 있던 희우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가 휙 돌아갔다.

“지금 나간 거?”

분위기를 개똥으로 만들어 놓고 저대로 나간다고? 진짜 상대하기 싫은 부류의 인간이구나. 난 정말 사람에 대한 예의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사람과 결혼식을 했구나.

“1년만 참으면 돼서 다행이야.”

경주에 갔을 땐 친해질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 순간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단 하루였다. 하루라면 자신의 본 모습을 충분히 숨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짜증 나.”

지랄 맞게 예쁜 수국을 보며 희우가 중얼거렸다.

* * *

“현태야!”

빌라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정은 현태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힘껏 흔들었다.

현태는 회사와 달리 편한 차림이었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섹시했다. 각 잡힌 와이셔츠를 입었을 땐 잘 드러나지 않던 근육이 부드러운 천 아래에선 여과 없이 드러났다. 저 품에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안겨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여기! 가져가서 먹어.”

거지 같은 기분을 감쪽같이 숨긴 수정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마카롱이 담긴 종이가방을 건넸다.

“고맙다.”

“그게 다야?”

수정이 눈을 새초롬하게 흘겼다. 조금 전 립스틱을 덧바른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만데?”

“말을 말자. 네 와이프는 알까? 네가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인간이라는 걸?”

순간 저를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던 희우의 표정이 떠올랐다.

희우는 만화 주인공처럼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게 신기하고 웃겨서 희우를 떠올릴 때마다 자꾸 픽픽 웃게 됐다.

“잘 먹을게.”

현태가 싱겁게 웃으며 종이가방을 받아 들자 수정의 눈매가 빠르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 수정은 곧 아무렇지 않게 환하게 웃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술 한 번 사.”

“그래.”

“나, 갈게. 와이프랑 즐거운 시간 보내. 싸웠으면 화해하고. 그런데 너랑 싸울 일이 있나? 우리 10년 동안 한 번도 안 싸운 거 알지? 너 같은 애하고 싸우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나, 간다.”

수정은 현태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던진 후 그대로 차에 탔다. 출발하기 전 차창을 내려 손을 흔들려고 했으나 현태는 벌써 빌라 입구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꼭 와이프한테 말해. 내가 사 줬다고.”

수정이 현태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뚱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저 남자 기분을 신경 썼다고. 영화나 보자.”

희우가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막 태블릿을 꺼냈을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들어오는 걸 보니 멀리 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희우는 저도 모르게 인기척이 나는 현관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짤짤 흔들고는 영화를 고르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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