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21)화 (21/75)

21화

“아뇨. 무슨 일이지?”

저도 이유를 모르겠는지 희우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현아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묘하게 톤이 높은 목소리라 조금만 듣고 있어도 귀가 피로해지는 말투였다.

“안녕하세요.”

희우는 대답하면서 맞은편에 앉은 현태를 흘깃 살폈다. 현태도 식사를 멈추고 희우가 통화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식탁 맞은편에 앉은 현태에게까지 현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저녁은 먹었어?

“네. 지금 먹고 있어요.”

-현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래도 올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덕분에 현태 걱정은 덜었지 뭐야.

웬일로 좋은 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라 희우는 건성으로 네, 네 짧게 대답했다.

-올케, 요리는 좀 해? 우리 현태가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라.

희우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몇 번 같이 식사해 본 결과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아요. 애도 아니고.”

-퇴근하고 피곤할 텐데 요리할 시간은 있었어?

과할 정도로 친절한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고막은 피곤했다.

“배달 음식 시켰어요.”

-뭐어? 배달 음식?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에 희우의 눈매를 살짝 찌푸리고 귀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네.”

-……세상에! 초등학교 선생은 퇴근 시간이 빠르지 않나? 퇴근해서 남편 밥 차릴 시간은 될 것 같은데. 배달 음식을 시켜? 화학조미료 범벅인 음식을? 그러게, 내가 사람 쓰라고 여러 번 말했잖아.

어쩐지 좋은 말로 시작하더라니.

희우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슬픈 예감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현아의 잔소리는 따다다다 이어졌다.

현태는 흥미롭게 바라보다 희우가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떨어뜨리자 얼른 낚아챘다.

“뭐 하는 거예요?”

희우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다. 현태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저었다.

“누나.”

-왜 네가 받아? 올케는? 내 말이 듣기 싫다니?

현아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나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각별한지 처음 알았어.”

-그, 그건!

“나한테 전화해. 애먼 사람 잡지 말고.”

-너 벌써부터 와이프 편드는 거야?

“벌써는 아니지. 4년이 지났는데.

-야! 기현태!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끝으로 현태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남은 밥을 맛있게 먹어 치웠다.

저가 해야 할 뒷감당에 대한 생각은 못 하는지.

희우가 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자 식사를 얼추 마무리한 현태가 식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설거지는 내가 하죠.”

“식기 세척기 돌릴 거예요.”

“내가 돌릴게요.”

“어떻게 돌리는 줄은 알아요?”

“빙글빙글?”

“푸핫!”

현태의 썰렁한 농담에 무방비한 상태의 희우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현아 때문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는데 희우가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 네 글자 말한 것 치고는 꽤 가성비가 괜찮았다.

“기현태 씨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의외네요.”

“센스가 뛰어난 편이라.”

“자기애도 충만하시고.”

“자존감이 높다고 하죠.”

“눼에, 눼에.”

희우가 얄밉게 깐족대며 대답을 길게 늘어뜨렸다. 말투와 달리 기분은 좋은지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겨 담는 손길이 가벼웠다.

“그럼 맡기고 갑니다.”

희우가 막 부엌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현태는 지금 이렇게 희우를 보내 버리면 기껏 좋게 만들어 놓은 분위기가 소용없어질 것 같아 다급하게 희우를 불러 세웠다.

“잠깐.”

“네?”

“먹을 동안 앞에 있어 준다면서요.”

“다 드셨잖아요.”

희우가 텅 빈 그릇을 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커피 마실 겁니다.”

“아. 커피.”

희우의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 현태가 빤히 쳐다보자 희우가 잠시 망설이다 포트에 전원을 다시 눌렀다.

“팔팔 끓어야 더 맛있어요.”

물이 끓은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여전히 뜨거울 것 같았지만 희우는 굳이 물을 다시 끓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런 것도 맞지 않는군.

하지만 커피가 식을 동안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희우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같이 보내는 게 중요했다. 저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풀어졌으니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목표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맹수처럼 현태는 그날그날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는 중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저를 덜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생전 하지 않던 농담까지 쥐어짜 내서 웃게까지 했으니 목표 달성이었다.

해리슨 빌딩을 사고자 마음먹었을 때보다 더 치열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살금살금.

현태는 사냥감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목덜미를 물어 버리면 그만이겠지.

먹잇감이 된 줄도 모르는 희우는 끓는 물에 커피믹스를 부으며 무해한 얼굴로 물었다.

“커피믹스 좋아해요?”

“즐기진 않습니다.”

“다른 거 줄게요, 그럼.”

“괜찮습니다.”

믹스 가루를 넣은 머그잔을 치우려고 하자 현태가 손을 뻗었다. 희우는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뜯은 믹스 봉지로 커피를 휘휘 저었다. 현태는 기겁했다.

스푼을 두고 왜…….

하지만 이번엔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희우와 있으면 이상하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좀생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꾸 눈에 거슬렸다. 하나하나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좋은 말을 못 들을 게 뻔했다.

하지만 희우는 눈치가 귀신이었다.

“설거짓거리 더 만들기 싫어서요. 그리고 이렇게 환경 호르몬을 적당히 섞어 줘야 더 맛있는 거예요.”

희우의 이상한 논리에도 선뜻 입으로 가져가 지지는 않았다. 뜨거워서지 절대 비닐 쪼가리로 저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합리화시키는 중이었다.

* * *

일주일은 빠르게 흐르는데 하루는 느리게만 흘렀다. 희우는 빠르게 알림장 검사를 한 후 청소 당번 아이들과 함께 빗자루를 들고 교실을 쓸었다.

“얘들아, 그런데 지금 나만 청소하는 거 아니지?”

한창 청소에 열을 올리다 주변을 살피니 청소를 하고 있는 건 저뿐인 것 같았다.

“1분단 다 쓸었어요!”

“저도 줄 맞췄어요, 선생님!”

희우는 아이들이 당당하게 청소했다고 말하는 곳을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바닥에 자잘한 쓰레기들이 남아 있었다.

“저기랑 저기! 쓰레기 있는데? 그리고 줄도 안 맞잖아.”

“어디요?”

희우의 잔소리에 아이들이 고개를 쭉 빼고 자신들이 청소한 부분을 다시 살폈다. 한참을 성의 없이 기웃대던 아이들이 빗자루를 들고 쓰레기가 있는 곳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차라리 혼자 하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우는 꾹 참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을 청소할 줄 아는 것도 교육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 청소 당번엔 민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덩치는 곰같이 커다란 녀석이 의외로 꼼꼼해서 자기 청소 담당인 복도를 쓸고 와서 교실 청소를 돕기 시작했다.

민호가 열심히 청소를 하기 시작한 탓일까. 미적대던 아이들도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교실 정리를 마무리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또래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똑똑.

교실 정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때쯤이었다. 누군가 교실 앞문을 두드렸다.

“네?”

청소하느라 이미 열려 있던 문이라 희우는 대답만 크게 하며 앞문 쪽에 서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여성은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처음에 학부모님이 꽃바구니를 가지고 온 줄 알고 희우는 무척 당황했으나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아함으로 눈이 커다래졌다.

“꽃바구니 배달 왔습니다.”

푸른 수국이 잔뜩 들어 있는 꽃바구니였다. 희우가 꽃바구니를 받아 들기도 전에 교실에 남아 있던 아이들의 반응이 먼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선생님 꽃바구니 받았어요?”

“남자친구가 보내준 거예요?”

“바보야! 우리 선생님이 남자친구가 어딨어?”

“왜 없어?”

“없어!”

“네가 어떻게 알아?”

“‘단체 채팅방’ 프로필 사진에 보면 혼자 찍은 사진만 올라오잖아! 남자친구 있었으면 당연히 같이 찍은 거 올리셨겠지! 우리 선생님이 자랑하는 거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그러네. 샘 폰 바꾼 것도 막 자랑했잖아.”

꽃바구니를 받아 든 희우는 아이들이 저를 두고 벌이는 설전을 가만히 들으며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샘 남자친구 있거든?”

“없을걸?”

“샘!”

“선생님! 남자친구 없죠?”

혼자서 묵묵히 청소를 마무리하고 있던 민호는 교실 뒤에 서서 아이들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빗자루를 정리하는 행동이 눈에 띄게 느린 걸 보니 대화에 여간 집중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드디어 희우의 입이 열렸다.

자신의 일처럼 크게 흥분하며 떠들어대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얘들아, 제발 평소에도 이 정도만 집중을 해 주렴.

“남자친구는 없어.”

“오예! 거봐!”

“헐! 선생님, 진짜 없어요?”

두 아이의 표정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걸 보며 희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남편은 있어.”

투둑!

민호가 뒤에서 빗자루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놀란 것 같았다.

“헐! 대박!”

“샘! 언제 결혼했어요?”

“옛날 옛적에. 자! 이제 청소 마무리하고 집에 가자! 민호 혼자 정리 다 하네?”

희우가 독려하며 아이들을 교실 뒤로 보냈다. 민호의 빗자루질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나머지 정리를 하느라 희우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어찌어찌 아이들을 다 돌려보낸 후 희우는 책상 위 꽃바구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커다란 바구니 안에는 푸른 수국이 가득했다.

그 사람이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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