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19)화 (19/75)

19화

“기현태 본부장님! 오늘부터 기획팀에서 함께 일하게 된 하수정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파악하고 있던 현태는 불쑥 들려온 명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수정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갸웃 기울인 채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게 웃었다.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으실까. 지난번에 말했잖아. 여기서 일하게 됐다고.”

“부서가 여기라곤 말 안 했지.”

현태의 딱딱하고 심드렁한 반응에도 수정의 목소리는 여전히 쾌활했다.

“서프라이즈~ 뭐야. 하나도 안 반가운 거야?”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그래서 내가 말 안 한 거야. 플랜맨 기현태 씨의 완벽주의를 부수는 재미를 위해서. 이것 봐! 얼마나 재밌어?”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는 수정의 모습에 현태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튼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회사에선 부하 직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정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부드러운 다갈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 * *

출근해서 수업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교실 전화가 울렸다.

“네, 6학년 1반입니다.”

-선생님, 전학생이요!

교무실에서 온 전화였다.

“우리 반 차례인가요?”

-네, 7반은 도움반 학생이 있어서요.

도움반 학생이 있는 교실은 다른 반보다 정원이 적었다.

“아, 맞다. 알겠습니다.”

-지금 데리고 올라갈게요.

희우는 전화를 끊고 소란스러운 교실을 정리했다. 잠시 후 교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희우는 얼른 앞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교무 행정원과 남학생 한 명, 학생의 어머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선생님, 여기요.”

행정원은 희우에게 학생의 인적 사항이 간단하게 적힌 종이를 내밀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교실 문 앞에 남은 사람은 이제 학생과 학부모뿐이었다.

문밖에 선 낯선 아이를 발견한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 신함 초등학교에서 왔구나? 이름이 진상우네? 반갑다.”

희우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남학생을 보며 방긋 웃었다. 아이는 긴장을 했는지 빳빳하게 서서 희우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근처로 이사를 와서요. 선생님.”

대답은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들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쩍번쩍하게 꾸미고 온 상우 엄마는 말할 때마다 빨간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다. 짙은 향수 냄새에 코가 얼얼했다.

“상우, 아이들한테 인사시킬게요. 하교 후에 이사한 집으로 혼자 갈 수 있나요?”

“네. H, 아파트로 이사 왔거든요. 학교 바로 근처라.”

H아파트는 학군에서도 가장 비싼 곳이었다. 상우 엄마는 유독 아파트 이름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사이 상우는 반쯤 열린 교실 문 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안을 살피고 있었다.

상우의 얼굴이 보였는지 교실 안은 아까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아이들이 더 날뛰기 전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상우 엄마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마음이 바쁜 희우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일단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가려는데 교무 부장이 희우를 향해 다급하게 손짓하며 다가왔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걱정됐지만 희우는 차분하게 정환을 기다렸다.

“전학생은 어때?”

지금껏 정환이 희우 반 학생에게 관심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살짝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희우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상우요? 괜찮아요. 왜 그러시는데요?”

“특별히 잘 봐주라고.”

아니나 다를까 정환은 뻘소리를 장대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정환이 능글맞게 웃으며 한 말에 희우는 귀를 의심했다. 여기가 회사도 아니고 잘 봐주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왜요? 어디 아픈 아이인가요?”

특이 체질이거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가정환경을 가진 아이들은 따로 언급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상우는 건강해 보였고, 입고 있는 옷도 깔끔했다. 게다가 상우 엄마는 명품으로 온몸을 친친 감고 있었는데.

“우리 학교 운영 위원장님 조카래.”

“그래서요?”

희우는 몸을 뒤로 쭉 뺐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괜히 싫은 소리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니까. 독고 선생 생각해서 미리 알려주는 거야.”

뭐 어쩌라는 건지.

더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기에 대충 알겠다고 대답한 후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정환에게선 항상 매캐한 담배 냄새와 몸에서 덜 빠진 알코올 냄새가 났다. 하나만이어도 싫을 텐데 한꺼번에 두 개가 섞여서 나니 가까이 가기만 해도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술과 담배에 절인 장아찌 같은 사람이라고, 희우는 늘 생각했다.

“교무 부장이 뭐라고 했길래 표정이 그래?”

희우가 정환에게서 멀어지자마자 혜정이 얼른 달려와 물었다.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혜정에게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열 마디로 부풀려져서 교무실로 전달될 게 뻔했다.

“에이! 거짓말! 기분 나쁜 표정인데? 내가 자기를 몰라?”

혜정이 싱긋 웃으며 더 친절하게 굴었지만 희우의 뚱한 태도는 풀어지지 않았다.

“나 원래 표정이 이래. 요즘.”

희우는 될 수 있으면 혜정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업무에 관한 이야기도 겨우 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더더욱 할 필요가 없었다.

혜정은 뒤를 졸졸 따라오며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물었지만 희우는 딴소리만 하다 복도에서 싸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오늘 전학 온 상우와 민호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민호에게 상대도 안 되어 보였지만 상우는 턱을 바싹 치켜들고 입에 담기 힘든 욕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중이었다. 표정만 놓고 봤을 때 밀리는 쪽은 오히려 민호였다.

“병신, 거지 같은 돼지 새끼야. 비계 냄새 나니까 입 닥치고 저리 가서 짜져 있어.”

“뭐? 이 새끼가! 죽을래?”

“기름 냄새 줄줄 흐르는 주먹으로 쳐 봤자 내 얼굴에 기름만 묻겠지. 더러운 냄새 나니까 저쪽으로 꺼져.”

“이게 진짜!”

민호가 멱살을 움켜쥐자 키가 한참 작은 상우의 뒤꿈치가 위로 쑥 올라갔다.

“거기 둘!”

두 아이 사이로 희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뒤따라오던 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희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민호는 씩씩대면서도 쥐고 있던 상우의 멱살을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상우는 민호에게서 놓여나자마자 볼록 나온 민호의 배를 툭툭 치며 ‘돼지 새끼’, ‘비곗덩어리’, ‘냄새 나는 새끼’ 등등의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진상우! 너, 선생님 말 안 들려?”

“이 새끼가 멍청한 짓을 하니까 그러죠! 이 옷도 버려야겠네. 돼지기름 묻어서 못 입겠어.”

“너 친구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돼지 새끼가 내 필통을 일부러 치고 갔어요. 샤프가 망가졌다고요. 그게 얼마나 비싼 샤프인지 아세요? 오십만 원이 넘는 거라고요!”

상우는 흥분을 했는지 목소리가 제법 높아져 있었고 아이들의 시선은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점점 더 모였다.

“일단 두 사람 따라 와. 상담실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희우가 앞장서자 덩치가 산만 한 민호가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따라갔다. 하지만 상우는 씩씩대며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진상우!”

희우가 큰 소리로 불렀지만 상우는 복도를 벗어나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5교시가 시작되었지만 상우는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민호는 비어 있는 상우의 빈자리를 보며 불안한지 괜히 희우의 눈치를 슬금슬금 봤다.

-선생님. 필통은 정말 실수로 떨어뜨린 거예요. 금방 주워 줬는데 상우가 애미 없는 거지새끼라면서 샤프 값을 물어내라고 했어요. 전 그게 그렇게 비싼 건지도 몰랐어요.

“하아…….”

희우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무래도 상우 부모님께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침에 받은 전입생 자료를 보고 막 전화기에 손을 갖다 댔을 할 때였다.

뚜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르-

교실 전화가 먼저 울렸다. 발신 번호를 보니 교무실이었다.

희우는 마음이 급했기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6학년 1반입니다.”

-독고 희우 선생님, 지금 교무실로 잠시 내려오시겠어요?

교감 선생님이었다. 그의 날 선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비어 있는 상우의 자리가 더 마음에 걸렸다.

“교감 선생님, 지금 학생 한 명이 교실에 들어오지 않아서요. 먼저 아이를 찾아보고…….”

-그 애 지금 교무실에 와 있어요.

“네?”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었지만 왜 교무실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희우는 아이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후 얼른 교무실로 내려갔다.

“상우가 담임 선생님을 바꿔 달라고 했다고요?”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난처해하는 교감 옆에는 교무 부장인 정환이 희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간중간 짧은 한숨이 섞인 소리가 들렸다.

“전학생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정환이 혀를 끌끌 차며 한마디 했다.

희우가 열 받아서 눈을 부릅뜨자 정환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상우는 교무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이며 희우와 교감, 교무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상우, 일어서.”

희우가 교무실 뒤쪽으로 걸어가 상우 앞에 서서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자신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상우는 움찔 놀라는 듯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너! 친구한테 그렇게 못된 말을 해 놓고 여기 와서 뭐 하는 거야. 여기서 교감 선생님한테 이르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니?”

“거지 같은 게 먼저 잘못했잖아요! 더러운 비계로 내 필통을 건드렸다고요!”

상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6학년 남학생치고는 왜소했지만 눈빛이 제법 사나웠다.

희우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멀뚱한 얼굴로 서 있는 교감과 교무를 뒤돌아보며 물었다.

“어떡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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