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가까이 다가오는 현태를 본 혜정이 호들갑을 떨며 머리를 매만졌다. 저절로 침이 꿀떡 넘어갔다. 목소리는 어떨지 기대가 돼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똑똑.
남자가 혜정의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혜정은 너무 떨려서 호흡마저 가빠졌다.
‘이건 운명이야.’
오늘 이렇게 일찍 나온 것도, 하필이면 저 남자의 차가 이중 주차되어 있던 것도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운명의 세심한 세팅 같았다.
혜정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차창을 내렸다. 남자는 운전석 허리를 살짝 숙이며 혜정과 눈높이를 맞췄다.
‘세상에! 향기도 좋아.’
혜정은 코를 킁킁대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눈을 내리깔고 새초롬하게 물었다. 속눈썹 연장을 한 보람이 있었다.
숨 쉬듯 찍어온 셀카 경력으로 혜정은 예쁘장한 얼굴을 돋보이게 할 표정과 각도를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도도한 표정과 달리 잔뜩 흥분한 심장은 튀어 나갈 것처럼 정신없이 뛰었다.
“혹시 퇴근 시간입니까?”
나한테 관심이 있나 봐! 어떡해!
혜정은 떨리는 손가락을 살짝 말아 쥐며 차분하고 단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은 제가 출장 때문에 빨리 나온 거라, 다른 날은 30분 뒤에 끝나요.”
중고 명품백 직거래 시간 때문에 부랴부랴 나온 것이지만 혜정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품위 유지를 위해 하는 일이니 출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생각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현태는 예의 바른 미소로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혜정은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훤칠한 남자가 저에게 와서 먼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퇴근 시간을 체크하다니.
내일도 와서 기다리겠다고 하는 걸지도 몰라!
혜정의 시선이 현태가 타고 온 차로 옮겨갔다. 차에 대해 잘 모르지만 딱 봐도 가격대가 엄청날 것 같은 차였다. 혜정은 드디어 저에게 온 기회에 온몸이 전율했다.
마음 같아선 따라가서 이름이나, 사는 곳 등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럴 때일수록 길게 봐야 했고,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다. 쉬운 여자로 보이기 싫었다.
혜정은 미련 없이 주차장을 떠나는 것처럼 살짝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백미러로 남자가 서 있는 쪽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남자는 차 옆에 서서 떠나가는 자신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혜정의 입가가 보기 좋게 위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오늘 일도 무척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런 남자와 사귀면 명품백 중고 거래 같은 건 안 해도 되겠지?
괜히 마음이 부푼 혜정은 콧노래를 부르며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했는데 불편해지기까지 했다. 오늘은 계약서 내용대로 그와 데이트를 해야 하는 첫날이었다.
이렇게 털끝만큼도 기대가 안 되는 데이트도 처음이었다.
희우는 다급하게 공문을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껐다. 회식이 잡혀 있는 날을 제외하곤 퇴근 시간에 쫓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현태에게 나는 짜증이 아니라 그가 오래 기다릴까 초조해하는 자신에게 나는 짜증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배려를 했다고…….”
교실 문을 잠그면서 희우는 세 끼 굶은 시어머니처럼 구시렁댔다.
“오늘은 빨리 퇴근하시네요?”
막 교실을 나선 이슬이 문을 잠그고 있는 희우를 발견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희우는 늘 늦게까지 수업 준비를 하는 편이라 동시에 퇴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러는 이슬 샘이야말로 웬일이야? 이렇게 빨리?”
“남자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대답하는 이슬의 두 볼이 발그레했다. 남자친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모양이었다.
“좋을 때다.”
희우가 한숨을 섞어 말하자 이슬이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샘은 무슨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세요?”
“그런가?”
“샘은 남자친구 안 만나세요?”
희우의 얼굴을 살피는 이슬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두 사람은 어느새 복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직 오늘 일과를 마무리하지 못한 다른 반 교사들이 지나가는 희우와 이슬을 발견하고 대충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갑니다!”
“내일 봬요!”
두 사람의 경쾌한 인사 소리에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 남자친구 없는데?”
“예? 정말요?”
“어. 근데 남편은 있어.”
피로감이 절절한 목소리였다.
“예에?”
이슬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결혼하셨어요?”
“어.”
“근데 왜 말 안 하셨어요?”
“안 물어봐서?”
먼저 걷는 희우의 뒤를 이슬이 졸졸 따랐다.
“헉! 전 당연히 미혼이신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이슬은 아직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자연스럽고 어정쩡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선배의 결혼 유무도 몰랐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자신의 무심함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대부분 잘 몰라.”
“왜요?”
이슬이 약간은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데 눈치 없이 물어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질문을 삼키기엔 늦어 버렸다.
“그동안 같이 안 살았거든.”
별거, 이혼 소송 중 등 다양한 부정적인 언어가 떠올랐다. 이슬은 희우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눈치 없이.”
“괜찮아.”
“그럼 지금은 괜찮으세요?”
이슬은 희우가 지금도 마음이 힘들까 봐 울컥해서 눈이 그렁해졌다. 희우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이슬의 글썽한 눈을 보고 제 말을 오해했나 싶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해외에 나가 있느라 같이 안 산 거야.”
“정말요?”
희우의 대답과 동시에 이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안 그래도 새하얗고 여리여리한 사람이 두 손까지 모으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6학년 남학생들 사이에서 이슬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 얼마 전에 귀국했어.”
“와! 정말 좋으시겠어요! 그동안 너무 보고 싶으셨겠다.”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은 이슬이 말끝을 길게 늘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희우는 자신의 마음을 가감 없이 밖으로 드러내는 이슬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렇게 안팎이 똑같아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현태가 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이슬과 중앙 현관에서 헤어진 후 희우는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진짜 기다리고 있으려나? 시간이 많이 지나서 먼저 갔을지도 모르겠네.
퇴근길에 누군가 저를 기다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주차장에 가까워질수록 희우의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주차장으로 나오니 차 한 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던 차라 익숙한 탓도 있었지만 고만고만한 차들 사이에서 현태의 차가 단연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후우……. 들이쉬었던 숨을 짧게 뱉어낸 후 현태의 차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었다. 저 남자는 스스로도, 가진 것으로도 주변의 것을 묘하게 압도하는 사람이었다.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현태가 눈을 뜨고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광 때문에 희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등지고 선 희우의 얼굴이 왠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현태는 느긋하게 기대앉아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차창 밖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똑똑!
다시 한번 희우가 차창을 두드리자 현태는 스르륵 차창을 내리고 희우의 얼굴을 마주했다.
“보고 있으면서 왜 문을 안 열어요?”
희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 질문에 현태는 괜히 움찔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사람 얼굴을 빤히 보면서 딴 생각이라니. 아무리 제 존재감이 미미하다 할지라도 참 밉살스러웠다.
* * *
현태는 천천히 차를 몰아 시내에 있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첫 데이트 장소로 희우가 영화관을 지목한 까닭이었다.
현태는 영화를 즐겨보지 않았다. 허구의 이야기를 보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살면서 영화관에 간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희우와 가까워져야 했기에 그녀가 하자는 대로 움직여줄 생각이었다.
“표는 안 삽니까?”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상영관으로 직진하는 희우를 보며 현태가 멀뚱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매표소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까 예매했는데요?
희우가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고 살짝 흔들었다.
“아!”
“아?”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라서.”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희우는 너그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현태보다 아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팝콘 안 사요?”
현태가 눈치 없이 그대로 서 있자 희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현태는 뭔가를 먹으면서 하는 걸 싫어했다. 영화를 볼 땐 영화만. 음식을 먹을 땐 음식만. 운전을 할 땐 운전만. 영화관을 즐겨 찾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기도 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쩝쩝대는 소리, 영화관 가득 풍기는 팝콘 냄새.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지금 나한테 하라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현태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팝콘을 사기 위해 억지로 몸을 돌렸다. 고소하면서 달콤한 냄새가 온몸으로 쏟아졌다.
킁킁.
현태가 팔을 들어 소매의 냄새를 맡았다. 사방이 짙은 팝콘 냄새로 가득 차 있어서 옷에 밴 냄새는 따로 맡아지지 않았다.
마지못해 팝콘 매점 앞으로 걸어가는 현태의 뒷모습을 보며 희우가 혀를 짧게 찼다.
“돈도 많은 사람이 엄청 쩨쩨하네.”
극장 안 공기는 현태의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밀폐되어 있는 공간 특유의 텁텁함, 팝콘과 버터구이 오징어 냄새가 밴 찝찝한 공기.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영화 제목이 뭡니까?”
자리를 찾아 앉고 나서야 현태는 영화 제목을 물었다. 나름 첫 데이트인데 어떤 영화를 골랐을지도 궁금했다.
제발 희우와 취향이라도 같기를 바랐다.
“어둠속에서,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