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저 여자와 몸을 섞고 사랑을 나누면 어떤 기분일까.
아직 독고희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현태의 취향과도 거리가 멀었다.
좁은 등이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곱슬곱슬한 긴 머리카락은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감촉이 문득 궁금했다. 머리카락 정도는 살짝 만져도 모를 것 같아서 현태가 막 머리카락 쪽으로 팔을 뻗었을 때였다.
“왜 이렇게 덥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희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커다란 손이 놀라서 얼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잠시 눈을 감았던 현태는 다시 눈을 뜨고 희우를 조용히 지켜봤다.
앉은 채로 몇 번 손부채질을 하던 희우는 현태가 아까 옆으로 치워 놓은 선풍기를 제 앞으로 스윽 끌어왔다.
선풍기를 틀려고 하던 희우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홱 숙였다. 버튼이 고장 난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괜히 뜨끔해진 현태가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모른 척하게 됐다.
“이게 또 이러네?”
희우가 선풍기 본체를 손으로 탕탕 두드렸다.
저렇게 화풀이를 하나? 감정 컨트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사를 하지?
선풍기를 부술 듯 내려치는 희우의 뒷모습을 보며 현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러다 손을 다칠 것 같아 현태가 막 일어난 순간.
“됐다!”
거짓말처럼 선풍기가 다시 노인네처럼 고개를 흔들어댔다.
달달달달.
낡은 선풍기가 회전하면서 희우에게서 현태에게로 바람을 불어 주었다. 희우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리며 덩달아 일어나 앉았던 현태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현태는 코앞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치우기 위해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았다. 하필이면 그때 희우가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아야!”
희우가 인상을 쓰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꽈악 쥐고 있던 현태를 쏘아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날려서.”
이대로 쥐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현태는 미련 없이 머리카락을 놓았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끝에 맴돌았다.
희우에게서 나는 체향은 생각보다 달콤하고 향긋했다. 저와 같은 바디워시를 썼을 텐데도 왜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의아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두운 허공에서 얽혔다. 걸친 게 없는 현태의 상체가 달빛에 흐리게 드러났다.
“그럼 자요.”
두 볼을 따끈하게 데우는 열기를 무시하며 희우는 얼른 드러누웠다.
머리카락을 돌려받은 희우가 이불 끝으로 움찔움찔 움직였다. 누울 자리를 가늠한 후 드러눕는 모습이 제법 신중했다.
그래 봤자 현태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그렇게라도 꾸물꾸물 멀어지는 게 어이없고 가소로웠다.
현태의 시선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 문득 저 목덜미를 움켜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현태는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아무래도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았다.
창호지 사이로 달빛 대신 햇살이 쏟아져 희우의 이마에 닿았다. 어디선가 나는 좋은 향기에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댔다.
“으음. 좋은 냄새.”
희우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잠깐! 살 색? 희우는 눈 앞에 펼쳐진 살 색의 향연에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뭐, 뭐예요?”
배고 있던 건 현태의 팔이었다. 민망함과 수치스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달라붙은 건 그쪽입니다.”
현태는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로 일어나 앉아 희우가 베고 있던 팔을 주물렀다.
“깨웠어야죠!”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아니, 사람이 실수를 하면 얼른 알게끔…….”
“나한테는 기회라서.”
할 말이 없었다. 현태는 사과만큼이나 빨개진 희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덕분에 잠을 설쳤지만 괜찮습니다.”
현태가 불룩해진 자신의 바지를 흘깃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희우의 시선이 현태의 숙인 고개를 따라 잔뜩 성난 바지에 가서 닿았다가 급히 덜어졌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한 사람이 바로 저였으면서 이 더운 날에, 뭐 하자고 저 남자의 맨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쳐 자고 있었는지.
품 안에 무언가 끌어안아야 숙면하는 자신의 잠버릇이 오늘처럼 원망스러운 날이 없었다.
희우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밖에 안 들릴 것을 깨달았다.
“미, 미안해요. 잠버릇이 좀……. 뭘 안고 자는 버릇이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불편했죠. 팔도 많이 저렸을 텐데 진짜 미안해요. 다음에도 또 그러면 그냥 툭 쳐 내요. 알겠죠?”
“그럴 리가요.”
현태는 노골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드러냈다. 지금도 일부러 윗옷을 안 입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설마 내가 저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고 한 건 아니겠지?
희우는 떠오르지 않는 지난밤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게다가 정말 숙면을 취했다. 이래저래 낯부끄러운 상황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운전한다니까요.”
결국 운전대를 잡은 건 현태였다. 희우가 몇 번이나 운전하겠다고 했지만 현태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루 밤 샜다고 졸진 않습니다.”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는 말이 이상하게 나오지 않아서 대충 둘러댔다.
잘 통했는지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희우는 미안해하며 현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였다.
그의 말대로 현태의 상태는 쌩쌩해 보였다. 잠 못 잤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체력이 좋은 건지, 잠이 원래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어제 잘 자 놓고 거짓말을 한 건지.
희우는 어떤 게 사실일까 속으로 생각하며 운전하는 현태를 곁눈질로 흘끔대다 저도 모르게 불쑥 솟았던 바지가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난 아니던데……. 헉!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변태냐?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을 나무랐지만 또렷하고 강렬한 이미지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현태는 정말 단 한 번도 졸지 않았고, 양심의 힘으로 희우도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조수석에서 눈을 말똥말똥 잘 뜨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희우는 차에서 내렸지만 현태는 그대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안 내려요?”
희우가 허리를 숙여 운전석에 앉은 현태를 보며 물었다.
“약속 있습니다.”
도착하기 전 문자를 확인하더니 약속이 잡힌 모양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다른 사람 만나러 나간다는 말에 희우는 살짝 서운했지만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운할 게 뭐가 있어. 무슨 사이라고.
“그래요, 그럼.”
희우는 짧게 인사하자 현태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차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희우가 고개를 갸웃 기울어졌다.
“너무 쌩쌩한데?”
아무래도 어제 못 잤다는 건 거짓말이 분명했다. 희우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아침 내내 저를 괴롭혔던 죄책감을 가볍게 털어냈다. 오는 내내 심기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장면도 함께.
* * *
“여기야!”
바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현태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만큼이나 친근한 얼굴이 보였다. 카운터 테이블에 앉아 손을 흔드는 사람은 수정이였다.
“언제 왔어?”
현태가 스툴에 앉으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수정은 작은 잔에 채워져 있던 액체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크! 맛있다! 역시 어딜 가도 이 맛은 여기밖에 안 나!”
다 같은 술인 줄 알면서도 수정은 장소에 따라 술맛이 달라진다고 부득부득 우겼다. 술을 즐기지 않는 현태는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얼마나 마신 거야?”
현태가 이미 반쯤은 비어 있는 위스키병을 보며 물었다.
“어쩌겠어? 술이 이렇게 단데!”
수정이 붉은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정신이 확 들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 짓는데도 현태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수정 앞에 놓인 위스키병을 제 앞으로 치워 버렸다.
“어? 이게 지금 뭐 하는 플레이지?”
수정이 눈을 부릅뜨며 현태가 치워 버린 위스키병으로 팔을 뻗었다.
“할 말 있다며.”
수정의 시도를 가볍게 제지하며 현태가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정 없게 굴기야?”
수정이 입술을 삐죽이며 못마땅해했지만 현태는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알지, 저 표정. 빨리 말하지 않으면 일어서겠다는 저 정 없고 무심한 표정.
수정은 태어나서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현태를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말할게. 칫!”
“여기 얼음물 한 잔 주세요.”
현태의 말에 바텐더가 투명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잔을 재깍 내밀었다.
딸그락!
잔이 바 위에 놓이면서 얼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현태는 물잔을 수정 앞으로 스윽 밀었다.
수정은 눈을 흘긴 후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처럼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으으으윽! 머리야!”
갑자기 차가운 물을 들이켠 탓인지 술을 병째 들이부어도 아프지 않던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팠다. 수정이 눈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생수를 병째 들이켜다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던 희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꼴불견이었는데. 새삼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
‘웃어?’
잔뜩 구기고 있던 수정의 얼굴이 빠르게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현태를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갔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웃는 건 처음이었다.
느낌이 안 좋았다.
“친구가 머리 아프다는데 웃어?”
수정이 모른 척 얄밉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이런 얄궂은 기분 따위, 밖으로 내보일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할 말이 뭔데.”
두 번째 반복되는 질문. 여기서 한 번 더 반복되면 현태는 미련 없이 일어나서 가 버릴 게 확실했다. 수정은 조급한 마음을 미소 속에 익숙하게 숨기고 심드렁히 답했다.
“꼭 할 말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야? 우리가? 좀 섭섭해지려고 한다, 기현태? 한국에 오더니 아주 애처가 다 되셨어.”
애처가, 수정이 고르고 고른 단어였다.
“애처가는 무슨.”
“와이프는 어때? 너랑 잘 맞는 것 같아?”
수정이 예의상 질문하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현태 입에서 감당할 수 없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괜찮다고 말하지 마, 기현태. 그건 안 돼.
“전혀.”
현태의 주저 없는 대답에 수정은 참았던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간절히 원하던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