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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14)화 (14/75)

14화

내 방인데 마지못해 들어가는 이 낯선 기분은 뭐지?

희우는 뒤를 따라가며 그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현태의 등이 넓다는 건 알았지만 가까이 있어서인지 유독 더 넓게 느껴졌다.

미닫이문을 열자 열린 틈 사이로 정갈하게 깔린 이불과 나란히 놓인 베개 두 개가 보였다.

“어……. 이불을 더 가지고 올게요.”

사이좋은 원앙 한 쌍처럼 꼭 붙어 있는 베개에 희우는 당황해서 말문이 다 막혔다.

괜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이 아닌데 홍시처럼 붉게 익은 얼굴에 열감이 홧홧하게 올랐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희우가 나가려고 몸을 틀자 현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새카만 시선이 희우에게 내리꽂듯 전해졌다.

약간은 멍한 기분을 느끼며 희우가 물었다.

“왜요?”

“서먹한 사이라고 소문내러 갑니까?”

비겁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현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

희우가 난처한 표정으로 이부자리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두 사람 사이가 남보다 못한 걸 들킨다면 할아버지는 삼 박 사 일 동안 쉬지 않고 잔소리를 퍼부어 댈 게 분명했다. 그러고도 남을 만큼 성격도 체력도 넘치는 분이었다.

상상만 했을 뿐인데 고막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일 년 후에 이혼할 거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수연제는 사라져 버리고 말 거다. 절대 안 돼!

“그럼 어떡해요.”

“이대로 자야죠.”

“이익!”

현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희우의 목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놀란 자라 같기도, 화난 두꺼비 같기도 했다.

이 여자는 걸핏하면 저런 표정을 짓네.

현태는 희우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책하다 만난 동창에겐 잘도 웃더니.

희우에게 별다른 애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내였다. 현태는 누구와도 자신의 것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비록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이라도 말이다.

뼛속까지 이기적인 놈이라 비난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희우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서 이불과 까는 요를 분리했다. 그리고 요 위에 자신의 베개를 놓고, 덮는 이불 위에 현태의 베개를 놓았다.

“저렇게 자자는 말입니까?”

현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날씨가 더워서 이불을 덮고 잘 일은 없겠지만 노숙하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자는 건 별로였다.

“새벽이 되면 좀 쌀쌀하긴 하겠지만 그때는 이렇게 하면 돼요.”

희우가 시범을 보이려는지 끌어다 놓은 요 위에 발랑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본 현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래도 뭘 하려고 저러나 궁금하긴 했다.

요 위에 길쭉하게 자리를 잡은 희우는 곧 요 한쪽을 잡고 김밥처럼 몸을 둘둘 굴리기 시작했다. 곧 희우는 김밥 속 단무지처럼 요 안에 쏙 들어갔다. 얼굴만 비죽 내민 모습이 꼭 애벌레 같았다.

이 여자는 주로 동물을 닮았군.

“어때요?”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침대가 없는 것도 짜증 나는데 침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자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현태는 얼굴을 살짝 찡그린 다음 희우가 돌돌 말고 있는 요 한쪽 끝을 잡았다.

놀란 애벌레의 눈, 코, 입이 동시에 확장되는 걸 보며 현태는 움켜쥔 요의 양쪽 끝을 위로 죽 잡아당겼다. 기묘한 카타르시스에 입술 끝이 둥글게 휘었다.

“악!”

안에 말려 있던 희우가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그 와중에도 크게 소리를 지르면 밖에 들릴 거라 생각했는지 서둘러 입을 막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에요!”

닫혀 있는 문을 연신 살피며 희우가 다리를 동동 굴렀다. 태워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이 제법 사나웠지만 현태는 가볍게 무시했다.

“난 이렇게 못 잡니다.”

현태는 이불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베개도 나란히 놓았다. 제자리를 찾은 침구를 보니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럼 정말 이렇게 자자고요?”

“뭐가 문제죠?”

“한 이불 덮고 자는 건 좀 그렇잖아요.”

“바닥에서 자든가.”

현태가 맨바닥을 턱으로 가리켰다.

남자가 돼서 쪼잔하게. 드라마 속 남자들은 입고 있는 옷도 벗어 주더만. 이 남자는 ‘양보’나 ‘배려’라는 단어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런 남자에게 질 수는 없었다.

“이거 내 이불이거든요?”

“내 옆에 자든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현태가 얄미웠다.

“그럼 약속한 대로 허튼짓은 하지 말아요.”

“어떤?”

“뭐……. 그…… 몸을 만진다거나 하는.”

“씻는 곳은 어딥니까?”

현태는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희우는 현태를 노려보면서도 낮에 더위 때문에 고생했던 게 떠올라 방에 붙어 있는 다른 문 하나를 열어 보여줬다.

말을 돌리는 게 수상했지만 꼬치꼬치 따지는 것도 이상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여기요.”

현태는 열린 문 안쪽으로 고개를 비죽 집어넣었다. 욕실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좁았지만 한 사람이 쓰기엔 적절한 크기인 듯도 싶었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욕실이었다. 변기 하나, 세면대 하나, 샤워기 하나.

키가 큰 현태에게 머리가 거의 닿을 정도로 천장이 낮았다. 잠시 안을 둘러본 현태는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현태가 들어간 욕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우는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 여기서도 따로 잘 거라고 생각했을까.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가만, 기현태는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분명히 예상을 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것은…….

여기까지 생각을 하지 희우의 뺨이 다시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아……. 미치겠네. 왜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냐고.”

쏴아아아아-

방음이 잘 안 되는 구조라 그런지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잘 들렸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고 곧 상의를 시원하게 탈의한 현태가 욕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희우는 갑자기 펼쳐진 살 색 향연에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게다가 그의 몸은…… 마치!

‘완벽한 몸땡이야.’

옷을 입고 있을 때도 몸이 좋다고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걸친 것 없는 맨몸을 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희우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태의 잘 벼려진 몸을 정신없이 훑었다.

이건 본능이다. 아름다운 것을 좇는 인간의 본능.

“만져봐도 됩니다.”

넋을 놓고 있던 희우는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무, 무슨 소리예요? 내가 뭘 만져요?”

“눈을 못 떼기에.”

현태의 입술이 얄밉게 휘어졌다.

“그런 거 아닙니다.”

희우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대답했다. 정신없이 나대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살을 드러내놓고 있으면 모기한테 물릴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아휴! 모기가!”

희우는 황급히 현태의 몸에서 시선을 떼곤 허공에서 손뼉을 쳤다.

짝!

물론 아무것도 없었지만 희우는 모기 사냥에 성공한 사람처럼 손바닥을 탈탈 털며 방긋 미소 지었다. 너무 세게 쳤나? 손바닥이 얼얼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 줄 몰랐군요.”

현태가 비꼬듯 말했다. 희우는 못 알아들은 척 옷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현태의 눈매가 사정없이 찡그려졌지만 딴청을 피우느라 보지 못했다.

“제가 좀 선량한 편이라.”

희우는 자신이 생각해도 형편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는지 욕실 안은 더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샤워 후 물기까지 정리를 끝내 바닥이 뽀득뽀득했다.

“와……. 이 정도면 결벽증 아닌가?”

혹시나 해서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진 건 없는지도 확인했다. 머리카락은커녕 샴푸나 바디워시 같은 것도 로고가 앞이 보이게 칼같이 정리되어 있었다.

“흐음.”

심란한 표정으로 정리된 물건들을 둘러보던 희우가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코딱지만 하게 생겼던 정도 칼같이 정리되는 깔끔함이었다.

방에 있던 현태는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저 안에서 여자가, 그것도 자신의 아내가 알몸으로 샤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몸에 열이 올랐다.

현태는 열을 식힐 겸 방 안에 있는 선풍기를 틀었다.

선풍기는 꽤 오래된 물건처럼 보였다. 작동은 되나 걱정했는데 직사각형 모양의 은색 버튼을 누르니 머리를 덜덜 떨었다.

“고장 났나?”

위이이이이잉!

걱정과 달리 선풍기는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쌩쌩하게 돌아갔다. 덜 마른 몸과 머리에 바람이 불자 순식간에 체온이 내려갔다.

하지만 자꾸만 들려오는 물소리에 몸 한쪽이 은근하게 데워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미친놈.”

의지와 상관없이 흉흉하게 서 버린 바지 앞섬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저보다 목표 의식이 뚜렷한 놈이 분명했다.

현태는 열기를 식힐 겸 선풍기의 강풍 버튼을 꾹 눌렀다.

“어?”

너무 세게 누른 탓일까? 버튼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푹 들어가 버렸고 선풍기는 곧 탈탈거리며 멈추고 말았다.

현태는 눈만 끔뻑거리며 남아 있던 운동에너지로 돌아가는 선풍기 팬을 멍하게 쳐다봤다.

다른 버튼을 눌러 봤지만 그대로였다. 되는 일이 없었다.

샤워를 끝낸 희우는 밖으로 나왔다가 여전히 상의를 벗고 있는 현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아직도 옷을 안 입고 있어요?”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현태는 모른 척했다. 작동하지 않는 선풍기는 옆으로 스윽 밀고 희우를 보자마자 더 꼿꼿해진 놈은 은근슬쩍 이불 아래 감췄다.

“옷을 입으면 잠을 못 자서.”

“그런 게 어딨어요!”

부릅뜬 눈과는 반대로 희우는 잔뜩 숨죽인 채 으르렁댔다. 성질 더러운 다람쥐 같았다.

“무슨 상관이죠? 그쪽 보고 옷을 벗으라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자신 없습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쪽이 아무리 홀딱 벗고 난리를 친다고 해도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자신이 있어요.”

“그럼 아무 상관 없겠군요.”

“그, 그렇죠.”

“그럼 불 꺼요.”

“네?”

“난 자야겠으니까 불 끄라고요.”

현태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희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달빛 때문에 방 안은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희우는 현태를 등지고 돌아누웠지만 희우의 온 신경은 현태를 향하고 있었다.

친구와도 한 이불을 덮고 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밤에 남자와 같은 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 그것도 반쯤은 알몸인 남자와 함께 말이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열기는 단지 사람이 가까이 누워 있기 때문이겠지?

희우는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꼭 감았다.

자야 해. 자야 해. 뒤에는 아무도 없다. 난 이 방에 혼자 있다.

하지만 자꾸만 조금 전에 보았던 현태의 잘 다듬어진 복근과 넓은 어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몸은 좋더라.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독고희우! 정신 차려! 이따위 미인계에 넘어가면 안 돼!

희우가 혼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현태는 노골적으로 희우 쪽으로 돌아누워서 아내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불에서는 희미한 단내가 났다. 희우에게서 나던 냄새와 비슷했다. 늘 덮던 게 아닐 텐데도 비슷한 냄새가 난다는 게 신기했다.

가느다란 목덜미, 얇은 이불 아래 드러난 잘록한 허리, 물기를 머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다디단 내음.

먹잇감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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