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못할 것도 없죠. 수연제에 방이 몇 칸이나 있는지 알아요? 놀고 있는 방을 유지하는 것도 돈이 꽤 많이 들어요. 그럴 바에 숙박업을 운영하는 게 낫죠.”
“반대하시는군요.”
희우의 말투에서 아쉬움이 묻어나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집을 훼손하는 게 싫어서 에어컨도 설치 안 한다는 분이니 숙박업체는 어림도 없겠지.
“집을 건드리면 큰일 나는 줄 아시는 분이니까요.”
“수연제를 숙박업소로 운영할 생각입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그러지도 못해요. 그냥 작은 소망이죠. 소망. 문화재청에 아는 사람 없어요? 그런 거 좀 풀어주고 그러면 안 되나?”
나라에서 손꼽히는 재벌이니 문화재청에 아는 사람 한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심가였네요.”
용돈 받고 좋아할 때부터 짐작은 했는데 이 여자, 돈에 진심이었다. 현태는 겨우 찾아낸 희우와의 공통점에 픽 웃었다. 그때였다.
“독고희우?”
굵직한 목소리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희우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 김민성?”
희우가 남자에게 빠르게 다가가며 아는 척을 했다. 두 사람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손을 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현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울 가고 나서 경주에는 얼씬도 하지 않더니, 어쩐 일이야?”
남자의 질문 끝에 묻어나는 웃음기가 몹시 거슬렸다.
“어. 일이 있어서. 게스트하우스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아서 한 번쯤 연락해 볼까 생각은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네. 넌 얼굴이 그대로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희우는 정말 반가운지 민성을 보자마자 우다다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정말? 연락하지 그랬어. 나 전화번호 안 바뀌고 그대론데.”
“그래? 난 바꿨는데.”
“그런 것 같더라.”
“전화했었어?”
희우가 놀란 눈으로 묻자 민성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응. 다른 사람이 받더라. 게스트하우스 여기서 가까운데……. 차 한잔하고 갈래?”
민성이 목욕탕 언저리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은 산책 중이라.”
화기애애한 두 사람 사이로 냉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대화를 듣고만 있던 현태의 눈매가 더 가늘어진 건 희우의 앞에선 남자의 미소 끝에 걸린 작은 떨림을 본 순간이었다.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희우에게 감정이 남아 있었다. 관심인지 미련인지 모를 감정.
현태는 제 것을 타인과 공유해 본 적이 없었다. 법적인 아내에 불과해도 저에게 속한 사람을 처음 보는 새끼가 껄떡대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현태의 서늘한 시선이 마주 선 민성에게 고정됐다.
희우는 불쑥 끼어든 현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민성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짧은 시간 동안 현태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까닭이다.
현태는 존재감을 과시하기라도 하려는 듯 희우의 옆으로 바싹 다가와 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현태의 팔 하나가 희우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희우조차 이상한 걸 못 느낄 정도였다.
“……누구…셔?”
민성이 현태와 희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짐작이 갔지만 희우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남편입니다.”
현태의 대답에 냉기가 폴폴 흘렀다.
“남편?”
민성의 눈동자가 두 배는 더 커졌다. 괴상한 이야기라도 들은 듯한 그의 표정에 현태는 언짢아졌다.
희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민성을 바라보다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남편이야.”
“결혼했어?”
민성은 정말 놀랐는지 거듭 물었다. 아까보다 한 옥타브는 높아진 민성의 목소리에 희우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창들한테까지 청첩장을 안 돌린 건 좀 심했지.
“응.”
“……언제?”
민성이 느릿하게 물었다.
“4년 전에.”
“못……들었는데?”
“갑자기 하게 됐어.”
“아…….”
다급하게 주고받던 대화가 민성의 난처한 표정과 함께 멈췄다. 현태는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다가 다시 끼어들었다.
“계속 걸을까?”
희우를 향해 한 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다정한 말투에 희우는 깜짝 놀라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는 살짝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마치 다정한 남편 코스프레라도 하려는 것처럼.
친구 앞에서 남편과 어색한 것보다는 더 나을 것 같아 희우는 현태의 장단에 맞추기로 했다.
“민성아, 다음에 또 보자. 지금은 남편이랑 산책 중이라.”
“……그래.”
민성은 여전히 희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현태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후 느릿하게 걸었다. 모처럼의 산책인데 빠르게 걸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달까지 환하게 떠서 그런가? 낯선 곳에서 하는 산책치곤 그럭저럭 괜찮았다.
걸음을 멈추고 살짝 돌아보니 민성은 아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고 어정쩡하게 인사를 해 왔지만 현태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태는 민성의 시선을 의식하며 희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민성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뒤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희우는 갑자기 허리에 감겨온 팔 때문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현태를 노려봤다.
아무리 부부 연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이 정도로 사이는 아직 아니지 않나?
희우와 달리 앞을 응시하는 현태의 시선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팔은 치우시죠.”
희우가 난처해하며 허리에 둘러 있는 현태의 팔을 슬쩍 내렸다. 저만 놀란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움켜쥔 팔뚝이 단단하고 굵직했다. 미국에서 일은 안 하고 운동만 했나?
현태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희우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팔에 힘을 풀었다.
멋대로 다정한 척 굴다가 순식간에 눈빛에서 온기를 지우는 현태를 보니 기분이 나빴다. 그의 팔이 닿았던 순간 멋대로 빠르게 뛴 심장에 한심하다, 욕해 주고 싶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저절로 말투가 퉁명스레 불거졌다.
“뭐가 말입니까.”
“허리를 감고 다닐 정도로 친하진 않잖아요.”
희기만 하던 희우의 양 볼에 붉은빛이 돌았다.
현태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힌 희우의 모습에 싫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같았다.
“뭐가 문제죠? 부부인데.”
“그건 그렇지만. 계약서에 분명 원하지 않는 스킨십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을 텐데요?”
“싫다고 했으면 안 했을 겁니다.”
“그건!”
분명 거절 의사를 밝히지 않은 건 본인이었다. 희우는 어울리지 않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현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싫어요. 이제 됐죠?”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간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기현태는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입에 담기도 싫은 그 이유가 아니라면 분명 옆에도 안 올 거라 확신했다. 그건 희우도 마찬가지였다.
희우는 눈매를 가늘게 늘이고 나란히 걷고 있는 현태를 살폈다. 그는 다시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어깨를 감싸며 다정한 척 굴던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안해할 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신경을 쓰는 건 저뿐인 것 같아 희우는 괜히 골이 났다.
“공기가 좋군요.”
현태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느른하게 한 말에 희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저기 바로 찻길인데요?”
부웅!
희우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근처에서 차가 내달리는 소리가 났다. 머쓱해진 현태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삼계탕 먹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남자, 시골에 대한 환상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말 돌리는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친구라고 했습니까?”
한참 말없이 걷던 현태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희우가 멍하게 쳐다보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아까 그 남자 말입니다.”
“아아~ 민성이요?”
“민성이.”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예요. 한 동네 사니까 더 친했죠.”
오래된 사이. 이것도 별로.
다시 연락할 건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물어보는 순간 지는 느낌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태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고 두 사람의 산책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려고 했던 건데. 현태가 따라나서면서 어쩐지 산책을 하기 전보다 몸이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이제 오니?”
희우 부부를 발견한 숙영이 다가오며 물었다.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은 불쑥 들어온 목소리에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갔다.
“네, 목욕탕 근처까지 갔다 왔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숙모의 시선이 현태에게로 옮겨왔다.
여전히 탐색하는 눈빛은 조카사위를 보는 시선이라고 보기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삼촌은 어디 가셨어요?”
“어? 응. 누구 좀 만나러. 내일 올 거야. 별일은 아니고 하는 일 때문에. 피곤하겠다. 얼른 가서 쉬어. 베개랑 이불 갖다 놨어.”
“아…….”
희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불과 베개는 저와 현태의 것 두 개를 말하는 것이리라. 따로 잔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기실 게 뻔했다. 하지만 저 좁은 방에서 현태와 둘이 잘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희우가 먼저 저는 다른 방에서 자겠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감사합니다.”
현태가 희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물쭈물하던 희우가 하려던 말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현태는 지금 주어진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쯤 되니 때맞춰 나와준 숙모님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선풍기 틀어놓고 자면 시원할 거야. 원래 그 방이 여름에도 시원하거든요.”
처음에 희우에게 한 말이었지만 나중엔 현태를 향해 끝을 맺었다. 숙모는 두 사람을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후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멀어지는 숙모를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는데 희우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합니까. 안 따라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