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뭐해요, 안 들어가고.”
건네준 옷을 들고 멀뚱멀뚱 서 있는 현태를 보며 희우가 재촉했다.
희우 방은 사랑채와는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현태는 마루를 지나 미닫이로 된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잠금장치도 없는 문은 아무 저항 없이 스르륵 열렸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옥이라 보안이 취약한 구조일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방은 지금 희우가 머물고 있는 방보다 조금 더 넓었다. 온통 낡은 가구들뿐이었지만 망가진 곳 없이 전부 반들반들 윤이 났다.
현태는 티셔츠를 갈아입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희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방에 들어오니 글로만 알던 사람을 현실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독고희우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공간이었다. 현태는 방 이곳저곳을 스윽 훑었다. 신기할 것도, 별다를 것도 없는 방이었다.
방 안에서 이질적인 색 하나가 튀었다. 협탁 위에 놓인 플라스틱 액자였다. 현란한 꽃무늬와 촌스러운 분홍색 토끼 귀가 어설프게 합쳐진 액자는 나무색 천지인 방 안에서 유난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액자 안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활짝 웃고 있었다.
현태가 입은 티셔츠가 맞았던 시절이었는지 제법 통통했다. 지금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그런지 귀여운 느낌이 더 컸다.
커다란 눈이 또랑또랑 맑은 건 변함없었다. 이때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똑똑.
책상 위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 갈아입었어요?”
“네.”
현태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렸다. 현태는 들고 있던 액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희우가 별말이 없는 걸 보니 제가 액자를 살피고 있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잠시 건너오래요. 차 한잔하자고.”
“알겠습니다.”
반팔로 갈아입고 나니 없던 여유가 생겼다.
희우는 현태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XL 사이즈 티셔츠는 현태의 몸에 딱 맞았다.
슈트 안에 가려져 있던 근육이 얇은 옷감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더니, 딱딱한 옷을 벗어서 그런지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었다.
* * *
사랑방 좌탁 위에는 수정과가 담긴 찻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계피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밥은 입맛에 맞았는지 모르겠네.”
덕수의 질문에 현태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단정하게 대답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수정과 좋아하나? 집에서 만든 거야.”
“잘 마시겠습니다.”
덕수는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손녀사위를 자세히 살폈다. 지금까지 찬찬히 살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상견례 날에는 처음 만나는 거라 정신이 없었고, 결혼식 날에는 잔치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몸은 건강하고?”
“네. 건강합니다.”
“그거 다행이구만.”
별 영양가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이 더 오갔다.
덕수는 조각처럼 잘생긴 현태를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저 정도 인물이면 여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겠다 싶었다.
혼자 미국에서 지낸 4년 동안 정말 여자가 없었을까 의심이 꼬리를 물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덕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딱딱해졌다. 딴청을 피우며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희우마저 덕수의 목소리가 변했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희우는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럴 리 없지만 혹시라도 저와 현태 사이에 오간 이야기가 할아버지 귀에 들어간 건 아닐까 걱정됐다.
긴장한 저와 달리 현태는 여전히 편안하고 느긋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여자 문제는 일으키지 말게.”
이건 뭐지?
뜬금없는 경고에 무덤덤하던 현태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독고희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따질 문제는 아니었기에 현태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없던 믿음도 생길 만큼 단호한 말투에 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음 끝까지 변치 말길 바라네.”
“네, 할아버님.”
덕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현태를 보며 저런 손주 녀석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장손 내외가 어린 희우를 남기고 죽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희우 동생이 둘, 셋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내외가 금실이 좋았으니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덕수는 문득 떠오른 큰아들 내외의 얼굴에 심장이 아렸다.
큰아들을 꼭 빼닮은 희우를 볼 때마다 아들이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늦었으니 오늘은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
덕수는 가족이 밤에 운전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희우도 할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잘 알았기에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장거리 운전으로 현태가 피곤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 할아버님.”
다행히 현태도 고분고분 답했다.
희우는 마루를 내려오자마자 신발장 안에서 예전에 신던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분홍색 컨버스였다.
“그 신발 좀 버려.”
마침 마당에 있던 숙모가 운동화를 신는 희우를 보며 한마디 했다.
“아직 멀쩡한데요, 뭘.”
“뭐가 멀쩡해. 원래 색이 하나도 없는데. 뒤축도 다 닳았어. 네가 버리지 말라고 해서 두긴 했지만 그거 볼 때마다 버리고 싶어 죽겠다, 가만 보면 아버님보다 희우 네가 더 심해.”
“조금만 더 신고요.”
숙모의 못마땅한 잔소리에도 희우는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고 마루에서 가뿐하게 일어섰다. 오래된 것일수록 몸에 잘 맞았고, 내 몸의 일부인 양 마음이 편했다.
현태는 운동화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희우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숙모님의 잔소리 때문인지 희우가 싫은 빛바랜 분홍색 운동화에 자꾸 시선이 갔다.
“어디 가는 겁니까?”
현태는 질문을 하면서도 엄마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꼬마가 된 기분이라 썩 좋지는 않았다. 타국에 몇 달, 아니, 몇 년간 있었어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산책이라도 좀 하려고요.”
대답과 동시에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몇 발자국 떨어져서 걷던 현태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가요?”
“산책 갑니다.”
같이 가자는 말은 아니었는데.
희우는 갑자기 생긴 동행자에 밤 산책길이 불편해졌다. 혼자 가겠다고 말하려다 사랑채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쳐 차마 현태를 매몰차게 떼어낼 수 없었다.
“같이 가요.”
일렬로 걷던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본 덕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우리가 결혼을 하긴 했네요.”
고샅을 빠져나와 한적한 길을 걷던 희우가 옆에서 따라 걷는 현태를 보며 말했다. 현태도 새삼스레 느끼는 감정이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에 혼자 살면서도 결혼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어요.”
“…….”
현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다. 신혼여행을 가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친구 중에는 내가 아직 결혼한 거 모르는 친구들도 많아요.”
“갑작스럽게 올린 결혼식이었으니까요.”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간 후 결혼을 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믿지 않았다.
“어쨌든 서로 원하는 게 있어서 한 결혼이잖아요.”
대답 소리 대신 자박자박 걷는 발소리만 들렸다.
희우는 현태가 제대로 듣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스러워 한 번씩 흘깃댔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듣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희우는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해 봐요.”
“최선?”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되씹는 단어에 묘하게 날이 섰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현태가 내려다보는 눈빛이 어쩐지 검고 차가워 희우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얼음장 같은 눈빛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네, 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뭐든지 열심히 해요.”
희우의 말을 듣는 현태의 입술 한쪽이 묘하게 뒤틀렸다.
미소와 비웃음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는 표정에 희우는 기분이 나빠졌다.
“나도 지는 건 할 줄 몰라서.”
희우는 얼른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현태의 목소리가 어쩐지 자신의 전신을 훑는 듯한 기이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카맣고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굶주린 육식동물 앞에 선 사냥감 된 기분이었다.
희우는 괜한 경쟁심을 건드린 게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이내 접기로 했다.
저에게 대 놓고 아이를 낳아 달라 요구하는 이 남자에게 나누어줄 마음 따위는 없었다.
한적한 길은 어느새 마을 길로 이어졌다. 이 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목욕탕이며 슈퍼 같은 상점이 줄줄이 서 있었다.
“생각보다 마을이 크군요.”
“관광객이 꽤 있어요. 수연제 주변의 한옥들은 대부분 숙박업체고요. 한 해 수입이 꽤 짭짤하더라고요.”
희우는 아쉬운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속이 빤히 보이는 희우의 말투에 현태는 피식 옅게 웃었다. 할아버지에게 돈 봉투를 받고 콧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숙박업이라도 할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