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11)화 (11/75)

11화

희우 내외를 먼저 발견한 작은 어머니 숙영이 반가운 목소리로 사랑채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숙모, 잘 계셨어요?”

희우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자 숙영이 희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토닥이는 사람도, 어깨를 내주는 사람도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숙영이 현태를 발견하곤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로 보네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뼈있는 목소리를 여유 있게 받아치며 현태는 숙모 되는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아래위로 훑어보며 바쁘게 움직이는 동공에서 반가움 외에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면 과민 반응인 걸까.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닌 듯했다. 현태는 속마음을 감춘 채 숙영을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오거라.”

사랑채 안에서 할아버지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버선발로 마중을 나오던 기우돌 회장님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들어가요.”

마당에 서서 머뭇대는 현태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끌며 희우가 말했다. 제 소매 단을 잡아끄는 희우의 길고 하얀 손가락에 묘하게 안심이 됐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대청마루에 올라서니 장지문을 위로 들어 올려 훤하게 개방된 사랑방이 드러났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삼면이 개방된 공간은 서늘할 정도로 바람이 잘 통했다.

“왔니?”

손주 사위가 온다고 반듯하게 다린 모시 한복까지 차려입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희우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유서 깊은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할아버지는 한복 입는 걸 불편해하고 싫어하셨다.

명절이 아니면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는 한복을 손녀사위 온다고, 무려 여름철에 빳빳하게 다려 입고 있다니. 어지간히 있어 보이고 싶으신 모양이다.

방으로 들어서서 멀뚱히 서 있던 현태는 희우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나서야 절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란히 서서 예의 바르게 절하는 손녀 부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덕수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찌푸린 눈매는 현태를 향해 있었다.

“손녀사위는 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구나.”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했던 현태는 정수리에 쏟아지는 못마땅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익숙지 않아서요.”

“익숙지 않은 건 배워야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자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현태는 꼬장꼬장한 얼굴로 자신을 나무라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다고요. 그리고 요새 누가 절을 해요. 명절 아니면 할 일도 없는데.”

“어디 남자들 말에 끼어들어. 그리고 지금 남편이라고 편드는 게야?”

덕수의 허연 눈썹이 꿈틀댔다.

그놈의 남자 타령.

희우는 달랑 그거 하나 달고 태어났다고 마치 다른 계급인 양 구는 할아버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참아야지. 수연제가 달렸는데.

희우는 곧 불뚝대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소곳하게 웃었다.

현태는 서울에서와 완전히 다른 희우의 태도에 눈매가 가늘어졌다. 홈그라운드에서 더 의기양양해질 줄 알았던 여자는 꼬리를 말고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한편, 덕수는 4년 만에 만나는 손녀 내외 사이가 데면데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사이가 괜찮아 보여 안심이 됐다. 그래도 손녀를 4년 동안 내팽개쳐 둔 현태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덕수는 풀어졌던 눈매를 다시 딱딱하게 굳히며 무릎을 꿇고 앉은 현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못마땅한 눈초리에 현태는 살짝 긴장했다.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조차 안 해 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단 한 순간에 이렇게 쩔쩔매게 되다니. 이상했다.

“미국에서는 지낼 만하던가?”

손녀 혼자 내버려 두고 혼자 미국에 살아보니 좋던가. 그렇게 나무라는 말로 들렸다. 현태는 짧은 판단 끝에 제법 진중하게 대답했다.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일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덕수의 미간 주름이 조금은 옅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어르신의 표정에 안심이 됐다가, 긴장이 됐다가 감정이 널을 뛰었다.

“양가 합의로 진행한 혼사였지만 도망가듯 사라진 자네가 내내 못마땅했네.”

결국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이 툭 튀어 나가고 말았다.

허우대 멀끔하고 깎아놓은 밤톨같이 잘생긴 손주 사위를 보니 없던 용심이 불뚝불뚝 솟았다. 벌써 증손주를 보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미국 나갈 일은 없고?”

“네, 당분간은 한국에서 있을 생각입니다.”

“당분간?”

“네. 만약 다시 나가게 된다면 그땐 희우하고 갈 예정입니다.”

희우는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티 내면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용 미소였다.

나중에 나가면 따져야지 했다가 그냥 해 본 말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무엇보다 현태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생경했다.

내 이름이 이런 느낌이었나? 낯설면서도 살짝 간지러웠다.

“아버님,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조금 전 희우하고 인사를 주고받던 목소리였다.

“시장할 텐데 식사부터 하지.”

덕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네모반듯한 상을 든 숙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상은 팔을 양껏 벌려서 들어야 할 정도로 크고 무거워 상을 옮기는 발걸음이 힘겨워 보였다.

희우와 현태가 벌떡 일어나 드는 걸 거들었다. 숙영은 살짝 놀란 듯 현태를 바라보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밥상을 놓고 덕수가 자리에 앉자 숙영은 다시 어딘가로 사라졌고 그 뒤를 희우가 재빠르게 따라갔다.

저도 따라가야 하나 엉거주춤 서 있는데 할아버지가 현태를 불렀다.

“뭐 하고 있어. 앉게.”

“아, 네.”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은 현태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상 위에는 딱 두 사람 몫의 음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휴게소에서 많이 먹어서 안 먹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 하는 순간 다시 방문 앞에 인기척이 들렸다. 숙모님과 희우가 또 다른 상을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현태는 아까처럼 벌떡 일어나 상을 받아 바닥에 내렸다. 마찬가지로 2인분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지만 어쩐지 음식의 양과 종류가 차이가 났다.

아, 이게 내 건가? 딱 봐도 대비되는 음식의 양과 종류에 현태는 괜히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와서 앉게. 밥 먹어야지.”

할아버지가 현태를 다시 불렀다.

“뭐해요, 가서 앉아요.”

처음 가지고 들어왔던 상을 가리키는 희우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현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남녀 따로 먹는 건가?

씨암탉이라도 잡았는지 뚝배기에선 삼계탕이 하얀 김을 모락모락 내뿜었다. 현태는 여자 둘이 앉은상을 흘깃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남자들의 삼계탕과 달리 여자들의 뚝배기에는 고기보다 국물이 더 많았다.

단순히 남녀 먹는 양의 차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현태는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오히려 희우와 숙모는 자연스럽게 앉아 수저를 들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태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저를 보며 방긋 웃는 숙영을 보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더운데 윗옷이라도 좀 벗어요. 에어컨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벽에 구멍 뚫는 걸 싫어하셔서.”

숙영의 서운한 눈빛이 덕수를 향했다. 지금이라도 에어컨을 설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집이라면 신줏단지 모시듯 벌벌 떠는 덕수에게 벽에 구멍이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선풍이 두 대가 옆에서 털털대며 돌아갔다.

“괜찮습니다.”

현태는 난감한 마음을 감추며 사람 좋게 미소를 띠고 자리를 잡았다.

덕수는 상석에 앉아 현태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수저를 들었다.

“들게.”

“잘 먹겠습니다.”

삼계탕은 서울에서 먹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맛있었다.

살도 쫄깃하고 국물도 뽀얀 게 맛이 일품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닭이라 그런지 맛있습니다.”

현태가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말했다. 어쨌든 밉보여서 좋을 게 없는 사람들이니 립서비스라도 잘해 놔야 했다.

“그거 마트에서 산 닭인데.”

하지만 냉큼 나온 숙모님의 대답에 기껏 준비한 칭찬 멘트가 민망하게 되어 버렸다.

“풉!”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희우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댔다.

여기 온 이후부터 엉덩이에 종기가 난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어쩐지 고소했다.

“아……. 맛있어서 토종닭인 줄 알았습니다.”

현태가 머쓱하게 대답하자 숙영이 입술을 길게 늘어뜨렸다.

“닭이 다 거기서 거기지. 얼른 먹어요. 식으면 맛없으니까.”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현태는 식혀서 먹고 싶었다. 뜨거운 게 들어가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더운 걸 꾹 참고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뚝딱 비워 내자 숙영이 현태를 바라보는 눈빛이 제법 부드러워졌다.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입증받는 순간이었다.

“더 줄까요?”

숙영이 벌떡 일어서며 묻자 현태가 서둘러 손을 내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더 먹었다간 입고 있는 재킷 안의 셔츠가 정말 다 젖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태가 최대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저 충분히 배부릅니다.’를 강력하게 어필하는 중이었다.

맛있으면서도 불편하고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은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났다. 현태는 소화도 시킬 겸 마당을 서성였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바쁘게만 뛰어다니던 순간이 꿈인 듯 막연하게 느껴졌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때문에 이제 덥지도 않았다.

“이거로 갈아입어요.”

현태가 마당을 거니는데 어느새 다가온 희우가 반팔 티셔츠 하나를 현태 앞으로 쑥 내밀었다. 카키색 반팔 티였다.

“XL 사이즈라 맞을 거예요.”

“누구 옷입니까?”

희우가 입을 만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 안의 어른들이 입을 만한 옷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희우의 예전 남자친구가 입던 옷은 아닐까 하는 옹졸한 생각이 스쳤다.

“내 거요.”

“이 옷이요?”

현태는 희우가 내민 옷을 받아 들고 펼쳐보았다. 반팔 티는 현태가 입어도 될 만큼 사이즈가 넉넉했다.

“예전엔 딱 맞았어요.”

현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희우는 아무리 봐도 군살이라곤 붙어 있지 않았다.

이 옷이 맞을 만큼 몸집이 있었다는 말인데.

현태는 새삼스레 제 앞에 선 희우를 훑어보았다.

“고등학생 때요. 그땐 앉아서 공부만 했던 때라 살이 쪘었거든요.”

뽀얀 얼굴이 오동통했을 걸 생각하니 예전 모습이 궁금해졌다.

“저기가 내 방이니까 들어가서 갈아입고 와요. 땀 때문에 찝찝하잖아요.”

옷이 땀에 젖었다고 말한 적 없었다. 현태는 티셔츠를 건네는 희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에어컨이 없는 곳에 갈 일이 없으니 저런 옷만 입고 다니는 거겠지.

필요를 말하기 전에 무언가를 건넨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현태는 카키색 티셔츠를 내미는 희우 얼굴 위에 겹쳐지는 동그란 얼굴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어디가 비슷하다고.

티셔츠를 움켜쥔 현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