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9)화 (9/75)

9화

“두 번 정도요.”

“사 년 동안 말입니까?”

현태로선 의외였다. 특히 막내 누나 성격으로는 희우를 매일 부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왜요? 너무 적게 만나서요? 남편도 사 년 만에 만나는데 시누이들을 누가 자주 만나요? 친언니도 아니고.”

현태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렸다.

“두 번은 왜 만났습니까?”

“처음엔 밥 한번 먹자고 해서, 두 번째도 밥 먹자고 해서?”

“밥만 먹었다는 겁니까?”

“그렇죠. 뭐 오고 가는 대화가 꽤 정답긴 했어요.”

“말해 줄 생각이 없군요.”

두루뭉술 말하는 희우를 보며 현태가 짐작해서 물었다.

“당연하죠. 입이 좀 무거운 편이라.”

물론 내 잘못 한정이지만.

희우는 저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던 시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무엇보다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풀어놓을 만큼 현태와 친하지 않았다. 내적 친밀감은 오히려 시누들이 더 높았다.

처음엔 잘 지내볼 생각도 있었다. 밥 같이 먹자는 말에 설레면서 나갔으니까.

하지만 좋은 마음으로 나간 희우에게 시누들은 저녁 식사 내내 분수를 알라는 둥, 처신을 잘하라는 둥 희한한 말만 쏟아냈다. 특히 뾰족하게 노려보던 셋째 시누이는 더더욱 더.

큰 시누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말리지도 않았었기에 세 사람이 다르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몇 마디 해 줬을 뿐이다.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미주알고주알 현태에게 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밖에서 두 번 만났을 뿐이지 집안 행사 있을 때마다 얼굴 봤어요. 예의 바르게 인사도 했고.”

“그랬군요.”

생각하면 할수록 당돌한 여자였다. 보통내기는 아니겠다 짐작은 했지만 이건 보통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누나들이 밀리겠는데?

기현태가 처음으로 적 앞에서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 * *

잠시 누워 있는다는 게 잠이 들고 말았다.

똑똑.

현태는 노크 소리에 눈을 부릅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습관적으로 시간부터 확인했다.

4시.

그사이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똑똑.

“기현태 씨. 출발해야 해요.”

희우의 목소리였다.

현태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태의 예상대로 갈 준비를 마친 희우가 크게 놀라며 현태를 쳐다보고 있었다.

“잤어요?”

“잠깐.”

“천천히 준비해요. 급할 건 없으니까.”

현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준비 안 하고 뭐 하냐고 재촉하는 것보단 훨씬 나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후 외출 준비를 다 하고 거실로 나온 현태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 웃고 있는 희우를 발견했다.

“푸핫! 저대로 물에 빠지면 어떡해.”

텔레비전 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수영장에 풍덩 풍덩 빠졌다. 물에 빠진 사람은 괴로워하는데 보고 있는 사람들은 웃겨 죽겠다고 허리를 잡았다.

가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텔레비전 취향까지 다르다니.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는 영상에 시간을 할애하는 건 인생 낭비라고 생각했다.

현태가 눈매를 짜증스레 구겼다.

“시간 없습니다. 빨리 출발하죠.”

희우는 들리지 않는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독고희우 씨.”

현태가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키웠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희우를 본 현태는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갔다. 희우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는 겁니까?”

여자의 눈물에 약해지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울린 것도 아닌데 왜 깜짝 놀라는지.

하지만 이어진 희우의 말에 현태는 다시 한번 그녀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으리란 걸 실감했다.

“너무 웃겨서요. 눈물이 아……. 너무 웃기다 정말.”

그사이 한 명이 더 수영장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희우는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손등으로 눈을 훔치고 있는 걸 보니 또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다.

한심하군.

희우를 바라보는 현태의 눈빛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 * *

장거리 운전이라 다른 사람이 운전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북동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운전대를 잡은 건 기현태였다.

희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부자들은 대부분 운전하는 분 따로 고용하지 않나요?”

“남이 내 물건 만지는 거 싫어합니다.”

어쩌면 말도 저렇게 밉살스럽게 할까.

희우는 억지로 눈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상한 표정이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현태를 외계인 보듯 할 게 뻔했다.

“아……. 그렇군요.”

희우의 시선이 현태가 쥐고 있는 핸들에서 한동안 떠날 줄 몰랐다. 저걸 덥석 움켜쥐면 기현태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두 사람을 태운 승용차가 서울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조수석에 앉은 희우의 고개가 옆으로 푹푹 꺾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희우는 전혀 졸지 않은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들고 밖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피곤하면 자도 됩니다.”

보다 못한 현태가 말하자 희우가 고개를 황급히 흔들었다.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졸면 안 되죠. 그리고 존 거 아니에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요.”

분명히 고개가 꺾어지는 걸 봤는데.

희우의 말은 신빙성이 전혀 없었지만 현태는 알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희우의 고개는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급격하게 꺾어지다 급하게 고개를 들고

“와! 하늘이 진짜 파랗네요. 그죠?”

멀쩡한 목소리로 쾌활하게 말했다. 자기 딴엔 절대 졸지 않은 척하느라 일부러 목소리도 크게 낸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게 더 어색했다.

그냥 자면 될걸.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어? 휴게소 들러요?”

휴게소에 들르기 위해 옆 차선으로 빠지자 희우가 눈을 크기 뜨며 좋아했다.

“기름 넣어야 해서요.”

현태는 질문에 일일이 답하는 게 몹시 귀찮았다. 하지만 티 낼 순 없었다.

“그렇죠! 오래 운전하면 더 피곤하니까 바람 좀 쐬어 주는 게 좋아요.”

휴게소가 반가운지 희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주차하자마자 희우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쭉 켰다.

머리 위로 팔이 쭉 올라가자 희우의 늘씬한 몸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팔을 올리느라 무릎까지 내려왔던 치마가 허벅지까지 껑충 올라갔다.

곧고 하얀 다리가 치마 밑으로 드러나자 현태의 눈이 저도 모르게 늘씬한 다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화장실에 갔다 올게요.”

희우가 운전석에서 내린 현태를 보며 말했다. 현태도 화장실에 들를 생각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나란히 걸었다.

6월이라 그런지 날씨가 제법 더웠다.

이런 날씨에도 슈트를 입다니.

“덥지 않아요?”

나란히 걷던 희우가 현태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늘 입는 거라.”

“으음.”

희우의 눈이 현태가 입고 있는 슈트를 주욱 훑었다. 그레이 계열의 슈트는 현태의 몸에 맞춘 듯 딱 맞았다. 갈색 구두와 묘하게 잘 어울려서 슈트 전문 모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희우만은 아니었는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갈수록 현태를 향해 시선들이 모였다.

어쩐지 나란히 걷기가 부담스러워져 희우는 현태에게서 떨어져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희우는 금세 현태보다 저만큼 앞서 걸었다.

현태는 앞서 걷는 희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성격 급한 할아버지가 아버지나 누나들보다 한참 앞서서 걸어가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핏줄이 아닌데도 보면 볼수록 희우와 기우돌 회장님은 판박이였다.

볼일을 끝내고 운전석에 앉아 있은 지 십 분이 지났지만 희우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못 찾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깜빡이까지 켜고 기다렸지만 오 분이 더 지나도 희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화장실에서 기절이라도 한 건 아닌가 슬슬 걱정됐다.

차에서 내려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양손에 비닐봉지 하나씩을 든 희우가 나타났다.

현태는 저도 모르게 눈매를 와락 구겼다. 봉지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음식 먹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현태는 제발 희우가 밖에서 다 먹고 차에 타길 바랐다.

딸깍!

하지만 현태의 바람은 자동차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휴게소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알감자 좋아해요?”

차에 타자마자 희우가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종이 그릇을 꺼내며 물었다. 현태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태는 천천히 차창을 내렸다. 차 안에 음식 냄새가 배는 것도, 음식물이 묻은 쓰레기가 남아 있는 것도 싫었다.

“그런 거, 안 좋아합니다.”

현태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심히 말하자, 희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른 봉지 안에서 핫바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매운맛 문어 핫바하고 안 매운맛 문어 핫바 둘 중에 뭐 드실래요?”

“전, 됐습니다.”

잘 보여야 할 이유만 없었어도 당장 차에서 내려서 다 먹은 후에 타라고 했을 것이다. 현태는 인내심의 한계를 실시간으로 느끼며 열려 있는 차창 밖의 공기를 들이마시려 애썼다.

차 안에 냄새나는 음식을 가지고 오다니. 비린 냄새가 차에 배이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쪼잔하게 굴고 싶진 않았지만 후각이 예민한 현태에겐 민감한 문제였다.

“핫바도 싫어하는구나. 그래도 뭐 좀 먹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경주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잠시…….”

희우는 내려서 간단히 요기라도 하고 갈래요? 라고 물으려고 했다. 적어도 현태가 잡아먹을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차에서…….”

“네?”

“음식을 꼭 차 안에서 먹어야 합니까?”

그제야 현태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눈치챈 희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희우는 꺼냈던 핫바를 봉지에 빠르게 쑤셔 넣었다.

“아……. 미안해요. 그쪽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당장에라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지만 희우는 말을 더듬지도, 목소리가 작아지지도 않았다. 그저 현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의 실수를 미안해할 뿐이었다.

차분한 희우의 대처가 오히려 현태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묘하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여자였다.

거슬려.

봉지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으며 현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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