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7)화 (7/75)

7화

“크리스탈, 정말 한쿡으로 가?”

제롬이 어색한 한국어 발음으로 물으며 다가왔다. 수정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아쉬움이 역력했다. 부모님 모두 한국 사람이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한국에 가 본 적 없는 제롬의 한국어 발음은 어눌했다.

“응, 내일 출발하려고”

“왜? 여기 일 마음에 좋잖아.”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끝까지 또박또박 말하는 제롬을 보며 수정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한때 미식축구 선수였던 제롬은 키도 덩치도 어마어마했지만 소년 같은 면이 있었다. 지금처럼 애원할 게 있거나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땐 더했다.

“좋아. 그런데 더 좋은 게 있어.”

제롬은 수정이 좋아하는 사람이 현태라는 걸 알았다. 말리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포기할 수정이 아니었기에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제롬이 보기에 현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안 좋아지면 다시 와.”

“응, 고마워. 그래도 나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려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제롬은 앉아 있었지만 둘의 높이는 비슷했기에, 수정은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제롬의 정수리를 쓰윽 쓰윽 쓰다듬었다.

* * *

“여긴 언제 와도 한결같네요.”

학교 정문 문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높은 대문을 통과하며 희우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좀 크죠.”

“좀 크다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크죠.”

현태와 희우를 태운 세단은 자동으로 열리는 대문을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택시 타고 왔다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택시는 이 집 대문을 통과하지 못했고, 대문에서 본가 건물까지는 걸음이 빠른 희우도 10분 넘게 걸어가야 했다.

본가 건물로 이어지는 길가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희우가 갑자기 차창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수국이 피었네요. 아……. 벌써 6월이구나.”

차창 밖을 바라보는 희우의 말투가 꿈속처럼 몽롱했다.

“수국, 좋아합니까?”

가만있기도 뭣해서 현태는 예의상 물었다. 그래서 말투가 심드렁했다. 현태로선 최선을 다한 친절이었다.

“네, 제일 좋아해요. 그런데 작년엔 없었는데? 헉! 설마?”

느릿하게 생각을 더듬던 희우의 말이 갑자기 빨라지고 높아졌다.

“무슨 일이죠?”

시시때때로 목소리 톤이 바뀌는 여자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현태가 물었다. 이번엔 정말 궁금했다.

“할아버님이 작년에 저한테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하냐고 물으셨거든요.”

“수국이라고 했겠군요.”

“네. 설마……. 그것 때문은 아니겠죠?”

현태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수국들을 곁눈질로 훑었다. 바닥에 뭉텅뭉텅 자리 잡은 수국이 길 양쪽에서 온통 푸르고 분홍인 꽃 더미를 선물처럼 들이밀고 있었다.

날 좀 봐! 오직 널 위해 피었어! 라고 소리치며 말이다.

대단한 양반이었다.

독고운 선생에 대한 팬심을 이렇게 표현하시다니.

요즘 말로 하면 성공한 덕후가 바로 기우돌 회장님이 아닐까 했다.

독고운 선생의 저서 대부분을 모으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분의 자손까지 며느리로 들이셨으니. 독고희우는 기우돌 회장의 마지막 컬렉션을 장식할 치트키와 다름없다. 물론 그 마지막 장식품은 독고희우가 낳은 자신의 아이일 테고.

욕망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기우돌 회장을 떠올리며 현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많은 사람이 저더러 조부와 판박이라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현태는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마음을 쏟아부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애완동물도 키운 적 없었다. 할아버지는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한 양반이 아니었다.

“세상에…….”

희우는 천천히 움직이는 차 안에서 차창에 코를 박고 하염없이 밖을 보며 감탄사를 뱉었다. 감동받은 것 같아 소감을 물으려던 찰나 희우의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질문하기도 전이었다.

“하아……. 부담스러워라.”

허!

누구는 할아버지 눈에 들지 못해 안달인데,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해도 부담스럽다니. 막내 누나가 들으면 약이 올라서 방방 뛰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그러고도 남지 않았을까?

대문에서부터 본가까지 주욱 이어진 수국을 보며 오다 보니 어느덧 본가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현태와 희우가 현관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희우 왔니?”

두 사람을 버선발로 맞이한 건 아버지도, 누나들도 아닌 할아버지였다. 게다가 4년 만에 만나는 손주 이름도 아니고 희우를 먼저 불렀다. 현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안녕하셨어요? 잘 지내셨죠?”

희우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살짝 안기며 인사했다.

지금 뭘 본 거지?

현태는 할아버지와 희우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현태는 얼빠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현태의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인 포커페이스는 할아버지가 희우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미 실패했다.

할아버지 뒤로 서 있는 누나들의 표정도 가관이었다.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셋째 누나인 현아는 썩은 과일이라도 씹은 것처럼 눈매를 구긴 채 가자미처럼 눈을 흘겼다.

‘골치 아프겠네.’

평소에도 누나들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긴, 불청객처럼 나타난 이복동생이 좋을 순 없겠지. 게다가 남동생이라면 더더욱.

희우를 바라보는 누나들의 날 선 시선에 현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신경 써줄 여유는 없었기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성가신 건 딱 질색이었다.

할아버지까지 현태 와이프에게 저렇게 구니, 현아로선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기 회장이 현태에게 아는 척 인사한 건 한참 후였다. 그것도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끌, 차며 건넨 말이었다.

“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기어들어 와?”

손주의 덤덤한 대답에 기 회장이 혀를 끌끌 차더니 말을 이었다.

“누가 너더러 4년이나 미국에 있으라던? 그깟 빌딩 얼마나 한다고! 그사이 우리 희우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긴 알아?”

역시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저가 뭘 했는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보고를 안 한다고 해서 모를 사람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4년 동안 쌓아 올린 일을 숨 한 번에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 기우돌 회장님이었다.

하지만 정작 현태를 놀라게 한 말은 따로 있었다.

우리 희우?

기 회장님 입에서 ‘우리’라는 호칭을 받아 본 사람이 이 중에 있을까?

현태와 누나들은 물론이고 기 씨 집안 어떤 손주들에게도 할아버지는 ‘우리’라고 붙여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희우라니!

아니나 다를까 뒤쪽에 멀뚱하게 서 있던 누나들의 눈매가 와락 구겨졌다. 막내 누나는 이미 고개를 돌린 채였다. 꼴도 보기 싫다는 거겠지.

맹랑한 이 여자라면 누나들의 냉랭한 눈빛을 벌써 읽어도 읽었겠지.

하지만 세 여자의 날 선 눈빛에도 독고희우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어서 들어가자. 희우 다리 아플라. 아침은 먹고 왔니? 휴일인데 늦잠이라도 자지 그랬니? 내가 너무 이른 시간에 부른 건 아니지?”

“아니에요, 잠 많이 자고 왔어요.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희우는 기 회장에게 대답하곤 제 앞에 전봇대처럼 서 있는 누나들을 보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물론 현태에게 뻣뻣하게 굴던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희우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던 기 회장이 우두커니 서 있는 손녀들을 나무랐다.

“늬들은 인사 안 하냐?”

“안녕?”

“왔어?”

“오랜만이네.”

마지못해 건네는 인사였다.

누나들을 대하는 희우의 태도는 할아버지를 대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딘가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누나들이 불편하다는 거겠지.

‘저렇게 겉과 속이 같아서야.’

희우는 속마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드러내는 사람은 현태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성숙하지 못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경멸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해 볼 만한 숙제를 앞둔 느낌이랄까.

적어도 마음이 있으면 속이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현태는 느긋한 마음으로 집 안을 둘러봤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현태의 모습에 큰누나인 현숙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한국에 안 계셔.”

새삼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말투였다.

“누가 궁금해한다고.”

현태는 아버지와 대화를 제대로 나눈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묻는 말에 네, 아니요, 식의 단답형 대답이 전부였다.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는 현숙도 딱히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집 안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체육관만큼이나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맛있는 냄새라니.

희우는 음식들을 보기도 전에 군침부터 꿀꺽 넘어갔다.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지도 않고 허둥지둥 왔더니 허기가 더 심했다.

희우는 시누이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시 할아버지의 맹목적인 손주 며느리 사랑에서 비롯된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를 좀 그만 예뻐해 주세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희우는 주어진 기회를 착실하고 알뜰하게 써먹기로 했다. 착한 올케 노릇은 내려놓고 예쁜 손주 며느리에 올인하기로 말이다.

다이닝룸으로 가니 예상대로 10인용 식탁 위에 상다리가 휘어질 듯 음식이 가득했다. 모두 희우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양고기……. 그야말로 고기 파티였다.

조리법도 다양해서 조림, 구이, 훈제 등등. 희우는 상의 끝부터 끝까지 살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제의 숙취 따위 고기를 때려 넣으면 그만이었다.

숙취에는 고기가 제일이지.

어제 거하게 쌈 싸 먹은 삼겹살, 목살, 양념갈비는 이미 뇌리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고기는 진리니까.

희우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얌전하게 내리려 애쓰며 다소곳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우돌 회장의 옆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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