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희우의 대답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남아 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미소가 사라진 독고희우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표정 없는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현태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랑받아야겠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 사이에 있던 감정도 사랑보다는 의무감에 가까웠다. 그래서 현태도 부부란 딱 그 정도의 감정만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쓸모없는 감정으로 삶을 낭비하고 서로를 갉아먹는 짓 따위 절대 하지 않겠다고 평생을 다짐해 왔다.
그런데 대놓고 저와의 사랑을 거부하는 여자를 보니 괜스레 치기가 솟았다. 거부는 항상 현태의 몫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하고 유치한 감정에 현태는 자존심이 상했다.
“어째서입니까.”
가까스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어진 현태의 질문은 불난 데 기름을 붓는 줄 모르는 희우의 도발로 이어졌다.
“그쪽 별로라서요.”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지만 괜찮다. 개인의 취향 정도는 인정해 줄 수 있었고, 현태는 희우의 취향을 얼마든지 바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심술이 꼼지락댔다.
“별로인 사람을 선택한 건 독고희우 씨입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도 독고희우 씨 몫이죠. 아, 물론 책임감이라는 게 있다면 말입니다.”
현태가 책임감 운운했던 희우의 말을 교묘하게 맞받아쳤다. 상대방을 얕잡아 보는 특유의 거만한 눈빛은 희우의 성질을 돋우기 충분했다.
나름 강타를 날렸다 여겼던 희우는 오히려 밀리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여유가 넘치는 현태의 모습에 왠지 부아가 치밀었다. 싸울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혼자서 멱살 잡고 흔든 기분이었다.
침착해.
희우는 스스로에게 차갑게 명령하며 맞은편의 남자를 노려봤다. 목소리를 깔자.
“어쩌라는 거죠?”
희우가 눈을 부릅뜨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희우는 눈이 컸다. 그래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백이면 백 모두 시선을 피하곤 했다. 이 방법은 학생들 앞에서도 꽤 잘 먹혔다.
어때, 시선 피하고 싶지?
하지만 어쩐지 씨알도 안 먹혔다.
이 남자는 제 부리부리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낸 건 물론이고 희우 못지않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희우의 눈빛이 열기로 가득하다면 현태의 눈빛은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희우였다.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현태의 말이 모두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쪽 말이 맞네요,’ 하고 순순히 인정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이 안 가는 걸 어쩌라고.
결혼식 후 계속 같이 살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예의상 보냈던 메일에 답장이라도 보내줬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희우에게 현태는 남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무턱대고 잠부터 잘 순 없지 않은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고개를 돌린 채 눈매만 찌푸리고 있는 희우를 본 현태가 조금 전보다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최선을 다해 노력, 할 생각입니다.”
현태의 입에서 나온 ‘노력’이라는 단어에 어쩐지 희우의 동그란 이마가 꿈틀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면 없던 감정도 생기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노력을 하겠다고? 4년 동안 아무 소식 없다가?
헛소리.
“뭐…… 응원합니다.”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응원합니다, 라니…… 싫다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것보다 은근히 더 기분 나빴다.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뜻인가?
현태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희우의 말이 이어졌다.
“정정당당한 플레이 부탁합니다. 비열한 짓은 질색이라서요.”
마치 부동산 계약을 하듯 사무적인 말투에 이번엔 현태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이상하고 낯선 기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를 들어?”
“술을 먹여서 어찌한다든가, 가족을 앞세워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든가 하는?”
도대체 절 뭐로 보고 저딴 말을 내뱉는 건지, 현태는 기분이 나빴지만 이해하려 애썼다. 희우의 입장에서 본다면 못 할 말도 아니었기에.
“그런 짓은 내키지도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하지만 희우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무조건 희우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좋아요. 저도 조건이 있어요.”
희우가 현태를 빤히 응시했다. 이제 협상 테이블은 차려졌다.
세 시간 후.
서로를 만족시키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우는 다소 지친 기색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A4용지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마주 앉은 남자를 쳐다봤다.
어깨가 축 처지고 허리가 구부정해진 저와 달리 현태는 흐트러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반듯한 자세였다. 그것도 무려 세 시간 내내. 로봇이야, 뭐야?
<계약서>
-기현태, 독고희우 두 사람은 이 결혼의 법적 효력이 끝나는 날까지 아래 사항을 반드시 지킨다.
1. 법적 배우자 외 다른 이성과의 육체적 관계는 금한다.
2.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말투, 행동 등)를 지킨다.
3. 배우자 집안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석한다.
4. 배우자에게 거짓을 말했을 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상대방의 요구에 무조건 응한다.
5. 서로의 직업에 대해 관여하지 않으며 집안일은 최대한 공평하게 배분한다.
6. 배우자의 수입이나 지출에 관해 일절 참견하지 않으며 생활비는 공동으로 부담한다.
7.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스킨십은 금한다. 단, 거부 의사는 즉시, 분명하게 밝혀 불미스러운 상황을 초래하지 않도록 한다.
8. 한 달 중 최소 50시간은 함께 지낸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키지 못할 시 채우지 못한 시간은 다음 달로 이월한다.) 데이트 장소나 내용은 두 사람이 한 번씩 장소를 정하며 상대방은 이에 반드시 따른다.
9. 위 조항 중 하나라도 어길 시 한 건당 1,000,000원(금일 백만 원정)을 상대방에게 지불한다. 단, 계약자 간의 동의하에 물질 대신 다른 요구사항 제시가 가능하다.
10. 타인에게 본 계약에 관해 발설할 시 일어나는 피해는 발설한 사람이 보상한다.
희우는 혀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글을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표정을 보니 지금 자신의 입 모양이 얼마나 희한한지 본인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현태는 집중하는 모습조차 경박하기 그지없는 희우의 모습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정갈한 글씨체였다.
손 글씨가 어색한 현태 대신 희우가 작성한 종이엔 바탕체 같은 글씨가 빼곡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노트북에는 저장하지 않기로 했다.
“집안일은 사람을 쓰면 되고, 생활비는 독고희우 씨에게 부담시킬 생각 없습니다.”
“제가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기현태 씨가 제가 먹고 마시는 걸 부담할 필요 없어요.”
희우가 검지 손가락으로 짧게 가로획을 그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했다.
‘그깟 푼돈.’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고 올랐다.
하지만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를 바라보고 있는 희우를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이 말을 희우가 싫어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장단을 맞춰 줘야지. 일단은.
현태는 희우만큼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를 들고 살폈다.
“공증은 내가 받도록 하죠.”
이렇게 비밀스러운 계약에 공증을 받을 필요가 있나 잠시 생각했던 희우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생각보다 큰 것이 걸린 계약이었다.
희우에겐 수연제가, 현태에겐 한울 전자가, 먼저 계약을 깬 당사자에게는 위약금이.
나만 실수 안 하면 돼.
희우가 A4용지에 적어 놓은 글들을 자세히 살피며 다짐했다.
“그럼 사인할까요?”
희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태가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서명란에 사인했다.
예리하고 각진 글씨체였다. 성격만큼이나 지랄 맞은 필체라고 희우는 생각했다.
희우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데 썼던 당근 모양 볼펜으로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휘갈겼다. 있어 보이려고 힘을 줬더니 본래보다 삐죽한 사인이 완성됐다.
지이이잉.
어디선가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희우가 제 것인 줄 알고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는데 마주 앉아 있던 현태가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생긴 것만큼이나 훌륭한 목소리였다. 이런 자리에서만 만나지 않았어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딱 거기까지가 좋았을 텐데.
묘하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희우는 현태의 손짓에 그대로 멈춰 섰다.
현태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럴게요.”
뭔가 중요한 이야기 같은데.
희우는 자신을 불러 세운 이유가 궁금했다. 다행히 통화는 길지 않았다.
“지금 성북동에 가야 합니다.”
시댁이 있는 곳이었다.
“정말요? 갑자기 왜요?”
희우가 반색하며 물었다.
왜 좋아하는 것 같지?
현태는 희우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살짝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4년 만의 귀국이라.”
“그렇구나!”
시댁 가는 걸 좋아하는 며느리가 있나? 이상하고 예측 불가능한 아내는 지금 신이 난 모습이었다.
현태는 혹시 희우가 잘못 이해한 건 아닌가 살짝 염려됐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12시까지 가야 합니다.”
말투는 정중한데 이상하게 명령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재수 없는 말투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12시요?”
지금 시간은 10시.
“그걸 지금 이야기하면 어떡해요!”
현태는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고 답하려 했으나 희우는 대답도 듣지 않고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쾅 소리 나게 문이 닫힌 후 드라이기 소리가 났다.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철없는 여고생 같아 현태는 헛웃음이 났다. 생각했던 것만큼 순조로운 출발은 아니지만 어쨌든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1년.
시작을 끊었으니 이제 이 시간을 요리하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샴푸 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텅 빈 소파를 보는 현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1단계. 여자의 호감을 얻어 낼 것.
지각해 버린 첫 단추를 끼워야 할 시간이었다.
진심을 감추는 것, 좋은 척, 친절한 척하는 건 자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