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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2)화 (2/75)

2화

이곳에서 절대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1초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9시 뉴스에서나 봤을 법한 끔찍한 일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 차려! 스스로를 다그친 희우가 우산을 소리가 난 쪽으로 힘껏 휘둘렀다.

탁!

하지만 우산은 침입자의 커다란 손에 속절없이 잡히고 말았다.

엄청난 속도로 우산을 휘둘렀지만 상대방은 아무 타격도 없어 보였다. 희우는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나 죽는 거 아니야?

희우는 준비했던 대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도둑이야! 야! 이! 개새끼야, 저리 가아아악! 나 태권도 검은 띠야아아악!”

물론 거짓말이었다. 여자는 자고로 조신하게 살림이나 배우 된다던 망할 집안 분위기 때문에 태권도 학원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희우는 우산을 놓고 재빠르게 몸을 비틀어 전력을 다해 상대방의 복부로 발차기를 날렸다.

퍽!

하지만 이번엔 다른 손에 잡히고 말았다. 큰 손아귀에 잡힌 발목만 얼얼했다.

망했다.

희우는 남자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내일 아침 시신으로 발견될 자신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십 분 후.

희우는 출동한 경찰관 두 명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조금 전 패기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니까, 아는 분이라는 거죠?”

희우는 차마 경찰의 표정을 살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이대로 소멸하고 싶었지만 삼겹살 삼 인분과 물냉까지 먹은 몸뚱이는 경찰 앞에서 존재감을 묵직하게 과시했다.

눈을 질끈 감은 희우의 고개가 아까보다 더 숙어졌다. 아까는 둔각, 지금은 직각. 경찰관의 질문을 한 번만 더 들으면 다리와 허리의 각도는 예각이 될 게 분명했다.

“네…….”

모기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사 년 만에 만나는 거라 못 알아보고, 도둑인 줄 알았다고요?”

예각으로 가야 하나. 희우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쉼표가 중간중간 끼어 있는 경찰관의 목소리가 피로하고 까칠했다.

“네. 죄송합니다.”

희우가 거듭 사과했지만, 경찰관은 눈매를 살짝 찌푸린 채 소파에 앉은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경찰에게는 눈길도 한 번 주지 않고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죄인처럼 절절매는 여자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배우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외모가 수려했다. 잘생겼다는 흔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에 자꾸 시선이 갔다.

어디서 봤는데, 누구더라? 수배 명단에 있었나?

평범하지 않은 인상에 직업병이 도졌지만 왠지 그런 방향은 아닐 것 같았다.

진짜 연예인인가?

잘생긴 것과는 별개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분위기를 풍긴다.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경찰의 눈매가 호기심과 의심을 담고 일순 가늘어졌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희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남자를 향한 경찰의 시선은 희우로 인해 완벽하게 차단됐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가 경솔했어요. 술도 한잔하고 해서…….”

“아…….”

젊은 경찰이 코를 킁킁대다 눈매를 와락 구겼다. 함께 있는 사람까지 알딸딸하게 만들 만큼 진한 알코올의 향기가 여자의 것임을 깨달은 탓이다.

“술을 많이 드셨구나.”

젊은 경찰과 함께 왔던 사십 대 초반의 경찰이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이 작아서 살짝만 웃었는데도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됐다.

억지로 웃느라 입술 끝이 떨리는 경찰관을 보니 희우는 죄책감이 깊어졌다.

그냥 척추를 접자.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별일 아니라 다행입니다. 선생님, 술은 좀 줄이시는 게 좋겠어요.”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희우는 화들짝 놀랐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직업을 알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네네, 자중하겠습니다.”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선배 경찰과 달리 젊은 경찰은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또박또박하던 그의 말투가 갈수록 작아지고 흐려지다 속삭이듯 끝났다. 희우가 겁을 먹고 신고를 취소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듯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공기를 얼려 버릴 것 같은 남자를 보니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희우는 최대한 쾌활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경찰관을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미련이 남는지 경찰은 두어 번 더 뒤를 돌아본 후에야 문밖으로 사라졌다.

희우는 경찰이 돌아간 후에도 한참이나 현관에 그대로 서 있다가 거실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온몸에 힘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환영 인사치곤 요란하군요.”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건조하고 단정한 시선이 희우의 맥 빠진 시선과 부딪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지수가 팍팍 솟는 날 선 눈빛에 희우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기현태. 그는 희우의 남편이었다.

그것도 결혼식 이후 4년 동안 코빼기도 보지 못한 남편.

희우는 남보다 더 어색한 그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여긴 내 집입니다만.”

“그렇지만 지난 4년 동안 제가 살았는데요.”

“독고희우 씨가 내 아내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부하 직원을 대하는 듯한 현태의 태도에 희우는 반발심이 불쑥 솟았지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70평이 넘는 이 빌라는 그의 소유였고 희우는 기현태의 법적 아내였다.

희우는 잠시 망설이다 가장 무난한 말을 골랐다. 솔직히 다른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주무세요.”

다른 말을 기대했는지 기현태가 눈매를 살짝 찡그리는 게 보였다.

희우는 그의 눈치를 슬쩍 살핀 후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현태의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씨, 망했다.

희우는 70평이 넘는 빌라에서 가장 작은 방을 사용했다.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안방을 사용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느낌이 싫었다. 그래서인지 사용하는 곳도 정해져 있었다.

침실로 쓰고 있는 작은 방 한 칸과 손님용 욕실, 그리고 부엌.

그 외에는 청소할 때를 제외하곤 들어갈 일이 없었다. 안방에 놓인 결혼식 사진도 낯설고 어색했다.

마치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그 사진을 닦을 때도 설거지하듯 무심해졌다.

“갑자기 왜 왔지?”

쓰고 있는 방은 작고 소박했지만 사용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경주 본가랑 비슷한 크기라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희우가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너무 놀라 씻는 것도 잊어버렸다.

2차까지 달렸지만 놀란 탓인지 취기가 싹 달아났다.

“왜지?”

불안한 시선으로 천정을 응시하던 희우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쌉쌀한 매니큐어 맛이 느껴졌다. 손톱 씹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발랐던 건데 지금은 소용이 없었다.

기현태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미국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잘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차였나?”

살벌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다니. 아니, 차였다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오나? 좀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야지!

희우는 당장 내일부터 불편해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명치가 턱턱 막혔다.

“앗! 손톱!”

그제야 엉망이 된 손톱을 발견한 희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돈 들여 한 네일은 아니었지만 다시 바르는 건 꽤 귀찮은 일이었다.

에이, 몰라. 될 대로 되라지.

답이 안 나오는 문제로 끙끙대는 건 희우의 취향이 아니었다.

* * *

사 년 전.

잘난 집안의 도움 없이도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큰소리치고 싶었다. 여자라고 등한시하던 할아버지나 작은아버지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발령받고 첫 월급 타자마자 큰소리 탕탕 치려고 내려갔는데 오히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결혼요? 누구랑요?”

벌레 삼십 마리를 씹어 먹은 듯한 손녀의 표정에 덕수는 한숨을 푹 쉬며 걸걸한 목소릴 말했다.

“누구긴, 기현태지.”

말투를 들어보니 이름이라도 알려준 걸 감사하라는 얼굴이었다.

희우는 이제 벌레 사십 마리를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게 누군데요.”

“네 남편 될 사람이다.”

“왜 그 사람이 제 남편이 되지요, 할아버지?”

지질하고 소름 끼치는 연애를 끝으로 남자라면 치가 떨렸지만, 그렇다고 조선 시대처럼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잘난 척하려고 준비했던 수많은 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험한 소리를 퍼붓고 싶어 입술을 움찔대던 희우의 머릿속으로 끔찍한 생각이 번쩍 스쳤다.

“삼촌. 혹시…… 할아버지 치매세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이상한 말을 할 리 없었다. 희우의 눈망울이 급격하게 촉촉해졌다. 미운 정이 독보적으로 많은 분이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삼촌은 특유의 뻘쭘한 얼굴로 눈치만 살피며 대답을 피했다. 어쩐지 몇 달 사이에 얼굴이 홀쭉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삼촌의 안색을 걱정해 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니야, 그런 거…….”

얼굴 뼈가 각지고 뼈대가 굵은 희우의 아빠와 달리 외할머니를 닮은 삼촌은 얼굴선이 가늘었다. 뾰족한 턱을 돌리며 제 시선을 피하는 삼촌의 모습에 희우는 짐작이 맞다고 확신했다.

역시, 그랬군.

희우는 똥 씹은 표정을 싸악 거두고 할아버지의 두툼한 손을 꽈악 붙들었다. 표정만 본다면 심청이 저리가라였다.

“할아버지, 요즘은 약도 잘 나오고, 초기에 치료하면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고…….”

“이 집. 네 앞으로 해 주마.”

“네?”

덕수의 말에 곁에 앉았던 삼촌의 한숨 소리가 깊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희우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이…… 집이요?”

끄덕.

대답 대신 할아버지의 고개가 묵직하게 끄덕여졌다. 말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었다.

희우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 집? ‘수연제’를 준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딸인 나에게? 할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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