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1)화 (1/75)

1화

커다란 통창 밖으로 뉴욕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몇 주 전부터 예약해야만 겨우 입장이 가능한 이 바는 유명인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모델 지망생들로 구성된 웨이트리스들이 입구에서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바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창가, VIP석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새카만 머리의 동양인 남자였다.

비율 좋은 몸에 걸친 고급 슈트와 구김 없는 셔츠, 단정한 이마 아래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날카로운 콧날은 기민한 눈빛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웨이트리스의 안내를 받아 그에게 다가가던 수정이 걸음을 멈췄다. 미술작품 감상하듯 그를 바라보는 수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항상 그랬지만 그의 일행이라는 사실이 오늘만큼 흡족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점점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모여들었다. 이곳의 진정한 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수정이 현태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물었다.

동시에 현태에게 고정되어 있던 몇몇 여자들의 시선이 아쉬움을 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부러움이 담긴 여자들의 시선을 즐기는 건 수정의 특별한 유흥이기도 했다.

수정은 신경 써서 차려입은 드레스가 몸에 딱 맞는 사이즈라서 살짝 불편했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계약을 끝냈어.”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현태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정이 맞은편에 앉았음에도 창밖에 고정된 현태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그를 독점할 수 있었기에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게 중요했다.

“무슨 계약?”

수정은 설레는 마음을 덤덤한 목소리 아래 감췄다.

현태는 대답 대신 매력적인 입술을 살짝 뒤틀었다. 찰나의 미소에 수정의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컹댔다.

10년 넘게 친구로 지냈지만 그가 소리 내어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가뭄에 단비처럼 보이는 미소도 수정 앞에서만이었다. 오죽하면 대학 동기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이 사이보그였을까.

“해리슨 빌딩.”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수정에게서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 드디어 해 냈구나. 얼마 만이지?”

“4년.”

미국에 왔을 때부터 현태의 목적은 오직 해리슨 빌딩의 매입이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했다. 미국에 온 지 꼭 4년 만의 일이었다.

현태의 시선이 창밖 고층빌딩을 응시했다.

“이젠 뭐 할 거야?”

수정이 초조한 마음을 감추며 물었다.

재벌 2세라고는 했지만 온전히 자력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현태는 가진 것도 많았지만 그걸 굴리는 데 더 재능이 있었다. 돈이든 부동산이든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몇 배로 불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숙제.”

현태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수정의 눈동자가 두 배로 커졌다. 내가 아는 것 중에 해리슨 빌딩 말고 다른 숙제가 있었나?

골치 아픈 과제를 앞둔 학생처럼 현태의 미간에 세로 주름이 몇 개 나타났다. 살짝 찡그린 표정도 수정은 무척 좋았다.

“노인네한테서 최후통첩이 왔어. 귀국해서 손주 대령하라고.”

봄바람처럼 살랑대던 수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래. 기현태는 결혼했었지. 그것도 4년 전에.

의미 없던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하까지 건넸던 수정은 그날을 떠올리자 짙은 패배감에 입 안이 써졌다. 결혼이라면 치를 떠는 현태 옆에 있으려고 악착같이 그를 향한 마음을 우정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현태는 점심 메뉴 이야기하듯 다른 여자와의 결혼 날짜를 말했고, 수정은 그날 처음으로 세상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수정이 10년 동안 사랑했던 현태는 지금 한국에 있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한울 그룹 총수이자 그의 할아버지가 내준 말도 안 되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어먹을 노인네. 그만큼 살았으면 됐지, 왜 죽지도 않고 이런 일을 벌이는지.

괜찮아. 현태를 제일 잘 아는 건 나뿐이야. 껍데기뿐인 결혼. 아무 의미 없어. 기현태는 내 말만 듣는 내 남자야.

하얀 웨딩드레스를 소복처럼 차려입고 현태의 곁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허수아비 같던 여자. 수정의 붉은 원피스가 새하얀 주먹 아래에서 속절없이 구겨졌지만 현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했다. 수정에게 현태는 온 세상이자 삶의 이유였다.

* * *

불판 위에서 대패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 갔다. 나비 주둥이처럼 길게 뻗은 환기구가 정신없이 솟아오르는 연기를 부지런히 빨아들였다.

“가서 인사도 좀 하고 그래.”

아까부터 엉덩이를 방석에 붙인 채 고기만 굽고 있는 희우를 보며 교무 부장인 정환이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이제 막 사십 대로 접어들었지만 대머리에 노안이라 환갑이 넘은 교장과 동년배로 보였다. 게다가 사춘기도 아니면서 잔뜩 올라온 피부 트러블 때문에 얼굴 전체가 멍게처럼 울퉁불퉁했다.

희우는 돼지기름 때문에 번들대는 그의 두툼한 입술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매일 보는데 무슨 인사를 또 해요.”

성의 없는 희우의 말투에 정환이 또 혀를 끌끌 찼다. 못마땅한 듯 고개를 흔들자 건너편 귀로 넘긴 머리카락이 이마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저럴 거면 그냥 머리를 밀지.

희우는 맥없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그의 얇디얇은 머리카락을 흘끔 쳐다본 후 다시 불판 위로 시선을 옮겼다.

막 고기 한 점을 집으려는데 옆에 놓아둔 가방 안에서 부르르 진동 소리가 들렸다. 들고 있던 집게를 내리고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한 희우의 눈매가 짜부라졌다.

“여보세요.”

-어디냐?

꼬장꼬장한 노인네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회식 왔어요.”

-…….

침묵이 이어졌다. 못마땅해 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아니나 다를까 삼십 년을 들어왔던 레퍼토리가 똑같이 반복됐다.

-어디 여자가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얌전히 시집이나 갈 것이지!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설마 술도 마시는 게야?

네네, 맥주도 마시고 소주도 마시고 폭탄주도 마십니다. 희우는 눈을 꾹 감은 채 하고 싶은 말을 꿀떡 삼켰다. 벽과 싸우는 건 의미가 없었다.

-튼튼한 아들을 낳으려면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

또다시 시작된 아들 타령에 희우의 인내심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할아버지 뭐라고요? 왜 안 들리지? 여보세요? 엽……떼요?”

고전적인 방법이었지만 제일 뒷말이 나오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희우는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떼고 같은 말을 반복하다 끊어 버렸다.

‘여자가’로 시작해서 ‘여자가’로 끝나는 말을 평생 동안 듣고 자랐다.

여자가 많이 배우면 탈이 난다는 확고한 삶의 철학을 가진 할아버지는 희우를 대학에도 안 보내려 했다. 고등학교 내내 상위권을 유지했던 성적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무슨 조선 시대 백자 빚는 소리냐고?

희우는 사대주의 사상이 뼛속까지 젖어 있는 종갓집에서 태어난 딸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안의 남자들과 겸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희우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소주를 물컵에 콸콸 따라서 마신 후 다시 불판을 짜증스레 바라봤다.

지글지글 맛있는 기름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삼겹살은 이 세상 어떤 꽃보다 아름다웠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하지만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정환의 뻘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교장 샘 은근히 그런 거 챙기는 거 몰라?”

희우가 도무지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환이 자꾸 찔러댔다.

“인품 좋으신 부장님께서 교장 선생님 많이 챙겨 드리세요. 전 이미 찍혀서 괜찮아요.”

희우가 어색하게 웃자 못마땅한 그의 시선이 곧 희우 옆에 앉은 신규 교사에게 옮겨갔다.

“자, 그럼 우리 이슬 선생이 가서 교장 샘 술 한 잔 따라 드리고 와.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어리고 예쁜 여자가 따라주면 술맛도 더 좋겠지. 안 그래? 이름도 딱 좋다. 이슬!”

정환이 떠벌떠벌 떠들어대자 희우가 들고 있던 집게를 탁 내려놓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기가 왜 이래? 이슬 샘, 우리 양념 고기로 바꿀래요? 여사님! 여기 불판 좀 바꿔 주세요!”

갑자기 커진 희우의 목소리 사이로 정환의 살살 구슬리는 듯한 말투가 끼어들었다.

“자, 이슬 샘 어서 가서…….”

“이슬 샘, 환타 마실래? 사이다? 아님, 비싼 매실?”

희우가 말을 싹둑싹둑 자르자 그렇지 않아도 벌겋게 달아올랐던 정환의 이마가 잘 익은 토마토처럼 시뻘게졌다.

“독고 선생! 지금 일부러 내 말 자르는 거야?”

별안간 높아진 정환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선생님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사람들의 표정엔 또 시작이냐, 라는 표정이 짜증스레 스쳤다.

“설마요. 전 그냥 순진한 신규 선생님이 훌륭한 인품의 교무 부장님을 오해할까 봐서요. 요즘 세상에 누가 젊은 선생님한테 술 따르라고 강요하겠어요. 안 그래요? 이슬 샘, 교무 부장님도 그런 뜻은 아니었을 거야. 요즘 직장 내 성희롱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데. 얼마 전에 연수도 했잖아요, 연수 명부에 사인도 했는데. 기억하시죠?”

희우의 손이 허공에 대고 사인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상냥하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차츰 건조해지고 차가워졌다. 호기심에 이쪽을 살피던 선생님들이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환의 얼굴은 이제 불판 아래서 이글대는 불처럼 붉어졌다.

3차까지 가자는 동료 교사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길. 희우는 돌아오는 내내 잠이 오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웬만해선 취하는 일도 없지만 희우는 술에 취하면 죽은 듯이 잤다. 가끔 함께 있던 사람이 죽었나 싶어 인중에 손가락을 대어 볼 정도로 술에 취하면 시체가 따로 없었다.

“으으으! 죽겄다. 회식 두 번만 했다가는 아주 노래방을 말아 드시겠어. 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던 희우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희우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 등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곧 꺼졌다. 거실에서부터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현관은 여전히 환하게 밝았다.

왜 불이 켜져 있지?

집 안을 살피는 눈동자에 팽팽한 긴장감이 서렸다. 전기세가 아까워 일괄 소등 스위치를 끄는 걸 잊은 적 없었다.

희우는 신발장 문을 조용히 열어 가장 튼튼한 장 우산을 꺼내 들었다.

다시 밝아진 센서 등에 벌렁대던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졌다. 당장에라도 누가 달려들 것만 같았다. 우산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마디가 하얘지고, 긴장감에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벌떡댔다.

하얀 대리석 위로 하얀 양말을 신은 희우의 발이 조용하게 움직였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해서 걷다 보니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우산을 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은 거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불이 켜져 있다는 것 외에 평소와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불을 안 끄고 나갔나?’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절대 아니었다. 더군다나 거실은 불을 잘 켜는 곳도 아니었다. 갑자기 취기가 싹 달아났다.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가고 척추뼈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라도 신고를 할까?’

불이 켜져 있다고 신고하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있었다. 얼마 전에도 별것도 아닌 일에 신고한 적이 있어서 신중해야 했다.

착각했을 수 있어.

희우의 시선이 잠시 현관에 머물렀다. 도주로를 확인한 후 결심한 듯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산을 쥔 손바닥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휴대폰에 112도 입력했다. 여차하면 통화 버튼을 누를 생각이었다.

희우가 마치 자객이라도 된 듯 조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뭐 하는 겁니까.”

비어 있던 공간에서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아아아악!”

희우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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