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굶주린 여자만큼 쉬운 건 없지. 당신을 만난 건 내게 행운이 분명해.” 수백 년간 그 어떤 제국도 정복할 수 없던 왕국 티텐. 와스터 제국의 왕자, 히폴로테스의 목적은 오로지 티텐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뿐. 티텐의 멸망을 위해, 나라를 버릴 아군을 위해, 그는 사랑을 연기한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그 누구보다 강해지기 위해 그녀를 기만했다. 쓸모를 다한 여자가 탑에서 몸을 던진 순간, 누구보다 절박하게 여자를 움켜잡을 줄 모르고. * 탑에 갇혀 살아온 삶 속. 어미를 죽이고 얻은 삶은 그림자뿐이었다. 죄책감에 존재마저도 부정해 오던 어느 날 나타난 이국의 남자는 지나치게 반짝였다. 남자는 마치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피해도 따라오는 빛줄기.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다가, 손을 뻗어 보다가, 결국에는 슬쩍 발을 옮겨 조용히 눈을 감고 느끼게 되는…… 그런. 머리를 쓰담아 주었다. 겨우 그걸로 사랑에 빠졌다. 정말 우스웠지만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결코 우습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그를 위해서 나라를 부수고, 왕가를 배반하고, 그래 모든 걸 뒤로하고…… 주저 없이 그를 선택했다. 또다시 혼자가 될지 모르고. * 그는 태양이었다. 건너편은 암흑뿐인, 반쪽짜리 태양. “나를 사랑해.” 나를 비추지 않는 그가 명령했다. “예전처럼 나를 사랑해 줘.”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은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