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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13화 (113/113)

113화

한편, 이른 아침부터 마을을 떠난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나서야 항구 마을에 도착했다.

최근 무역항으로 급부상하는 여러 개의 마을 중, 이곳이 어느

곳보다 각광받는 이유는 역시 독립 기념 행진 때문이었다.

국왕이 왕성에서부터 국경 지역까지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행진의 끝이 바로 이 항구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티텐의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매년 이

지역을 찾았고, 이어지는 행진을 보며 백성들은 기쁨에 취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하나 되었다. 그들이 이룩한 독립은

그만큼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작은 왕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놀랐어.

괜찮아?”

“그럼요. 마타리랑 얼마나 자주 왔는데요. 매년 빠지지 않고

왔어요!”

두 손을 옴팡지게 쥐고 대답하는 에즈라를 보며

히폴로테스는 심란해졌다. 제가 없는 동안 그 하녀가 에즈라의

곁에서 추억을 쌓아 놓은 것이다. 하녀 덕분에 에즈라는

조금이나마 덜 외로웠을 것이다. 때때로 웃고 즐거워하기도

했겠지.

헌데 그게 마뜩잖았다. 솔직해지자면…… 내가 아닌 다른

이와 추억을 만들어 놓았다는 게 불쾌했다. 다시 이곳에 올

때마다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한순간 싸늘한 기운을 흘리던 히폴로테스는 자그만 손이

주먹에 닿아 오자 급히 표정을 풀었다.

“왜?”

“괜찮아요? 전차로도 꽤 걸리는 거리라 힘들지 않았어요?”

“에즈라,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다가 이마에 쪽, 입술을 맞추었다.

부끄러웠지만 가슴속이 간질간질해서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키득거리는 에즈라를 보며 히폴로테스는 이번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귀엽다. 귀여워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숨이 막혀라 품에 끌어안고 이곳저곳에 입술을 부비고

당장이라도 안에……

“으윽, 놔주세요.”

히폴로테스는 무척 아쉬운 마음으로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든 말든 에즈라는 독립 기념

행진을 지켜보기 위해 다른 그를 재촉했다.

“이러다가 늦겠어요! 가까이서 봐야죠.”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리 와.”

그는 재촉에 못 이기는 척 뒤를 따랐다. 널따란 대로에는

행진을 보기 위해 나선 이들로 북적였다. 히폴로테스와

에즈라가 그들 사이를 누비자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과 닿아 오는 눈길들은 늘 거북한 터라 에즈라는

히폴로테스의 품으로 도망쳤다. 히폴로테스는 그런 그녀를

소중히 감싸 안은 채 대로 가까이 나섰다. 들뜬 기색을 지우지

못한 이들의 머리통이 바글바글하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요.”

“지금도 꽤 가까워. 이대로는 불편해? 더 앞으로 가면 너는

휩쓸리고도 남아.”

왕의 행렬이 나아갈 큰길 주변은 말 그대로 북새통이었다.

이리저리 밀려 길을 잃기 딱 좋을 것이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에즈라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즈라를 누가 이길까. 아마 저는 평생 그녀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 절대 놓치지 마.”

그가 어깨를 감쌌던 팔을 풀더니 눈 깜짝할 새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꺅, 짤막한 신음을 흘린 에즈라는 급히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키득거렸다.

“까,깜짝 놀랐잖아요.”

“나보다 보고 싶어 한 거잖아. 잘 봐.”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이마에 입술을 내린 후 고개를 돌리자 혼을 쏙

빼놓는 황홀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히폴로테스, 저기 좀 보세요!”

“그래, 보여.”

먼발치서 홀로 구경하던 나날들과 달랐다. 그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밀려오는 행복감을 가득 안고 에즈라는 행진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금빛 전차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향기를 머금은 오색

빛깔의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왕은 근엄한 모습을

벗어던진 채로 기뻐하는 백성들을 향해 다정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가 크게 손을 흔들 때마다 사람들은 울컥한 얼굴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올해는 가장화려하고 또 벅차오르는 행진이었다. 사람들은

왕의 이름을 외쳤고, 뒤따르는 공주들과 왕비님 역시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기도했다.

“와아아!”

“르누아르 왕만세!”

“티텐 만세!”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함성 속에서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차오르는 행복을 즐겼다. 사실 잘 알았다. 삶은 이렇게 늘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어쩔 때는 눈물 나게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며, 어떤 날엔 절망하다가 무너져 내릴 때도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오

“고마워요. 너무 좋아요!”

누구와 함께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는 것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랑해.”

행렬은 보는 듯 마는 듯 남자는 그 말만을 제 귓가에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이제는 어찌 돼도 좋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마를 부비적대던 에즈라는 불시에 그의 두 뺨을

감싸 쥐고 입술을 내렸다.

부끄러워할 때는 언제고,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쪽쪽 빨더니

이마를 맞대고 헤죽거린다. 아이처럼 생글거리는 얼굴을

얼빠진 소년처럼 응시하기도 잠시, 금세 정신을 차린 남자는

목마른 사람처 럼 달려들어 깊은 입 맞춤을 쏟아부었다.

“자, 잠시만……"

“잠시는 무슨, 네가 자초한일이야.”

입술을 피하려 고개를 틀어 보았지만 그는 어림없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뒤통수를 틀어잡은 채 고개를 틀어 깊숙이

침범했다.

따뜻하고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이 제 것을 소중히 간질이자

에즈라는 결국 기껍게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눈을 감고 가없이 열렬한 남자를 느끼던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하늘 높이 무언가 치솟아 올랐다. 펑, 익숙한 소음과 함께

새까만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 위로 붉은 불꽃들이 어우러져

흘러내린다.

올해는 붉은 불꽃이 네요.”

환상적인 광경을 올려다보고만 있자 그가 콩, 이마를 부딪혀

왔다.

“히폴로테스…… 저것 좀 보세요. 너무 예뻐요.”

“집중해.”

“저,저것만 더보고요. 네?”

또 졌다. 남몰래 푹, 한숨을 내쉰 히폴로테스는 끌어안고

있던 에즈라를 아래로 내려 주었다. 향기 어린 머리칼에 뺨을

부비며 하늘을 수놓는 같잖은 불똥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올려다보다가도 즐거워하는 말간 눈동자 하나에 가슴이

속절없이 뛰고 간질거렸다. 미친놈처럼 아래가 달아오르는

것도 뭐,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었으니.

그는 에즈라의 뒤에서 그것을 뭉근히 문질렀다. 악취미가

따로 없다. 에즈라가 귓가를 붉히며 입술을 꾹 내리 무는 게

보였다.

“불꽃 말이에요, 이국에서 온 거래요. 저는 전에도 봤어요.”

“그래? 누구랑?”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을 돌리는 게 깜찍하다. 가녀리고

말간 목덜미를 보며 그는 풀린 눈으로 입술을 핥았다. 저도

모르게 그곳을 입술로 훑어 나가자 에즈라는 인상을 구긴 채

그를 올려 다보았다.

화를 내려는 게 분명하다. 분명한데…… 너무 사랑스러웠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요……"

투정을 늘어놓으려는데 눈치 빠른 남자는 또다시 끌어안더니

은밀히 귀를 지분거린다. 에즈라는 포기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작은 이마를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고개를

움직거리던 그때였다.

“잠시만.”

당장 집으로 끌고 갈 줄 알았건만. 그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턱선을 쓸었다. 어딘가 고민하는 듯한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빡이자 그는 또다시 와락 몸을 끌어안았다.

“……뭐예요?”

“아주중요한일이 남았어.”

남자의 진득한 손길이 어깨를 감싸고 팔뚝을 타고 내려가

손목을 잡아 올렸다. 진지한 얼굴을 한 히폴로테스는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르며 눈을 맞춰 왔다.

‘함께 춤춰 주세요, 공주님.’

오래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무릎 꿇고 춤을

신청했더랬다. 뒤이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주었었지. 나조차 나를 부정해 온 삶에서 당신은 내게 의미를

주었어. 그것이 기만을 위한,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해도……

나는 분명 그날 한 사람이 되어 당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 당신을 사랑했다. 사랑받기 위한 사랑이 아닌, 한낱

사랑으로. 찬란하게 수놓인 별빛 아래서 못 이기는 척 당신에게

손을 뻗었어.

갑자기 눈앞이 눈물로 일렁였다. 그토록 먼 길을 돌고 돌아,

희생을 짊어진 고통 끝에 우리가 다시 닿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가득 채운 남자는 매력적인

입꼬리를 올리더니 새하얀 끈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목에 묶어

주었다.

“뉙스야.”

알 수 있었다. 모를 리 없다. 조금 늦은 당신의 진심을.

“이번엔 내가 너를 위해 만들어 봤어. 그래서 말인데……7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외면해 왔던 사랑을 드디어 전할 수

있게 되었어. 내가 지은 죄가 너무 깊어서. 너를 망가뜨린

시간을 후회해서. 너를 사랑하는 내가 두려워서 인정할 수

없었어. 너를 사랑해 버린 나를…… 나는 이제야 용서했다.

“나랑 평생 함께해 줄래?”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그는 살짝 귓바퀴를 붉혔다. 답지

않게 긴장한 얼굴로 혹, 거절이라도 나올까 전전긍긍하며

서둘러 덧붙였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

그 순간, 사그라든 줄로만 알았던 폭죽이 다시금 하늘을

불태웠다. 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크게 발광하는 금빛

빛무리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아. 멍하니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여자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어렵사리

웃었다.

저 별무리만큼 수많은 사랑 중, 내가 정의한 사랑은 흘린

피를, 희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용기.

어쩌면 나 편하자고 하는 위선. 이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바치는 속죄양. 죄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사랑해요.”

그리 고백하자마자 그는 팔을 잡아끌어 조금 거칠게 품어

주었다. 울며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새까만 밤을 넘어 나만의

태양이 나를 온전히 비춘 순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속죄의

방법이라는것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같이 살자.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서. 그렇게 살아가자.”

에즈라는 손목에 묶여 있는 뉙스를 쓰다듬으며 눈물 고인

눈으로 웃어 보였다. 무심히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비극적인 연극이 아닌, 진정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좋아요.”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 우리는 서로의

속죄 양이다.

@재업.공유.타싸유출 X 갠소_오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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