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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12화 (112/113)

112화

녹음이 푸르른 언덕 우I,조금 낮은 곳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남자. 그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걸어 나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귓가를 맴도는 바람 소리는 간지러웠고. 옆에 버티고 서 있는

굵직한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버들가지 사이로 보이는 결 좋게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칼.

강인해 보이는 이목구비와 탄탄한 체구. 한낮의 태양보다 나를

밝게 비추는 눈동자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당신의 모든 것.

“ 진짜예요?”

거짓이면 어쩌지. 꿈이나 환상이라면 너무 잔인한

아름다움이었다. 에즈라는 주춤하며 발을 더디게 옮겼다. 그것이

퍽 답답해 보였던지 그는 한쪽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보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아플 만큼 온몸을 끌어안아 주었다.

“늦어서 미안해.”

기다려 줘서, 고마워.

히폴로테스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여자를 가뿐한

마음으로 품에 안았다.

꿈이 아니다. 환상도 환영도 아니야. 내가 그토록 그려 오던

화폭 속의 남자도 아니다.

“기다리라고, 기다리라고 해서……"

그래서 기다렸어. 당신을 매일매일 기다렸어. 단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에즈라는 작은 손으로 그의 등을 더듬고 그리움에 뺨을 부볐다.

전해져 오는 온기와 저만큼 쿵쾅거리는 심음이 그는 진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울지 마. 나는 너를 웃게 해 주고 싶어.”

“네가우는 거 너무아프더라.”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건가. 에즈라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마주 보았다. 애달픈 미소를 머금은 남자의 눈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히폴로테스는 투박한 손끝으로 여린 뺨에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 주었다.

“사랑해.”

미치도록 전하고 싶었던 말. 속죄하지 못해 주저했던 수많은

날들. 돌고 돌아 네게 닿았으니 이제는 수도 없이 속삭이게 될

하나뿐인 진심.

“나는 너를 사랑해.”

어쩌면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분명 그 순간부터야.

빈껍데기뿐인 내 손이. 가진 게 없는 네 손을 맞잡은 그때부터.

우리는 혼자가 아니게 된 거야.

“나도, 나도 사랑해요.’,

말하면 닳을까.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꼭꼭 담아 두었던

사랑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벅찬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며.

“에즈라. 나는 너를……,”

부끄럽게도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야 모든 게

온전해진 것만 같아서.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미련하게 놓지

못했던. 그토록 갈망하던 평온한 삶에 닿아서. 그 끝이 너라서.

“지키고, 사랑하고. 아껴 주고 싶었어.”

그랬던 거야.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줄 수 있는 모든 걸 바쳐

사랑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모르는 사랑은 그런 것이라. 그렇게

너를 사랑했다.

모든 기다림의 끝에서 마치 축복하듯 순풍이 불어왔다.

수양버들 가지가 머리칼을 건드리고. 흩날려 온 꽃잎이 시야에

어른거리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눈물을 마르게 해 준 온정 어린

바람과 함께.

세상이 온통 하나의 무대라면 이 연극의 끝은 비극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 한다. 이름도 삶도

없지 만, 가장 소중한 것을 가득 안은 채로.

며칠 건너 기를 쏙 빼놓는 인물들과 대면하게 된 르누아르는

피로를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는

눈앞의 위험인물을 샅샅이 훑어보며 바짝 신경을 세웠다.

“이리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충 그런 것 같네.”

히폴로테스는 르누아르의 옆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기사를

보며 비소를 흘렸다. 건실한 충성심이 묻어 나오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이 묻어 둔 그리움이 고개를 든다.

“아. 이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시다시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옆을 지키는 것이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하악질을 하고 있는데.”

기사가 자신을 짐승 취급 하는 말에 발끈하자 르누아르는 손을

들어 올려 움직임을 막았다.

“뭐 하는 것이냐. 내 손님이다. 예를 지켜.”

“……죄송합니다.”

짐짓 엄한 꾸지람에 기사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반항 가득한 얼굴로 물러나자 르누아르는 끄응, 신음을 흘리며

눈가를 비볐다.

“삼 년이나 지났는데 당신은 그 모습 그대로군요.”

“그쪽도 딱히 달라진 건 없어. 피부가 조금 삭은 것 같은데.

집무가 꽤 많은가 봐?”

두 번이나 그런 얘기를 듣다니. 르누아르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관리를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왕이란 질서를 위해 고독해져야 하는 자리니까요. 홀로

집무를 떠안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다 견딜 만하니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거 아닌가?”

허를 찌르는 물음에 르누아르는 미묘한 웃음을 띠었다.

히폴로테스는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말 성검을 쓸 줄은 몰랐어. 나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

당연히 진검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군, 그리 생각했거든.”

“약속은 지킵니다. 저 역시도 성검을 썼지만 당신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히폴로테스는 삼 년 전, 성검에 찔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새까만 꿈을

꾸었다. 고작 한숨 자고 일어났다 생각했을 뿐인데 삼 년이나

흘러 있던것이다.

“성검의 능력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원한 잠에 들

수도 있고, 고작 일각이 지난 후에 일어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선 당신을 티텐으로 옮긴 겁니다.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지만…… 살았다면 내버릴 수는 없다

판단했습니다.”

“퍽 인정이 많은 성격인가 봐.”

“글쎄요. 동정심이 많은 거라고 해 두죠.”

신전에서 눈을 뜨자마자 발견했던 두 자루의 검. 손끝이 닳을

만큼 그것을 쓰다듬던 나날들. 히폴로테스는 눈앞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차를 들어 올렸다. 뜨끈한 찻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속죄는 쉬운것이 아니죠.”

속죄라. 히폴로테스는 차마 용서도 구하지 못했던 지난 삶을

떠올리다 지웠다. 지그시 눈을 감는 그를 르누아르는 고요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그것이 위로임을 모르지 않았다. 누구나 죄를 짓는다. 그러니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검은 용기를 먹고 희생을 뱉는다더군요.”

“칭찬인가?”

“물론입니다. 용기를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히폴로테스는 이마로 흘러내려 온 머리칼을 대강 쓸어 올렸다.

간단한 행위임에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흘러서 르누아르는 잠시

그를 멍하니 구경했다.

“티텐에 계속 머물 생각입니까.”

“그래. 에즈라가 그걸 원하거든.”

여자가 거론되자마자 금방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분위기를

풍겨 대다니. 하는 말이나 표정을 보아하니 영락없는 필부가 다

되었다.

“그보다 귀족으로 둔갑시켜 줄 줄은 몰랐는데.”

“부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그

오만하고 지나치게화려한 용모로 평범하게 살다간 요상한

의심만 삽니다.”

“그거 알아? 에즈라는 내가 나무하는 거 좋아해. 튼튼한 근육이

불끈불끈한다면서 몰래 조금씩 훔쳐보는 게 다람쥐 같아. 미치게

귀여워.”

대화는 어딘가 계속 엇나가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는 아내

자랑에 르누아르는 한 귀로 흘려 넘기며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움직이기 불편한 침상만 빼면 완벽한 오두막이었는데. 덕분에

쓸데없이 넓기만 한 곳에서 살게 됐잖아.”

남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 히폴로테스는 점점 구겨지는

르누아르의 표정을 즐기며 유쾌한 미소를 띠었다.

“쫓겨난 귀족일랑 걱정 마십시오. 더 질 좋은 영지를

하사했으니.”

“걱정안 했는데.”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남자는 볼 장 다 봤다는 양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이 그 날이던가. 행진인가 뭔가 하는 날.”

“독립 기념 행진입니다. 알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에즈라가 얼마나 기대하면서 방방 뛰어 대던지. 하루 종일

웃고 있어서 설레 죽는 줄 알았어.”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어쩐지 속이 느글거렸다. 르누아르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살수 없이 해. 에즈라 실망하면 안 되니까.”

“지금……왕에게 명령하는 겁니까.”

“음, 실수 없이 해 보시죠.”

그는 존대를 모르는 남자였다. 괴상한 존대를 받자 르누아르의

기분은 더욱 저조해졌다. 이게 아닌가. 갸웃해 보인 히폴로테스는

될 대로 되라지 하며 뒤돌아 나갔다.

“저, 저 경망스러운……!”

히폴로테스가 아주 멀어지고 난 뒤에야 기사는 가슴팍을

두드리며 성을 냈다.

“너무 늦었잖아.”

“아무래도 그…… 눈빛은 시뻘겋고 너무 매서워서요.”

“겁먹은 게 자랑이냐.”

기사는 솔직함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가 머쓱한 듯 덜떨어진

사람처럼 실없이 웃어 보인다.

“됐다. 늦었어. 어서 준비하지 않고 뭐 해.”

“예!”

대답은 잘하지.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놈을 시원찮은 눈빛으로

올려다보던 르누아르는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시골 마을 중심에 우뚝 솟은 목조 저택은 귀족 가문의

것이었다. 무려 사 층짜리 저택이라니! 게다가 지하도 있다고

했다. 마을에서는 가장 호화스러운 저택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마을 한정일 뿐.

조금 떨어진 이웃 마을만 보아도 어찌나 휘황찬란하게 꾸며

놓았는지 아무나 들지 못하게 울타리 앞에는 호위병까지

두었다고 했다.

소문이 돌자 마을 사람들은 새로 자리한 귀족 부부는 소박한

것을 넘어서 이제는 묘하고 신비하다며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하게 퍼져 나갔다. 그도 그럴게, 그들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데다가 뻔질나게 여행을 위한 짐을 꾸리곤 했으니

얼굴 한번 구경한 적 없는 탓이다.

그것은 비단 마을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고용인들 또한 제

주인에 대해 보따리보다 더 큰 호기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주인 나리께서는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걸까?”

“맞아, 나도 궁금해. 거의 매일을 마님과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시잖아. 큰돈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딱히 다른

일을 하시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층 침실 정리를 마친 하녀들은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

계단을 내려오며 두런두런 수다를 떨었다. 주인 부부가 모두

저택을 비워 시간이 넉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여행은 얼마나 다니시는지. 침실에서 나왔다 하면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시니 돈도 엄청 많이 들 텐데.”

“혹시 지하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에이. 그럴 리가! 그렇다면 하인들에게 청소를 맡기실 리

없지!’’

“그런가? 그래도 우리 봉급은 늘 두둑이 주시니……"

“거기.”

아래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하녀들은 그대로 얼음처럼

굳었다. 어렵사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기질의 눈빛으로

노려보는 마타리가 보였다.

“마. 마타리 님.’’

“할일은 다 끝냈나?”

마타리의 고압적인 추궁에 고개를 짧게 끄덕여 보인 하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네, 우선 두 분 침실 정리는 모두 끝냈습니다. 손님방과

집무실, 서고와 또……"

“그럼 내려와서 응접실을 청소해. 쓸데없는 거 궁금해하지

말고.”

마지막 손가락을 접으려던 하녀의 얼굴이 대번 시무룩해졌다.

마타리는 자신을 지나쳐 가는 하녀들을 뾰족한 눈빛으로

감시하다가 후, 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아예 저들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어디로 보나 심상치 않은

귀족이었으니까.

자주 저택을 비우고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귀족 부부라.

무엇보다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은 이곳에 상주하지 않았다. 즉.

이 저택에는 주인 부부 두 사람만 지지고 볶으며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것 역시 드문 일이었다.

“할 일이 끝난 이들은 내게 검사받고 돌아가도록 해!”

마타리는 크게 외치며 그들을 부렸다. 창밖으로 푸르렀던

하늘과 불그스름한 해가 섞여 기묘한 색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이

비쳤다. 곧 있으면 축제가 시작되겠군.

부디 두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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