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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11화 (111/113)

111화

“그렇지.”

시프나드는 테이블에서 손을 내려놓으며 금잔만 매만졌다.

무얼 목구멍으로 넘길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또 다른 궁금증을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시프나드는 한참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르누아르가 선박을 타고 제국까지 오는 일은 드문 일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왕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으니

지금 묻는 게 맞았다. 그는 큰 용기를 내어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성검은? 어찌 되었지?”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 말은……:’

“아무래도 지금쯤 돌아가고 있겠죠.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그래, 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있어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진정 모르는 걸까. 입맛이

지나치게 씁쓸해서 아무 맛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끈질기게도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아. 자꾸 객기를

부리게 하고. 멋없이 질척이게 만들어.

“그런 건 없고. 전해 줬음 하는 게 있는데.”

“서신 말입니까?”

“나이가 들면 눈치만 는다더니.”

시프나드는 조소하며 품 안에 감춰 두었던 양피지를 꺼내

보였다. 그가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는 시종에게 그것을 건네자

시종은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어 르누아르에게 내밀었다.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찾아보긴 하겠지만 계속 티텐에

머물고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으니까요.”

“나도 잘 알아.”

소원한다 해서 쉽게 닿을 수 없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모르는 거잖아. 만에 하나라도 네가 이것을 볼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나를 한 번 더 떠올려 준다면…… 나는 충분할 것 같다.

식사는 멋없고 지루하게 끝을 맺었다. 르누아르는 제국 곳곳을

돌아보다가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시프나드는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미련 없이 황성을 나서는 왕의 행렬을 먼발치서

지켜보던 그는 허전한 마음으로 등을 돌렸다.

침실에 들어선 그는 덩그러니 놓인 침상에 털썩 걸터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온기 하나 어리지 않은 널찍한 방은 오직

사치와 외로움뿐이다. 낡은 협탁을 멍하니 응시하던 시프나드는

이내 침상에 대자로 드러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그렇게 아득해져 버린 그녀와의 마지막을 되새겼다.

‘원래 이럴 계획이었던 건가요? 다 알면서 그런 거예요?’

‘아니. 원래 이럴 생각 없었어. 추호도 너를 놓아줄 마음 따위

없었어. 너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국 나는 안

되더라.’

무엇보다 티텐처럼 너를 평생 가둬 두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힘을 갖지 못한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거 말이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거. 그거 하나였다. 네가

그랬듯이.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해서요?’

하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너를 제대로 마주 본

그때, 난 처음으로 내 선택을 후회했던 것 같아.

‘당신이 나를 위해 그를 죽인 거야?’

서글프게도 나를 탓하던 네 모습은 너무 선명해.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나는 처음으로 내 감정을 원망했어.

멍청하게도 차라리 너를 살리고 죽은 게 나였다면 하고 바랐다.

그럼 네가 조금은 나를 그리워할지도 모르니까.

‘아니라고 말해 줘요.’

밤새 내린 비로 축축이 젖어 들었던 돌바닥. 휘몰아치는 바람이

떠도는 스산한 울음소리.

‘나는 당신을 미워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와스터 제국의 항구 끝자락에서 떠밀려 배에 오르던 너는

끝까지 나를 동정했었지.

‘조금이라도 나를 사랑할 수는 없었어? 한 번쯤은 있지 않았어?

아주 잠깐은 그럴 수도 있잖아. 아주 찰나라도 내게 사랑을 느낀

적, 없었어?’

구차한 매달림에 난처해하는 너를 보고 깨달았다. 뒤늦게서야

알았다. 가지는 것은 능사가 아니며 움켜쥐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는걸.

‘ 시프나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끝까지 달콤했다.

‘잘가.’

가서 잘 살아. 뭐든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더 이상 지독한

폭풍 속에 휘둘리지 말고. 누구보다 편안하고 단란하게 살아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세상에서 가장 아픈 말을

내밀며 그녀를 마지막으로 품에 안았다.

파들거리는 몸을 꽉 감싸 안으며 다독여 주다가 서글픔을

참으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골랐다.

이윽고 품 안에 늘어진 에즈라를 다른 이에게 넘긴 후.

천치처럼 소리 내 울며 뒤돌아섰다. 그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아마 평생 지워 내지 못할 마음을 담아 전한다. 이제 내 바람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에즈라에게

부디 그것만이라도 네게 닿기를.

벽보가 붙은 이후로 마을이 달라졌다. 비단 그것은 마을

사람들만의 변화는 아니었다. 땅을 개간하기 위해 일자리가

늘어나자 주변 마을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는 외지인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하니 마을을 다스리는 귀족이

바뀌었다는 말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이리 갑자기요? 귀족을 갈아

치우다니 …… 그분들은 별다른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잖아요.”

“몰라요. 거기서 일하던 나는 졸지에 쫓겨난 신세거든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요. 조용한 마을 이렇게 들쑤셔 놓아서 뭐

하자는 건지.”

꽤 신경질이 났는지 고주망태가 된 마타리는 쾅. 테이블을

내리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흔치 않은 마타리의 추태였다.

낭패라는 듯 미간을 좁힌 에즈라는 시무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 저는 귀족이 쫓겨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귀족들도 가문에 따라서 직위고하가 나뉘죠. 힘없는 이들은

가문을 팔아넘기기도 해요. 물론 아주 극소수의 이야기지만. 최근

티텐에 그런 일은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이 작은 마을을 눈독

들일 일이 뭐가 있겠어요. 무너져 가는 가문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발 들이지 않았을 텐데. 방심했어요.”

“그럼 그때 붙은 벽보도 새 귀족 가문이 들어선다는

내용이었나요?”

“맞아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눈앞이 하얘지더라고요.

내가. 유능한 내가……! 일자리를 잃었으니까요!”

“괜찮아요. 마타리라면 금방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새

일을 찾을 때까지 여기에 편하게 머물러요.”

에즈라는 그녀를 다독이며 퍽퍽한 빵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냈다. 손에 묻은 가루를 탁탁 털어 낸 후. 뒤를 돌아보자 테이블에

늘어진 마타리가 말똥한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봐요?”

“……호수를 만든다던데요.”

“ 네?”

“바람처럼 들이닥친 신흥 귀족 말예요. 오자마자 한다는 일이

호수를 만들 테니 주변 나무를 정리하라 명했대요.”

말할까 말까. 혹시라도 헛된 희망을 심어 줄까 하여 수십 번

고민하다 전한 말이었다. 역시나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린

여자는 이윽고 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 그래요? 음, 그렇구나.”

어설픈 목소리 끝은 불안정했고, 튀어나온 잔머리를 황급히

정리하며 부산스럽게 군다. 누가 봐도 크게 동요하고 있던 여자의

페리도트빛 눈동자를 마타리는 다시 한 번 더 직시했다.

“오늘 날씨 엄청 좋아요.”

에즈라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한 채로 여자는 아무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럼, 저산책 다녀올게요.”

“ 그래요.”

희미한 대답을 뒤로하고 에즈라는 달렸다. 벅차오르는 숨결과

날뛰는 심장. 가슴 부근이 꽉 막혀 오더니 목구멍까지 찌릿해져

온다. 땀이 나고 눈물도 났다. 온 힘을 쥐어짜듯 내달리면서도

바람만은 상쾌했다.

구슬땀을 훔쳐 주는 바람과 흥분으로 가볍게만 느껴지는 두

다리로 에즈라는 목적지도 모른 채 숲속을 가로질렀다.

만날 거야. 눈을 감았다 뜨면 당신은 내 앞에 서 있을 거야. 눈을

꽉 감고. 아무렇게나 달려도 딱 마주치는 거. 끝내 서로에게 닿는

거……그런 게운명이잖아.

발치에서 옷자락이 팔랑이고 긴 머리칼은 이리저리 흩날렸다.

길고 곧게 뻗은 나무 사이를 헤치고 나온 순간, 에즈라는 드디어

뜀박질을 멈추었다.

“하……:,"

절로 탄성이 나왔다. 완연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으니까.

호수는커녕 그저 야트막한 언덕만 있을 뿐이다. 자잘한 풀꽃이

듬성듬성 군집되어 있는 언덕만이.

“바보 같아.”

뭘 기대한 거야. 그토록 바라고 바라서일까. 지치지도 않는지

이리 우매한 짓만 골라 하곤 한다. 힘 빠진 몸을 추스르지 못한

에즈라는 터덜터덜 걸어가 둥근 언덕 부근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에 속고 말았음에도 그리 나쁜 기분만 들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힘차게 달려 보기도 했고. 마타리의 말대로 날은

쾌청했으며 그를 그리며 기대하던 순간만큼은 벅찼었기에.

“ 괜찮아.”

나는 괜찮다. 당신이 늦는다 해도. 나를 잊는다 해도. 혹.

바람에 쓸려 날아가는 꽃씨처럼 흩어져 더는 내게 올 수 없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해.

“사랑하니까.”

한참을 앉아 숨을 고르던 에즈라는 무릎을 당겨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고 주변을 느끼자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소슬바람이

시원했다. 파스스,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를 즐기기도 잠시.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으려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그때였다.

“에즈라.”

바람 소리인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에즈라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야, 아니다. 아닐 거야. 또 질 낮은 기대감과

미련 때문에 환청을 듣는 걸 거야.

날뛰듯 고동치는 심장이 벅차게만 느껴졌다. 가슴께를

움켜쥐고 겨우 호흡하는데 한 번 더 그가 이름을 불렀다.

‘‘……에즈라.”

툭, 에즈라는 가슴을 틀어쥐었던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믿기지

않아 뒤돌아보기 주저하던 여자는 용기를 다해 뒤를 돌았다.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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