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에즈라가 터를 잡은 마을은 티텐에서도 조용하기로 유명한
지역에 있었다. 물론 유명하다 말하기에도 어폐가 있는 것이.
웬만한 이들은 마을 이름조차 알지 못했으며 지역은 더욱
생소해했다.
청렴한 귀족 가문이 관리하는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안온한
삶을 영위해 나갔고, 별다른 불만 또한 없었다. 불만 아닌
불만이라면 사람 적은 시골이라 아주 작은 일도 마을 전체로
소문이 퍼진다는 것 정도였다.
"에 즈라.,’
혼자 살기에 넉넉한 오두막 안. 문밖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그녀는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나가요, 작게
대답하며 문을 열자 바구니 가득 무언가를 가져온 마타리가 서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우선 들어와요!”
“그럼.”
마타리는 사방이 나무로 이루어진 오두막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그림은 여전히 걸려 있었고.
먼지는 폴폴 날렸으며 테이블 위는 간단한 음식과 그림 도구로
어지럽다.
그럴듯한 가구라 해 봤자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침상 하나와
가끔 오는 저를 위한 의자뿐이건만. 어째 올 때마다 더욱
번잡해지고 있는 게…… 또 정리를 게을리 한 모양이다.
마타리는 날카로운 매처럼 눈을 빛내며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청소 견적을 냈다.
“누가 공주님 아니랄까 보두. 여전히 정리는 늘지 않네요.”
“이래 봬도 물건이 다 어디 있는지는 알아요.”
머쓱한 미소를 내보이자 마타리는 익숙하게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그림 도구가 늘어진 테이블 위로 바구니를 얹어
놓은 후,화구를 대강 정리해 옆에 놓인 병에 꽂아 넣어 주었다.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항상 고마워요.”
“안 할 수가 없어요. 내 성격상.”
“그럼요. 잘 알죠.”
순진무구하게 웃어 보이지만 않으면 밉지나 않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마타리는 바구니를 감싼 천을 걷었다. 안에 든
것을 확인한 에즈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다 저주시는 거예요?”
“그럼 내가 이걸 어디다가 쓰겠어요. 지금 몸담은 가문의
아가씨가 어릴 적 쓰시던 거래요. 필요가 없어 버리는 것 같아
우선 챙겨 왔어요. 혹시 버리려던 거라 불쾌하다면…"’
“그럴 리가요! 불쾌할 리가 없잖아요. 이런 귀한 건 제
수중으로는 구하기도 힘든걸요. 너무 고마워요.”
제 생각을 하여 굳이 챙겨 와 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에즈라는 색색의 가루들과 탄력 있는 동물 털로 만든
화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타리의 눈에
얼핏 동정이 스쳤다.
“흰색 염료가 많아서 다행이에요. 구하기 힘든 색인데. 너무
좋아요!”
“ 잘됐네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다시 눈을 굴려
주변을 보았다.
사방이 온통 그 남자뿐이었다. 이목구비는 흐릿했으나 뒤를 돈
모습이나, 저 어드메를 응시하는 남자의 옆얼굴. 혹은 먼발치서
바라보는 남자의 전신. 여자가 그려 나가는 것은 늘 그랬다.
“아직도 기다려요?”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어보아서일까. 기쁨에 젖었던 말간
얼굴이 시시각각 눈에 띄게 굳어 갔다. 살짝 떨리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웃어야 하는데 맘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이제 단념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가끔은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도 필요하다. 곤충이
탈피를 하듯, 괴로움을 지나치면 그 앞에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게 시간이고 또 삶 아닌가.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충분히 사랑했잖아요. 그러니 이제는
당신의 삶을 제대로 찾아갔으면 해요. 음. 그러니까…… 조금
색다른 걸 그려 보았으면 하는데.”
에즈라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풍경이나 인물을 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고, 실제로 그림 몇 점을 팔아넘기며 적은 돈이라도
벌어들이곤 했으니까.
“마타리는 항상 저보다 더 저를 생각해 주네요.”
나를 나보다 아껴 주는 사람에게 고집을 부렸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나는 아직 그를 잊지 못했기에. 평생 잊을 수 없기에. 나를 위해
죽어 간 사람을 잊는다는 건 내겐 불가능한 일이어서.
에즈라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수그리자 마타리는 한숨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지 않은 말이 나올 것 같아 문을
열고 나서려던 그때였다.
“마타리! 이거요.”
“이게 뭐예요?”
후다닥 달려온 에즈라가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든 바구니를
내밀었다. 얼결에 그것을 받자 그녀는 녹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뿌듯함을 피력했다.
“크레온이 감자랑 빵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다줬어요. 초상화를
그려 준 답례로요.”
“초상화 답례라기엔 확실히 지나치네요. 도를 넘었어.”
질린 얼굴로 떨떠름해하든 말든 에즈라는 감자 두어 개를 더
넣어 주었다.
“그래서 마타리랑 나눠 먹으려고요. 감자 아직 싱싱해요. 싹 튼
것도 없구요.”
“글쎄요. 이걸 내가 먹으면 크레온이 엄청 배 아파할 것
같은데.”
마타리는 에즈라보다 두어 살 어린 호리호리한 청년을
떠올리다가 입맛을 다셨다. 불쌍하게도 하필이면 에즈라를
좋아하게 되다니. 착실히 목수 일을 하는 걸 보면 꽤 번듯한
청년인 것 같은데 어째 쏘는 사랑의화살은 몽땅 빗나가고 만다.
"그러니까 비밀이에요.”
아마 평생 이 여자의 마음을 파고들 수 없을 테지.
“당연하죠. 어쨌든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마타리는 꼿꼿한 걸음걸이로 멀어져 갔다.
허전한 마음에 그녀가 아주 멀어져 사라진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에즈라는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마타리의 말이 하나 틀린 것 없다. 언제 올지 모르는 이를
기다리는 일은 저를 갉아먹는 일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조금
갉아먹히면 어떤가. 그 탓에 금이 가고 부서질 듯 위태로워지면
또어떤가.
그 사람은 이리저리 망가진 나라도 사랑해 줄 사람인데.
“오늘 그림은 미루자.”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은 구멍이 송송
뚫린 듯 시린 바람만 스쳐 지나갔다. 답답함을 풀고자 에즈라는
대충 페플로스를 챙겨 들고 오두막을 나섰다.
바스슥. 알맞게 자란 잔디가 발가락을 간지럽히고 약간 마른
땅은 푹신하다. 오늘따라 높아 보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
아래서 조금은 비릿하고 청초한 풀 향기를 깊게 들이쉬며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둘쭉날쭉한 길이의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숲속을 걸어, 쭉
이어진 산길을 따라 정처 없이 배회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마을의 초입으로 걸음을 돌렸다.
마을 입구에는 왕국 소식을 전하는 벽보가 늘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매주 달라지는 벽보를 읽는 재미에 살았다.
오늘이 벽보가 붙는 날이었구나. 마을 입구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자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이 저리
몰릴 정도라니. 벽보의 내용이 무척 궁금했지만 인파 속으로
파고들 만큼 검은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는 자랑할 게 못
되었으므로 시무룩해졌다.
되돌아갈까 생각하며 뒷걸음질 치던 그때. 곁을 지나쳐 가는 두
소녀의 대화가 귓가에 꽂혀 들었다.
“너 봤어? 정말 잘생겼더라.”
“나…… 그런 사람 처음 보I 그냥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잘생겼어. 잘생김이 옷을 뚫고 나와! 뚫고 나와서 내 눈을
찔렀어.”
설렘 가득한 목소리에는 흥분이 어려 있었다. 과장하며
가슴께를 틀어쥔 소녀의 얼굴은 잘 익은 자두처럼 새발갰다. 뭘
보았길래 저러는 걸까. 이유 모를 기대감 때문일까. 걷는 속도는
점차 발라졌다.
키톤 자락이 마른 바람에 살랑였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건
벽보 때문이 아닌지도 모른다. 인파 뒤편에 엉거주춤 서 있는데
마침 벽보를 가져온 남자가 그것을 모두 붙인 후 인파 속에서
빠져나왔다.
“……카코스?’’
에즈라의 중얼거림에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뒤를 돈 그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차렷 자세를 한 채로 굳어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다가선 쪽은 에즈라였다.
“카코스.”
확신하는 어투로 또박또박 그 이름을 발음했으나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휘적휘적 인파를 헤치고 숲 쪽으로 멀어져 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즈라는 뒤를 쫓기 위해 허덕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사람들을 헤치고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남자를 따라 달음박질쳤으나 그는 이미 달아난 후였다.
아니, 어쩌면 흔하디흔한 환영인지도 몰라. 이런 적, 한두 번도
아니고.
손을 내미는 제논을, 퉁명스럽던 데몰레온을. 가끔은
테르모스나 카코스를 보았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들을.
에즈라는 두 손을 쫙 폈다가 꽉 말아 쥐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는데도 허망한
마음은 금세 먹먹해진다.
쓰라린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급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성한
나무가 둘러싼 둥그런 하늘이 보였다.화처럼 푸르른 하늘을
이름 모를 새 몇 마리가 가로질렀다.
주변을 둘러싼 것은 온통 햇볕에 반짝이는 녹음과
새소리뿐이다. 그 평화롭고 안락한 공간 속, 결국 꿇어앉은
여자의 흐느낌이 울려 퍼졌다.
독립 기념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티텐의 왕 르누아르는
와스터를 찾았다. 그만큼 두 나라의 관계는 많이 호전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이번에는 와스터 쪽에서 먼저 만남을 청한 것이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독대에 응한 르누아르는 정자세로 앉아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그쪽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어. 피부 관리
같은건 안 받아?”
“그러는 황제께서는 날이 갈수록 더 번들번들해지십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그쪽보다 몇 살이나 어린데.”
그보다 몇 년이 지나도 참 한결같은 남자다. 날티 나는 말투는
여전했고 황금관은 물론이거나와 한 번도 제대로 의복을 갖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황제는 귀찮은지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을
대강 털어 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는 길에 보니 와스터는 나날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더군요.”
“잘 보I 위대하고 정의로운 데다가 강하기까지 해. 너무 완벽한
황제 치하 아래 있잖아.”
“뭐. 예. 그렇습니다.”
대충 대답하며 르누아르는 턱 밑을 쓸었다. 널따란 응접실
한편은 온통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쨍쨍하다. 환한 대낮부터 제 자랑을 늘어놓던 황제는
포도주를 음미하며 턱을 괬다.
“티텐에서 들어오는 신묘한 교역품에 귀족들이 푹 빠져 있어.
이러다가 다들 주제도 모르고 방탕해질까 걱정이야.”
“안타깝게도 저희로서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와스터
귀족들의 금전을 캐낼 수 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티텐은 자금이
필요한 실정입니 다.”
“그거야 티텐의 사정이고. 이제는 황실에서 교역품에 손을 좀
댈까 하는데. 어때?”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르누아르가 기름진 고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하자
시프나드는 가슴께에 팔짱을 끼며 툭 내뱉었다.
“결정을 무를 생각은 없어. 미안하니까 식사라도 제대로 하지.
그쪽 온다고 해서 특별히 귀한 음식들로 테이블을 채웠거든.”
“그래보이는군요. 감사합니다.”
르누아르는 능글맞은 얼굴의 황제를 직면했다. 원래 끝이
올라간 눈꼬리지만 어째 평소보다 훨씬 살벌한 눈매였다. 눈빛을
보아하니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스푼을 들어 올렸다.
“ 맛있습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야. 늙은이 취향은 잘 몰라서
걱정했거든.”
“제 나이 고작 서른다섯입니다.”
“그래? 그럼 그냥 얼굴이 삭은 거였네.”
둘 사이에 그저 그런 대화가 오갔다. 서로 하고픈 말은 묻어 둔
채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뗀 쪽은 시프나드였다.
“티텐은 좁아서 왕이 모르는 일은 거의 없겠어.”
“티텐이 좁은 왕국인 건 사실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먼 지역이나 작은 소수 마을 같은 경우엔 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파다하죠.”
평이한 대답에 시프나드는 얼굴을 흐렸다. 문득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눈치챈 르누아르는 은근히 눈썹을 들썩였다.
“그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하신 거라면 저도 잘
모릅니다. 삼 년 동안 쥐 죽은 듯 지내니 알 수 없는 건
당연하고요. 맘 잡고 찾는다면 일도 아니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이젠 그냥…… 티텐의 백성일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