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에즈라?”
“아……:’
에즈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가라앉은
마음을 감추려 입꼬리를 올려 보였으나 마타리는 이미 눈치챈
후였다. 그럼에도 에즈라는 익숙하게 모르는 척했다.
“여기예요.”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이곳에서도 꽤 알아준다는 객점이었다.
높이 치솟아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띄는 목조 건물은 색색의
등불을 매달아 더욱 그럴싸해 보였다.
“금방 나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알겠어요?
누가 와도 절대 따라가지 말고요.”
“저는 어엿한 성인이에요.”
가슴을 쭉 펴고 한 말에 마타리는 못 미더운 듯 대놓고 혀를
찼다. 얼굴이 붉어졌으나 티 내지 않으려 괜스레 손톱만 잡아
뜯는데 들고 있던 짐을 받아 든 마타리는 발 빠르게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 예쁘다.”
고개를 들어 푸른빛을 띠는 밤하늘을 보았다. 작은 별들이 물
흐르듯 하늘에 수놓아져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는 행진이
시작되려는 것인지 대로에는 점점 사람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에즈라 역시 기대 어린 눈으로 뒤꿈치를 들어 보았다. 키가
작은 터라 행렬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보다
마타리와 함께 보고 싶었는데 역시 올해도 늦는 모양이었다.
실망하던 찰나, 저 멀리 가까워지는 금색 전차가 보였다.
줄줄이 이어진 금색 전차 맨 앞에는 붉은 망토를 두른 왕이 앉아
모두를 내려다보았고, 사람들은 곧장 준비해 둔 꽃을 뿌리며 왕과
티텐의 발치를 축복했다.
또 다른 금빛 전차에는 왕비와 그의 딸들이 기품 있는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예를 갖춰 보인다. 존귀한 이들은 백성들을 존중할 줄
알았다. 그들 뒤로 빛을 내뿜는 갑옷을 걸친 기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당당한 기운과 젊은 열정. 티텐을 향한 결의가 그들의
만면에 가득하다.
늘 주눅 들어 있던 유약한 모습의 티텐은 갔다. 아예 무너져
사라져 버렸다. 그 위로 세워진 이곳은 더 이상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누군가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것을 더욱
소중히 하기 위한 삶의 터전일 뿐.
티텐을 뜻하는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펄럭였다. 깃발은
찢어지지도, 타들어 가지도 않았으며 피도 묻어 있지 않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며 모두의 가슴속에 희망을
불어다 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되돌려
준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
언제 오는 걸까. 오겠다면서 왜 여태 오지 않는 걸까. 혹, 평생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아니야. 오겠다고 했으니까.”
당신은 올 거야. 나는 그렇게 믿으며 남은 생을 살아갈 거야.
당신을 기다리며 또 그리면서 끝까지 살아갈 거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 없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나누는 것도. 맛 좋은 음식을 즐기고.
편안히 마주 웃는 것도. 주변을 둘러싼 이들처럼 온기를 나누는
것마저.
나는 그냥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다.
그럼에도 차마 떠올릴 수 없는 건. 당신의 마지막이 내게 너무
괴로웠기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홀러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
높이 무언가 치솟아 올랐다. 이윽고 펑. 귓가를 얼얼하게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별이 가득한 밤하늘 위로
금빛 조각들이 부서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정말 아름다웠다. 찬란하고, 열렬했으며 환상처럼 불타
사라진다.
태양처럼 밤하늘을 밝혔다가 이내 저물어 버렸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모두 당신을 닮았다.
“에즈라!”
급박한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리자 엄한 얼굴을 한 마타리가
보였다. 잠시 멈칫한 그녀는 곧 가슴을 쓸어내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안해요. 이미 행진이 시작됐는데 마타리는 안 오고 또
행진은 보고 싶고.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에즈라.”
기다리지 못하고.
“기다리기 힘들어서요.”
울먹이던 여자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잘게 떨리는
어깨로 그녀가 흐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삶은 내게 너무 벅차요.”
사라지고 없는 이를 더듬어 내렸다. 정말 바보 같아. 내가 당신
없는 삶을 택할 거라 생각한 건가. 그게 정말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거라면……오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너무 몰라요.”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눈물을 그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사람들은 황홀함에 젖어 울고 또 웃었기에
눈물이 티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소리 내어
울어도 괜찮을 것이다.
오랜만에 그렇게 설움을 마구 흘려 버렸다. 마음 놓고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기쁨과 환희 속에서 여자는 홀로 무너져 내렸다. 고작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바라보다가 감싸 안아 주는 것뿐이었다.
재건된 티텐의 왕궁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티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녀가 갇혀 살았다는 돌탑 역시 가루가 되어
비옥한 땅을 남겼고, 그 위로는 공주가 사랑하는 정원이
만들어졌다.
최근 자리만 차지하는화를 메우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라
들었다. 늦은 밤, 왕궁 뒤편으로 숨어든 왕은 검은 숲을
가로지르며 이런저런 잡념에 사로잡혔다.
“검은 숲은 올 때마다 기묘한 느낌이 듭니다. 으스스하면서도
성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쨌든 참 신비합니다.”
“겁먹었나? 말이 많아졌군.”
“아닙니다. 벌써 몇 번째 동행하지 않았습니까. 겨우 이런 걸로
겁을 먹다니요! 기사답지 못한 일입니다."
과장스레 가슴을 펴 보이는 기사를 보며 르누아르는 못 미더운
얼굴로 눈썹을 꿈틀여 보였다. 그가 앞서가자 기사는 허겁지겁
그를 따랐다.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기사 나부랭이가 존엄한 왕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테지만. 모든 건 기사가 왕과 독립군일 때부터
허물없이 지낸 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은 숲을 그냥 두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의도한 게 아니다. 검은 산은 티텐의 중심이자. 정수야. 존재
자체이지. 그러니 없앨 수 없어.”
티텐의 중심이니 정수니.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말이었으나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이 무서우리만치 굳어
있었을뿐더러 좁고 울퉁불퉁한 길이 끝나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보입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북쪽 궁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을 버티어 온 듯 허름한 외관을 가졌으나 존재만으로도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 대니 절로 눈길이 갔다.
“그거 아나?”
“ 예?”
“오래전, 이곳의 정수를 깨트릴 수 있는 이는 마녀
하나뿐이었다는 걸.”
“ 마녀라면……”
기사는 잠시 희미한 인영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마녀의 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았으나 목소리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연기. 번진 불길들과 널브러진 사체들. 병사들에게
사로잡힌 마녀는 단 한 가지만을 절박하게 빌었었다. 살려
달라고, 그는 잘못이 없다고. 내게 남은 한 가지를 빼앗아 가지
말라고 울었었는데.
“들어가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기사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알 수 없는
신어가 새겨진 문을 열고, 오직 암흑뿐인 내부로 발을 들였다.
멈칫거리며 조심스레 한 발짝씩 내딛는데 둥근 벽에 걸려 있는
램프 위로화르륵. 시퍼런 불꽃들이 하나둘 번져 가더니 내부를
환히 밝혔다.
“언제 봐도 멋진 광경입니다.”
기사가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감탄했다. 그동안 르누아르는
지하 계단 앞에 꽂혀 있는 단 하나의 칼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칼도원래 두개였지.”
“예. 그건 잘 압니다. 하나는 이미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사의 말을 홀려들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텅 빈 북쪽 궁
안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저 지하 동굴 안에
자리한 티텐의 정수만이 활활 타오르며 이 땅을 둘러쌀 뿐.
“ 나와라.”
새로운 왕이 명령하자마자 북쪽 궁 내부에 내어진 문이 열리며
신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습을 감춘
이들은 허리 숙여 예를 표한 후 다시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됐지? 오늘이 약속한 날이었을 텐데.”
“이미 하산하였습니다.”
“……그래. 뭐. 어차피 얼굴 마주한다고 좋을 것 없으니
잘되었어.”
그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으나 분명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 하던가? 아무 말도 않던가?”
그가 속마음을 은근히 내비치자 신관 중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무 말도.”
감정 한 자락 묻어 나오지 않는 무덤덤한 어투였다.
“대신. 왕께서 가져오신 두 자루의 검을 소중히 받아
들었습니다.”
두 자루의 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모든 피를 씻어
내리려는 듯 처절하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차갑게 식어 가던
시신들. 주군을 향한 충성심을 내보이며 죽어서도 꽉 말아 쥔
검을 놓지 않던 두 남자.
그들의 검을 직접 가져온 것은 어찌 보면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잘했다 싶은 일 중 하나였다.
끝끝내 소중히 감싸 안았다니. 다행이었다.
“그것 역시 이제 돌려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가지고 왔지.”
왕이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춤에 찬 칼을 풀어 보였다. 언젠가.
누군가의 배를 찢었던 칼날에는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 누구도 베지 않은 듯이.
“직접 꽂겠어.”
“그리하시지요.”
르누아르는 신관들을 뒤로하고 지하 동굴 앞으로 다가섰다.
홀로 꽂혀 있는 검의 반대편에 칼날이 들어갈 홈이 패어져
있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미련 없이 칼을 제자리에
꽂았다.
부드럽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 칼은 홈에 꼭 들어맞았다.
드디어 비어 있던 조각이 채워져 완전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기사는 홀로 고개를 갸웃했다.
“헌데 이 검은 대체 무슨 검입니까? 뭐길래 다들 이리 삼엄한
눈으로……”
“용기를 먹고. 희생을 뱉는 검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관의 대답에 기사는 합죽이마냥 입을 꾹 다물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이 조금 나와 있었다. 왕은 그것을 모른
척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어. 그렇지?”
“그렇습니다. 티텐은 이로써 완전히 부활했습니다.”
“처음부터 티텐을 지키는 것은 성벽이 아니었다. 고작
성벽이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문 앞에 선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관들도, 기사도
이 순간만큼은 이어질 말을 기대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식한 방패 따위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쌓아 올린 성벽도 아니다. 용기와
희생뿐이지.”
그리고 그것을 일깨워 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티텐을 깨부순
이국의 침략자와 나라를 배반한 마녀였다. 남자는 군말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어느새 푸르른 하늘에는 새벽별이 영롱하다.
“가자. 오늘도 집무가 많던데.’,
“예!’’
뒷머리를 긁적이던 기사는 어수룩한 모양새로 앞서가는 이를
향해 뛰었다. 두 사람이 검은 숲속으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신관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자를 살려 두신 것이지요? 진정 죽일 수도 있었잖습니까.
어째서 번거로운 일을 하신 겁니까?”
“너는 너무 말이 많아. 호기심은 말할 것도 없고.”
“저는 정말 걱정되어 그럽니다. 혹시 반란 종자가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남자가?”
르누아르는 한쪽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려 보였다. 곧 일자로
다물린 입술 사이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글쎄다.”
“무, 물론 르누아르 님을 못 믿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르누아르 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입니다.”
기사가 옆에서 무어라 지껄이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전한, 그리고 아주 조금은 그리운 얼굴을 한 채로.
“지금쯤은 도착하지 않았을까. 부디 늦지 않았기를.”
“침략자의 말은 믿을 게 못 됩니다!”
감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기사 놈이 주제도 잊고 불뚝 성질을
냈다.
“시끄러우니 짹짹거리지 마라.”
“짹짹이라요!”
그는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듯 손을 내저으며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기사는 부루퉁한 얼굴로 남몰래 욕을 뇌까리다 헐레벌떡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