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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08화 (108/113)

108화

‘예,아버지.’

구역질이 치민다.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못했으나 공포는

느꼈다. 죽음이 코앞에 온 것이다. 나를 저주하는 내 피붙이가 내

목숨을 거두려 직접 은 거야.

“꺼져, 꺼져라!”

아무리 외쳐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훌쩍 다가오는

여자의 인영은 그날처럼 처참했다. 살점이 너덜너덜하고 눈은

파먹혔으며 입은 찢어져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움튼 채였다.

“아아……”

그것을 코앞에서 마주 본 아브타크는 혼절할 듯 신음하다가 곧

가슴께를 틀어쥐고 컥컥 기침을 해 댔다. 질질 흐른 침으로

입가가 범벅이었으나 그는 대강 그것을 훑어 낸 후 얼굴을

가렸다.

곪을 대로 곪아 터져 버린, 끔찍한 비린내가 내게서 흐른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흐린 눈을 했다. 힘을 쭉 뺀 채로

한참을 늘어져 있었다. 닿지 못하는 피붙이를 그리 마주하던

남자는 이내 가슴팍을 더듬어 지니고 다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손끝만 가져다 대도 베일 듯. 잔뜩 날이 선 칼을.

그것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맞잡은 아브타크는 날을 돌려 제

목을 겨누었다. 여전히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라티아는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을 내밀어 단도를 쥔 손등을 감싸 주었다.

덕분에 차마 찌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손의 떨림이 멎는다.

라티아, 아니 귀신이 헤벌쭉 웃더니 손을 천천히 밀어붙였다.

잔뜩 벼려진 칼날이 살점을 가르고 목젖을 헤집고, 목구멍을

찢는 감각이 선연하다. 아브타크는 눈을 들어 올려 피눈물을

흘리는 귀신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끝까지 그녀를 노려보았다. 원망과 질책만을 담은 채로.

어떤 반성도 하지 않은 채로. 끝까지 그답게 죽어 갔다.

한편, 시프나드는 처형장을 뒤로한 채 아브타크의 뒤를 쫓아

달렸다. 그가 정확히 어디로 도망갈지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어렴풋이 알 것 같긴 했다. 아브타크의 성격상 그는 도망이

아니라, 자신의 최후를 감추려 드는 것일 테니.

시프나드는 욕망의 최정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늘상

아래서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적나라한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본궁. 이곳의 가장 중심에는

알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현실 안에서 번쩍이는

권력의 정점. 오로지 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황좌.

그는 반쯤 열려 있는 황금문을 조심스레 밀어 보았다. 틈이

벌어지고, 어둠에 감싸인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 사이로

시프나드는 발을 들였다. 황좌 양쪽에서 타오르는 토치가

아니었다면, 그를 볼 수 없었으리라.

황좌에 앉은 남자의 눈에 자신은 비치지 않는 듯했다. 무얼

보는지는 몰라도 잔뜩 구겨진 미간 하며.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보아하니 족히 끔찍한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시프나드는 칼을 들었던 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는 한결

가라앉은 눈으로 아브타크의 마지 막을 관망했다.

“ 라티아.”

아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을 그가 내뱉는다. 단도를 꺼내 든

팔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내던지고 싶은

표정을 한 주제에 꿋꿋이 말아 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남자는 피식거리다가 아주 느릿하게, 고통을

놓치지 않으려 칼날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신음 한 번 내지르지

않은 채 그는 곧 툭. 손을 떨구었다.

피 묻은 손이 늘어지고. 단도가 박힌 목덜미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와 앞섶을 적신다. 눈을 치뜬 채 죽음을 맞이한 남자를

올려다보던 시프나드는 비극에 박수 칠 수 없었다.

모든 일의 근원인 고위 귀족이 도망치자 황제는 칼을 고쳐 잡은

뒤 그를 따랐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이 팰 만큼 비가

쏟아져 내렸다.

멀거니 서 있던 열댓 명의 독립군들은 발치에 쓰러진 남자를

처치 곤란한 표정으로 훑었다.

“어찌할까요?”

“어찌하기는. 우리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티텐으로 돌아가는겁니까?”

“그래, 돌아가야지.”

르누아르는 품속에 소중히 접어 놓은 독립 문서를 매만졌다.

이것 하나를 얻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거 아닌가. 세상에 흠결 없는 이는 없으니. 모두가

죄를 짊어진 채 살아간다.

“ 마녀는?”

“약조한 대로 먼저 티텐에 닿을 것입니다.”

“ 그렇군.”

르누아르는 히폴로테스를 보며 복잡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삶을 위해 죄를 지을 때는 언제고. 사랑이 뭐라고, 그토록 힘겹게

지켜 온 목숨까지 바친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를 거둬라. 함께 간다.”

그는 명령을 남긴 후 히폴로테스를 뒤로했다. 굴러다니는 시신

사이로 듬성듬성 걸음을 옮기는데 익숙한 시체도 보였다.

히폴로테스를 곁에서 모시던 검은 머리의 기사였다.

결국 죽음을 맞았나. 잠든 것처럼 늘어진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끝까지 칼을 놓지 않은 남자 또한 보였다. 매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남자였다.

독립군을 위해. 아니 여자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건 반란군은

절멸이었다. 쓴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먹먹한 가슴을 모른

체하며 휙.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어 섰다. 고민하던 수장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 제논과 데몰레온에게 다가갔다. 빗물에 식어 버린

사체가 꼭 붙들고 있는 검을 챙겨 든 후에야 그는 허리를 쭉 폈다.

조금이나마 가뿐한 마음이 들었다.

“다 챙겼습니다!”

“좋아. 티텐으로 돌아가자.”

남자는 약속을 지켰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겠다는 약속을.

[마녀가 죽었다.]

마녀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다. 백성들은 진심으로 그리

느꼈다. 실제로 마녀의 숙청이 거행된 날 이후, 고인 물 같던

귀족들 대신 능력 있는 젊은 귀족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그들은

열정을 쏟아 국정 운영에 힘을 보탰으니까.

황제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썩어 빠진 규율을 마구 뜯어냈다. 그 덕을 톡톡히

본 사람들을 기뻐 어깨춤을 출 정도였다. 그만큼 제국은 순조롭게

돌아갔다.

피의 숙청이 자행된 날로부터 딱 삼 년.

삼 년 만에 와스터 제국은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간 것은 영광뿐이 아니었다. 티텐 또한 독립 삼

년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티텐의 독립에 항변하던 이들이

많았으나, 그들이 해적을 소탕하고. 황제에게 힘을 보태 숙청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무엇보다 반란군과 마녀를 처형했다는

황제의 선언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우호적인 분위기가 흘러 이런저런 교역까지

이어 가고 있었다. 폐쇄적인 티텐이 가진 신묘한 교역품에

와스터는 눈독을 들였다. 티텐도 와스터로부터 자금을 뜯어낼 수

있으니 상부상조였다.

와스터 제국의 황제 시프나드는 날이 갈수록 백성들에게

존경받았으며, 거침없는 국정 운영으로 귀족들의 애정까지

두둑이 받아 챙겼다.

그동안 티텐은 줄어든 인구를 메우기 위해 바다를 떠도는

해적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힘써 영토를 복원한

이후에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티텐의 재건에 앞장서고, 성검으로 마녀를 직접 처단했다는

남자는 그렇게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잔악무도한 황제는 가고, 악랄한 마녀는 죽었다.]

[와스터는 부흥했고, 티텐은 부활했다.]

그 노랫말은 구전되어 두 나라에 오래오래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오늘은 그것을 기리는 축제 날이었다. 매년 열리는 독립

기념 축제는 온몸을 불태워 빛을 내는 별처럼 늘화려했고, 혼을

쏙 빼놓을 만큼 황홀했다. 마타리는 이름 모를 이와 어깨를

부딪치고 미간을 구겼다.

옆에 선 여자는 몇 번째인지 모를 탄성을 내뱉으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다. 마타리 역시 길에

줄줄이 늘어선 붉은 등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티텐은 성벽이 무너지고 난 자리에 마을을 세웠고 항구를

만들어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추진해 나갔다. 티텐은 개방적이고

활기 어린 나라로 매일 새롭게 변해 가고 있었다.

항구 마을은 따지고 보면 왕성과 멀리 떨어진 데다가 무너진

성벽이 있던 자리이니 꺼림칙해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새로이 주목받고 있었다.

바다와 인접해 상인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으며 덕분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생소한 물건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큰 대로에 빼곡히 자리 잡은 가판과 번듯한 상점들.

골목골목마다 나다니는 사치스러운 차림새의 사람들과

번들번들한 얼굴로 사람들을 꾀는 장사치. 풋풋한 미소를 머금은

남녀들까지. 다들 한껏 달아올라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여인들이 내뿜는 꽃향기 위로 이름 모를 악사들의 리라 선율이

곁들어진다. 부드럽고 농염한 음률은 마음을 녹이고 귓가를

즐겁게 했다.

“정신 차려요. 또 길 잃으려고 그러죠.”

“미안해요. 언제 봐도 참 멋진 풍경이라.”

에즈라는 퉁명스러운 경고에도 반짝거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흘렸다.

“벌써 삼년이나 흘렀네요.”

“뭐,그렇네요.”

마타리는 두 손 가득 짐을 든 에즈라를 곁눈질했다. 똑.

에즈라의 눈가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럴 것이다. 여자는 언제부턴가 습관처럼

웃기만 했으니까.

“와! 이거 마타리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말을 돌리려 수법을 쓰려는 모양이다. 에즈라는 가판 위에

가지런히 놓인 머리꽂이를 보며 눈을 반짝 빚냈다. 등불이 비추는

얼굴이 환했다.

“진심이에요? 저는 이런화려한 거 안 어울려요.”

“무슨 소리예요!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게 퍽 단호하다. 마타리는

에즈라가 내민 머리꽂이를 가까이서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거 도금이잖아요. 저는 진짜 금 아니면 싫어요.”

“……마타리 답네요.”

“그거 무슨 뜻이에요?”

토라진 어조로 중얼거리자 마타리는 툭, 어깨를 쳤다. 무뚝뚝한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은 결국 킥킥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어서 가요. 독립 기념 행진을 놓칠 수는 없잖아요!”

에즈라는 마타리의 손을 붙잡고 앞서 나갔다. 사람이 북적이는

대로를 함께 걷던 에즈라는 번성한 티텐을 둘러보다가 망연히

상념에 빠져들었다.

정확히 삼 년 전 그 날, 눈을 떴을 때 마주해야 했던 지독한

현실. 독립군의 배를 타고 티텐으로 돌아온 에즈라는 처음으로

해변에 발을 디뎠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정박되어 있는 여러 척의

배. 에즈라를 못 본 체하며 멀어져 가는 독립군까지.

주위를 그저 둘러보며 적응하지 못하고 덜떨어진 사람처럼

굳어 서 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되게……오랜만이네요.’

마타리였다. 돌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잡을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마타리는

피에 젖은 손을 겹치자마자 꽉 감싸 안아 주었더랬다.

‘잘 왔어요.’

아직 무너진 성벽의 잔해가 남아 있던 그곳에서 잔인한 진실을

견뎌내야 했다.

‘독립군에게 연통을 받았어요. 당신이 티텐으로 돌아올

거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부탁한 이가

누구인지는.

‘물론 히폴로테스. 그 남자가 내민 조건 중 하나였겠죠.’

무너져 내리던 내게 마타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무조건 살아가요.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 준 삶이잖아요.’

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에즈라는 고운 모래알을 두 손 가득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 찾아갈게.’

그가 분명 그리 말했으니까. 나를 찾아오겠다고. 언젠가는

내게 돌아오겠다고.

‘꼭 갈게.,

그래. 나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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