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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07화 (107/113)

107화

그가 턱짓하며 제법 황제답게 굴었다. 그를 빤히 훑어보던

히폴로테스는 한순간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망토가 휘날렸다. 성한 곳 없이 곳곳이 피범벅인 남자는

끝까지 검을 놓지 않는다.

시프나드가 눈살을 좁히던 그때,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가

달려들었다. 시프나드는 절로 몸을 뒤로 물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들이닥치는 바람처럼 코앞에 다가온 남자가 칼을 들어 제

얼굴을 노린다.

늦었다 싶었지만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챙.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날붙이에 쩌적 금이 갔다. 갈라진

칼날을 슬쩍 살펴본 히폴로테스는 공포가 묻어 나오는

시프나드의 눈동자를 헤집다가 더없이 오만한 미소를 띠었다.

“이것 봐. 너는 나한테 안 돼.”

자존심을 사정없이 할퀴는 말. 시프나드는 분노에 뺨을

실룩였다. 여전히 황금 의자 등받이에 꽂아 넣은 칼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의자는 살짝 생채기가 났을 뿐. 여전히 건재했다.

“웃기는군!”

시프나드는 주먹으로 히폴로테스의 명치를 올려 쳤다. 윽, 그가

잠시 물러난 틈을 시프나드는 놓치지 않았다. 히폴로테스는

부러진 칼을 휘두르려 했으나 이번에는 시프나드가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선 후 발로 히폴로테스의 배를

걷어찼다.

아무리 용써 봐도 이미 탈진하고도 남았을 상태인 남자가

건장한 체격의 시프나드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히폴로테스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반

바퀴 굴러 멀어지려 했으나 시프나드가 잽싸게 어깨를 걷어찬

탓에 무용해졌다.

“으윽!”

“어깨뼈도 부러진 듯한데. 완전히 망가뜨려 줄까?”

시프나드가 어깨를 짓밟은 발을 옮겨 목 부근을 콱 짓눌렀다.

고여 있던 핏물이 입가를 타고 흘러나온다. 그 꼴을 보며

시프나드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몸부림치는 여자를 무시한 채로. 그는

지금 이 상황만큼은 즐겼다.

“ 폐하!”

허나 그것도 잠시. 시프나드는 귀족들의 부름에 처형장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독립군들은 귀족들을 둘러싼 채

창칼로 위협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아브타크가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살수들을 찾았으나 이미 반란군과 독립군에게 당해 전멸한

상태였다.

눈 깜짝할 새 두 군사는 황성을 장악한 것이다. 수많은 희생을

낳은 것인지 처형장과 안뜰은 온통 식어 가는 시체 천지였다.

“네가 원한 게 이건가?”

“에즈라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으니까.”

“ 명분은?”

차분한 물음에 기회를 엿보던 히폴로테스는 잽싸게 반 토막 난

검으로 시프나드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윽.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그가 주춤한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멀리 도망갈 줄 알았건만. 검을 휘둘러 그로부터 벗어난

히폴로테스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뭐 하는 거지?’’

“네가 원하는…… 명분을 주려고.”

나지막한 목소리 뒤로 그는 후련한 얼굴을 했다. 정면으로

마주한 남자 뒤로 남아 있던 독립군이 모여드는 게 배경처럼

보였다. 금세 그를 둘러싼 독립군은 히폴로테스의 오금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무릎을 꿇은 히폴로테스를 짐시 훑던 르누아르는 이내 결연히

외쳤다.

“와스터 제국의 황제에게 티텐은 독립을 요구한다!”

“ 싫다면?”

“귀족들을 베겠다.”

“그거 좋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사, 살려 주십시오!’,

간절한 외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르누아르가

손짓하자 그들을 둘러싼 병사들이 귀족 몇몇을 본보기로 베었다.

난리를 치며 이리저리 도망갈 궁리를 하던 귀족들은 곧 차례대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살려주십시오 제발……:"

남은 귀족 하나가 바닥을 기며 애걸했으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까드득, 목뼈가 아스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시프나드는 홉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하지. 꼴보기 싫은 놈들은 거의 다 죽은 터라.”

“아직 한명이 남았다.”

수십 명에 달하던 귀족들은 모두 독립군의 손에 낙엽처럼

스러졌다. 무더기로 쌓인 시체 중심에는 단 한 명의 귀족만이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시프나드는 창백해진 아브타크를 흘깃거리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놈은 내가 죽일 거니까 신경 꺼.”

시프나드는 들고 있던 검을 이리저리 돌려 보였다. 태연자약한

황제는 이내 딱딱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명분은?”

“독립군은…… 와스터를 대신해 반란군을 처형한다.”

그 순간, 꿇어앉아 있던 히폴로테스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죄인이 된 남자의 옆을 지키던 독립군이 창을 가까이

들이밀던 그때였다.

“안돼!”

귀를 찢을 듯한 가냘픈 목소리였다. 끝이 마구잡이로 갈라진

절규는 처절하다. 울음이 잔뜩 묻은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여자는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절박하게 내지르고 또 빌었다.

“제발 놔줘…… 그 사람 반란군 아니야!”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악을 썼다.

“아니란 말이야! 반란군 아니야! 나를, 마녀인 나를 죽이러 온

거야! 반란군 아니야!”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 몸부림쳤으나 이미 독립군에게

사로잡혀 꽁꽁 결박당한 상태였다. 갈 수 없는 걸 아는데도

온몸이 너무 뜨거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눈물로 범벅된

눈가가 쓰라리고 시야는 흐렸다.

그렇지만 나는 알 수 있어. 당신이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그리고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죽이지 마! 제발 죽이지 마!,’

이렇게 자비를 구하며 비는 것 말고는 없다.

“……살려 주세요.”

속상해. 끝까지 힘없는 내가 너무 싫고 밉다.

이기적이지만…… 나는 당신의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살려 달라고!”

결국 바닥에 이마를 댄 채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허나

짐승의 애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덧없는 외침으로 사라질

“언제까지 질질 끌 거야.”

시프나드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늘진

남자의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했다. 믿을 수 없게도 붉은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성한 곳 없는 몸을

훑어보았다. 어차피 이런 몸으로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빨리 끝내.”

시프나드는 여전히 소리 내어 우는 에즈라를 외면하며

르누아르가 건넨 양피지를 받았다. 히폴로테스의 어깨를

짓누르던 발을 거둔 두I 단도로 제 손바닥을 살짝 그었다.

황제의 피가 묻은 손을 들어 보인 그는 양피지를 펼쳐 보였다.

시체가 널린 뜰에는 피와 뇌수. 터져 버린 장기들이 나뒹굴고

듬성듬성 피어오르는 불꽃 탓에 매운 연기가 작렬했다.

그 중심에 서서 시프나드는 어느 때보다 위엄 있는 목소리로

일렀다.

“와스터 제국의 황제 시프나드. 티텐 왕국의 독립을 허한다.”

단호한 한마디 말은 짧지만 커다란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황제의 이름으로.”

피 묻은 손을 들어 보인 시프나드는 맹세하며 양피지에

손바닥을 눌렀다. 선명하게 직인이 찍힌 독립 문서로 감격한

눈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윽고,

“ 와아아!”

독립군의 환호가 기쁨에 흘러넘쳐 지옥을 메웠다. 함께 싸운

몇몇 병사들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들이

환희에 심취해 있는 동안 목 닦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브타크는 모든 희망을 잃고 그 자리에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독립군의 환호성이 멎어 갈 즈음, 르누아르는 히폴로테스의

뒤로 버티고 섰다. 그것이 무언의 신호인 듯 남은 독립군들은

행렬을 맞춰 성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에즈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에게 휘둘려 성문 쪽으로

끌려갔다. 죽이지 않는다. 나는 마녀인데. 죽어 마땅한

마녀라면서…… 나를 죽이지 않아. 뒤늦게 모든 것을 파악한

에즈라는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히폴로테스!”

몇 번이고 그를 불렀다. 목이 터져라 부르고. 완전히 쉬어

쇳소리가 날 때까지 불렀다. 하지만 당신은 한 번을 돌아봐 주지

않아.

“나, 나좀 봐줘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 마지막이라면,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 나를 봐 줄 수도 있잖아.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요. 한 번만, 제발 살려 주세요.”

에즈라를 지키고 서 있던 독립군은 마지막 중얼거림에 몸을

움찔했다. 나라를 멸망시킨 마녀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여린 등을 들썩이며 울듯 웃어 댔다.

“정말 단 한 번을 허락하지 않아. 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가, 내가 바란 거 하나뿐인데. 딱 하나뿐인데.’’

평범하게 당신을 사랑하는 것. 남들 하는 사랑처럼 그렇게

사랑해 보는 거 하나인데.

“ 너무해.”

병사는 탈진한 듯 비틀거리는 여자를 부축했다. 중대한 일만

남아서일까. 주변은 곧 적막에 휩싸였다. 그 불안을 읽기라도 한

듯 여자는 흐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즈라.’

가슴속에서 그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데 문득 그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주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에즈라가 막 손을 뻗은 그때. 히폴로테스는 입

모양으로 참아 왔던 말을 건넸다.

‘ 찾아갈게.’

지키지 못할. 하얀 거짓말을.

‘꼭 갈게.’

그 말을 끝으로 나와 달리 그는 너무도 편안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나는, 나는 찡그린 채 울고 있는데. 나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데…… 도저히 그게 안 돼.

매순간이 너무 느렸다. 잡아끄는 손길에 성문을 넘고, 아무리

손을 뻗고 휘저어도 두 번 다시 닿지 못했다. 성문은 야속하게도

닫혀 점점 좁아져만 간다. 틈새로 보이는 남자의 마지막을 손

놓고 볼 수밖에 없어.

“아아……”

에즈라는 입을 꽉 틀어막았다. 입술을 깨물고 우는데도

르누아르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검올

사랑하는 이의 복부에 무자비하게 꽂아 넣었다. 푹. 배를 관통한

검 끝이 너무도 잘 보였다.

칼이 뚫고 나온 부근이 피로 젖어 든다. 그것이 끝이었다. 소름

끼치는 소음을 내며 닫혀 버린 성문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성문은 위용을 자랑했다.

에즈라는 눈을 감았다. 모든 걸 외면하려. 이것은 꿈일

뿐이라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아브타크는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볼품없이 기었다. 뛰다가

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기다가 다시 일어서서 그곳을

찾아 헤맸다.

얼마 전. 공허한 가슴속을 막아 줄 무언가를 기대하던 그는

킬킬 웃음을 흘리며 알현실로 구르듯 숨어들었다. 머리가 복잡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목숨을 담보로 끝끝내 승기를 거머쥔

남자를 떠올리던 그는 분노에 혀를 씹었다. 내게는…… 그럴

용기가 없으니까.

눈을 들어 황금 의자를 올려다보던 그는 황제의 길을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아아, 뚫린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바닥이 없던 것뿐. 욕망은.

추잡한 인간에게 끝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움켜쥐어도

만족할 줄 모르고. 충족감도 느끼지 못하는 거야.

허나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황금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었다. 텅 비어 버린

알현실을 채울 머리들은 이미 밖에서 차가운 시체로 썩어 갈

테니. 이곳에는 저 말고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이다. 이토록.

이렇게나 무쓸모한 것이 또 있을까.

부정하고 싶다. 이 너절한 말로가 내 것이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크게 소리 내어 웃자 서늘함이 흐르는 알현실에서 비웃음만

되돌아온다.

“ 라티아.”

문득 아브타크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닫혀 있는

알현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발을 들였으니까. 알 수 있었다. 저

우아한 몸가짐과 고상한 걸음걸이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네게

요구한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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