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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106화 (106/113)

106화

한 귀족이 비명처럼 내지르며 펄쩍 뛰자 파도 타듯 주변의

귀족들은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문제가

생겼다면서 황궁 기사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황제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에즈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상하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지는 그림자를 알 것 같다니. 문틈 새로 새어 들어오는 소란이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했다.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바닥이 팰 만큼 주먹을 말아

쥐었으나 불안은 자꾸만 눈덩이처럼 불어만 간다. 당신이

아니기를 바라며, 부정하려. 외면하려 질끈 눈을 감은 에즈라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웅성거리던 사위가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헐떡이는 여자의

울음소리와 끊겨 가는 남자의 숨결이 크게 들릴 만큼이나.

그는 끊임없이 휘두르던 칼끝을 바닥에 꽂아 넣은 채 몸을

지탱했다. 다리가 꺾이고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 보아도 시야는 흐리기만 했다. 온몸은

무겁고 자꾸만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등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덮쳐 왔다.

결국 무릎을 꿇은 히폴로테스는 끝까지 검만은 놓지 않았다. 푹

숙인 고개 아래로 피가 방울져 떨어진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험한 발길로 에즈라의 등을

즈려 밟았다.

“……에즈라!”

끓어오르는 부름에 저 멀리 웅크린 여자가 몸을 움찔거린다.

환영일 것이다. 환청이여야만 한다. 처형장에 꿇어앉은 에즈라는

그럴 리 없다 외면하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기대 때문에.

감았던 눈을 뜬 에즈라는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는 붉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금방이라도 타들어 갈 듯 빛나는 태양 같은

눈동자를.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상태인 남자는 서 있기도 벅차

보였다. 또다시 피를 왈칵 뱉어 낸 후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다.

피투성이 손에 묶인 뉙스. 그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마주한

에즈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소리 없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대도, 모든 걸 걸어서라도 지켜 주겠다고.

그냥 그럴 수 있게 해 달라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진심을 느끼며 에즈라는 전하고 싶은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 왔냐고. 너무 기다렸다고. 나는 여기서…… 어제의

당신도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충격의 도가니에 허덕이던 귀족들은 이내 꺅, 소리를 내지르며

혼비백산했다. 성 안으로 처 들어온 전대 황제. 그것도

피투성이가 된 채라니. 심지어 그에게서는 당장이라도 저 검을

들어 올려 모두를 썰어 버릴 듯한 살기가 흘렀다.

“도,도망가!”

“무슨 소리야. 여기 있어! 어차피 한 명일 뿐이라고!”

“장난하나. 저 한 명 이 누군 줄 알고!”

저들끼리 뭉쳐 있던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처형장을 벗어나 성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으나 끝내 그리할 수는 없었다.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않는 황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전투 불능

상태로 보이는 히폴로테스 때문이었다.

“다들 이러지 말고 잘 보시게. 서 있기도 벅찬 상태야.

우리에게 해를 가할 수 없을 걸세.”

“그야그렇지만……”

나이 든 귀족이 불안해하는 이들을 달래 가며 평정을 요구했다.

그들은 곧장 높은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시프나드를 구원자 보듯

간절한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허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마녀의 사형을 집행하라.”

“예!”

“아,안됩니다!”

귀족들은 시프나드의 명령에 대놓고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떨어 댔다. 그러든 말든 기사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에즈라의

등을 더욱 힘주어 내리눌렀다. 윽, 얕은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오자 기사는 오히려 킬킬 웃음을 흘렸다.

“와스터에게 위협을 가한 죄로 너를 처단한다.”

그 말을 끝으로 기사가 들고 있던 칼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하지만 끝내 그것을 내리치지는 못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검이 정확히 기사의 가슴팍을 꿰뚫었으니까.

어찌나 무지막지한 완력인지 살이 찢기고 복장뼈가 부러지는

살벌한 소음이 침묵 속에 울려 퍼졌다.

귀족들은 펄쩍 뛰며 비명을 질러 댔다. 칼이 꽂힌 가슴팍을

더듬거리던 기사는 후두둑 핏덩이를 뱉어 내더니 바닥에

어푸러졌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결국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오줌을 지렸다.

에즈라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려 옆에 고꾸라진 시체를

보았다. 정확히 심장을 관통한 무도한 검. 그녀는 시선을 옮겨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 이런……폐 폐하지금이제 어, 어떻게.”

“바, 반란입니다! 폐하! 반란입니다.”

그나마 정신이 남아 있는 이들이 울고불고 매달리는 동안

아브타크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발끝을 오므렸다 폈다 했다.

미칠 듯한 초조함이 일었다. 계획이 비틀어지고 있었으니까.

분명히 지금쯤이면 황성 안에 숨겨 놓은 사병들이 달려와

저놈을 둘러싸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 늦고 있었다. 오히려 성

밖의 소란이 적나라하게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제 사병들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설마……:

그는 지옥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히폴로테스를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성 밖에 제 모든 병력이 집중된 게

분명하다. 그것을 위해 저놈이 최소한의 병력으로 성문을 향해

진격한 것이겠지.

히폴로테스는 볼만한 아브타크의 허여멀건 얼굴을 즐기다가

또다시 울컥 터져 나오는 피를 힘겹게 삼켰다. 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에즈라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닿기까지 딱 열 발자국을 남겨 놓은 그때였다.

철 갑옷이 부딪치는 소음들과 함께 황궁 뒤편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황궁 병사로 위장한 아브타크의 살수들이었다.

“사,살았다.”

어떤 귀족이 그리 속삭이는 게 들렸다. 히폴로테스는 사방을

둘러싼 살수들을 보며 턱이 불거질 만큼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한결같이 닿아 오는 애절한 눈길을 모른 척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칼도 없는 주제에 맨몸으로 덤비겠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게 어떤가.”

이름 모를 살수의 조롱 어린 비아냥이 들려왔다.

“그럼 내가 불쌍히 여겨 목숨이라도 살려 줄지 모르잖아.”

말이 끝나자마자 살수는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에즈라가 꽁꽁 묶인 몸으로 처절하게 몸부림쳤으나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천으로 입이 틀어막힌 여자는 그의 이름조차

마음껏 부를 수 없었다.

“으읍!”

눈물범벅인 뺨을 바닥에 비비며 애처롭게 빌었다. 제발 그를

죽이지 말라고. 내게 남은 단 한 가지를 빼앗아 가지 말라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울었지만 그 누구도 제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히폴로테스는 빈틈을 노리는 검을 재빠른 몸짓으로 피한 뒤.

급소를 노려 주먹을 갈겼으나 그것도 몇 번뿐. 수십 명의

병사들이 작정하고 달려들자 무기 하나 없는 남자가 제압당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결국 바닥에 넘어진 히폴로테스의 가슴팍을 살수가 흙 묻은

발로 걷어차자 그는 또다시 피를 토했다.

“별거 아니군.”

“자기소개하나?”

히폴로테스가 약 올리듯 빈정거리자 살수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죽어라!”

그가 목을 겨누었던 칼을 치켜들고 막 내리찍으려던 찰나.

천둥이 치는 것만 같은 소음과 함께 땅이 잘게 진동했다.

이어지는 커다란 함성은 하늘을 메웠다.

“ 집중해야지.”

허공에서 멈춘 칼끝을 노려보던 히폴로테스는 숨겨 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어 기사의 아킬레스건을 뚝 끊어 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기사가 괴성을 지르며 달랑거리는 발목을 움켜쥐었다.

“으, 으으

몸을 일으킨 후 검을 뺏어 들어 달려드는 이들을 반 바퀴 돌아

베었다. 일도에 셋이 쓰러지고, 활짝 열린 성문을 넘어

독립군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황은 단번에 뒤집어졌다. 티텐의 독립군은 살수들을 종잇장

찢듯 갈라 버리며 가까이 진격해 왔고, 귀족들은 한구석에 똘똘

뭉쳐 잔뜩 웅크린 채 창칼을 피하려 했다.

여전히 시프나드는 황좌에 앉은 채 모든 아비규환을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뭉쳐 있는 귀족들 맨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아브타크가 고개 들어 그를 노려보았으나 시프나드는 그를 아예

모른 체했다.

오직, 절박하게 손을 뻗는 남자를 지켜볼 뿐.

“히폴로테스님!”

카코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히폴로테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열 걸음 남은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달려갔다.

꿈에서나마 그리던 사람. 그곳에서는 닿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 아이처럼 울고 있는 여자를 품 안 가득 끌어안은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눈앞이 아득해진다. 눈을 감고 잠시나마

에즈라를 느꼈다. 환상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그려만 보던 이가 아니다. 이제는 아니야.

현실로 닿아 오는 온기를 느끼면서도 에즈라는 그를 제대로

부여잡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싶다.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고 보고 싶었다고, 더 이상 떠나지 말라고 옷자락을

쥐어짜고도 싶었다. 하지만 상처가 벌어질까 두려워서……

제대로 된 말조차 내놓을 수가 없어.

그 마음을 알았는지 히폴로테스는 급히 팔다리를 묶은 밧줄을

단도로 잘라 낸 후, 재갈 역시 풀어 버렸다.

“왜,왜 왔어요.”

“ 미안해.”

“왜 이제야 왔어요.”

처음 뱉은 말이 투정이라니. 기다리지 않았다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어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기어코 터져 나오는 울음을

힘겹게 삼키자 히폴로테스는 대답 대신 떨리는 어깨를 더욱 감싸

안아주었다.

그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에즈라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며 뺨에 입맞춤을 쏟아붓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독립군과 아브타크의 살수들이 사방에서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다.

새카만 하늘 아래, 시뻘건 횃불이 여기저기에서 타오르고

바닥으로 퍼져 나가는 불꽃 또한 적지 않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에즈라를 지키려 온몸으로 감싸 안는데

마침 카코스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히폴로테스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됐으니 에즈라를 지켜.”

히폴로테스는 그리 명령한 후 칼을 들고 일어섰다. 에즈라는

그의 손에 묶여 팔랑이는 뉙스를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의

팔을 덥석 잡으려 했다. 카코스가 막아서지만 않았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이거, 이거 놔주세요.”

“지키라 명받았습니다. 그러니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저것

역시 히폴로테스 님의 뜻이고, 하셔야 할 일입니다.”

“아직 제대로 마, 말도 못 했단 말이에요.”

“진정하십시오.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그리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자신 없는 목소리를 티 내지 않으려 짐짓 턱을 치켜들었다.

그는 제 곁에 멀거니 서 있는 여자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면서도

멀어져 가는 주군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히폴로테스는 칼을 질질 끌며 시프나드에게 다가갔다. 그가

황좌로 이어진 길 중심에 설 때까지도 시프나드는 시종일관

여유로움을 연기했다.

“내려올래, 아님 내가갈까.”

“오랜만에 이리 와보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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