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알지 못하는 이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그것들은 한
귀로 흘려 넘기며 히폴로테스는 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가
더욱 박차를 가하자 전차는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대로를
가로질렀다.
“속도를 줄여라!”
멀지 않은 곳에 성문이 있었다. 맨 앞에서 병사들을 이끌던
히폴로테스는 유려하게 전차를 멈춰 세웠다. 그가 직접 성문
가까이 걸어가자 위병들은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그를 향해 창을
들이밀었다.
“네놈은 누, 누구냐! 반란군이냐!”
“그렇다면?”
병사는 남자의 의연한 태도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커다란 칼을
허리에 찬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가 이윽고 거추장스럽다는 듯 로브를 벗어 버리자 저물어 가는
태양 아래. 남자의 은발이 드러났다.
“내가 누군지는 봤으니 알겠고.”
은빛 머리칼과 황실 혈통만이 가질 수 있는 붉은 눈동자.
히폴로테스를 마주한 위병들은 곧 사색이 되었다. 히폴로테스
뒤로 그가 이끄는 수족들과 해적들이 줄줄이 모여들자 위병들은
엉거주춤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을 일으키러 왔다.”
“폐, 폐하……”
그의 신음 같은 부름에 남자는 응답하지 않았다. 히폴로테스는
점점 몰려드는 병사들을 관망했다. 정확히 말하면. 황궁 병사로
둔갑한 아브타크의 살수들을.
“너. 최대한 물러나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경고하며 칼을 빼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 또한 장검을
빼들고 그를 겨누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병사가 뒤늦게
뒷걸음질 쳤으나 그뿐. 가까이 서 있던 살수는 주저 않고 병사의
등을 베었다.
“으억 I”
히폴로테스는 제 앞에서 쓰러지는 병사를 냉혹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지독하게 무감한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빼 든
칼을 잡은 채. 뉙스를 꺼내 들었다.
“히폴로테스님.”
재촉하는 데몰레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오만한 웃음을
띠었다. 해져 버린 은빛 뉙스는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법하나
결코 끊기지 않았다. 그는 칼을 잡은 손을 뉙스로 꽁꽁 묶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힘주어 매듭을 지은 남자가 눈을 번뜩인 순간. 그는
칼을 반 바퀴 휘둘러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던 살수를 눈 깜짝할
새베어 버렸다.
살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시체가 되었다. 허공으로
피어오른 핏물이 목 부근을 적신다. 그는 뉙스와 하나 된 검을
아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래, 가자.”
그것이 시작이었다. 히폴로테스는 양쪽에서 달려드는 살수를
길게 칼을 휘둘러 일도에 넘어뜨렸다. 오직 앞만 보고 베었다.
뒤는 신임하는 이들에게 맡긴 채로.
성문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이들의 기합 소리와 신음성이 고요를 깨우고 발밑이 피로
질척거렸으나 멈출 수 없다.
이름 모를 이의 피를 뒤집어쓰며 그렇게 앞으로만 나아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애원.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흩뿌려지는 핏물.
피로 물들어 가는 뉙스를 보았다. 일순. 모든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달려드는 살수를 찢고. 파고드는 병사의 머리를
터뜨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칼날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도 멈출
수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그는 그렇게 몸부림 쳤다. 끝을
모르고 달려드는 생명을 부수며. 내가 만들어 낸 울부짖음을 모른
체하며.
“히폴로테스님!”
귀를 파고드는 비명에 급히 몸을 틀었지만 늦었다. 노련한
살수의 칼에 옆구리가 길게 베였다. 타는 듯한 작열감 뒤로 소름
끼치는 통증이 엄습했다. 물론 곧장 칼을 휘둘러 처리했지만
확실히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 젠장!”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데려온 해적들은 고작 서른 남짓.
살수들은 못해도 백은 되었다. 해적들은 한곳에 모여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고. 그나마 데몰레온과 제논이 뒤따르며
칼질을 해 댔다.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는 데몰레온의 것이었다. 창을 든
세 명의 병사들이 그의 배를 겨눈 채 진격하고 있었다. 겨우겨우
막아 냈으나 칼이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는지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감히 이 몸이 누군 줄 알고 달려들어! 이 개자식들!”
그가 창을 빼앗아 몰려드는 이들의 얼굴을 좌르륵 베어 냈다.
중간에서 히폴로테스와 데몰레온을 노리는 살수들을 처리해
나가던 제논 역시 파고드는 칼날을 막아 내려다 보니 등 뒤를
노리는 칼을 피하지 못했다.
제논이 신음 대신 움찔하며 상흔을 틀어막는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와 하나둘 도망가는 해적들까지. 둘러싸인
채로 전진해야 하다 보니 사방이 적이었다. 익히 예상했던 바지만
역시 실제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처참하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은 나아가야 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죽어 나가는 이들의 비명에
귀가 얼얼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주며 베고 또 베었다. 칼로 한
병사의 배를 쑤신 채 달려드는 또 다른 이의 배를 뚫어 버렸다.
급히 칼을 빼내 옆구리를 노리는 병사를 쳐 냈지만 어깨를
노리는 살수에게 팔뚝을 내주었다. 세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사병들은 득달같이 달려와 물어뜯는다. 수로 밀어붙이는
싸움. 길어지는 싸움에서 지는 것은…… 지치는 쪽이다.
“흣!”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고, 진격하던 속도는 점차 느려져만
갔다. 히폴로테스는 불붙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입
안을 씹었다.
베어 낸 만큼 베여서일까. 느려진 검과 그것을 휘두르기에 벅찬
상처투성이 팔뚝이 보였다.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모래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마 뉙스로 검을 묶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캑, 가슴 속에서 치미는 피를 뱉어 낸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비틀거리던 히폴로테스는 두 사람과 등을 맞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질척거리고 진득했다. 고약하고 비린
냄새는 눈앞을 흐리게 만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너희는?”
“멀쩡합니다. 그러니 가십시오.,’
히폴로테스는 쥐고 있던 칼에 본능적으로 힘을 주었다.
어렵사리 고개를 돌려 제논의 옆얼굴을 뭃어져라 응시했다.
“……뭐?”
“여기는 저희가 맡을 테니 먼저 가십시오. 성 안에도 병사가
많을 겁니다.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여기서 발이 묶이면 안
됩니다.”
동떨어진 제논의 대답에 머리가 멍했다.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으나 제논은 오직 앞만 바라보며
살수들을 노려볼 뿐. 죽어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분노로 눈앞이 붉어진 히폴로테스가 윽박지르려던 그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데몰레온이 크게 외쳤다.
“어서 가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막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아뇨. 그래야 합니다. 여기서 셋 다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가셔야 합니다. 가셔서…… ”
말끝은 떨리고 있었다. 살수를 향해 겨눴던 히폴로테스의 검
끝이 바닥을 향했다. 제논은 고개 돌려 그를 보았다. 무척 어설픈
미소를 품은 채로.
“하셔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히폴로테스 님께서 해 주셔야
할일이.”
한심한 몰골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제논은 조금
주저하다가 입을 뗐다.
"그때…… 찾아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그러니 찾으러
가시는 길 정도는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발 찾아주라.’
맞아, 에즈라를 잃어버렸던 그 날. 부모 잃은 어린아이처럼
무너진 내게 손을 뻗던 네 절망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너도
나만큼, 아니 나처럼 함께 괴로워했다는 걸. 왜 하필 지금.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데몰레온이 포효하듯 외치며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성질이
급한 그는 물러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물어뜯으려 이를
세우는 살수들을 거침없이 베어 버린 두I,부러 크게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히폴로테스님!’’
그 간절한 부름을 끝으로 히폴로테스는 다시금 앞을 향해 칼을
들었다. 가슴속에서 치미는 핏물을 삼키고 달아오르는 눈가를
모른 체했다. 분노로 떨려 오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는 발악하듯
눈앞의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나갔다. 오직 죽이고. 또
죽인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나는 여기서 멈출 수 없으니까.
죽음 앞에서 내지르는 아우성을 뒤로하며 그는 앞만 보고
내달렸다. 미치광이처럼 칼질을 해 대던 남자가 갑자기 막아 내는
것에 집중하며 질주하자 그 뒤를 따르려던 살수들은 달려드는
제논과 데몰레온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딜 내빼는 거냐! 네놈들의 상대는 우리다!”
데몰레온이 히폴로테스를 쫓으려는 살수의 척추를
으스러뜨리며 크게 외쳤다. 호쾌한 말과 달리 피가 끓는 목소리엔
고통이 어려 있었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히폴로테스를 지켜보던 제논은 등을
베이고 말았다. 데몰레온이 비틀거리는 제논을 부축하려 했으나
또 다른 살수 하나가 그의 허벅지에 창을 꽂아 넣었다.
“으아아!”
그럼에도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데몰레온은 끝까지 힘을
쥐어짜 싸워 나갔다. 제논도 흐린 시야를 깜빡이며 칼을
휘둘렀다. 그들이 반쯤 곤죽이 되어 있을 즈음, 히폴로테스는
드디어 성문을 눈앞에 두었다.
“ 하아.”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제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마저도 혈
향이 풍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건 남자를 앞에 둔
호위병들은 창을 고쳐 잡으며 눈물과 땀을 흘려 댔다.
“……비켜라!”
겁을 집어먹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호위병들은
히폴로테스의 사자후에 찔끔하며 흩어져 버렸다. 드디어 한 걸음
내디디려는데 끈질기게 쫓아온 살수들이 또다시 달려들었다.
“호”
허벅지가 두 번 베였으나 히폴로테스는 서늘한 얼굴을
고수했다. 검을 두 손으로 맞잡은 채 수평으로 그었다. 제대로
목이 터진 살수들이 뒤로 넘어가고 나서야 드디어 성문에 닿을 수
있었다.
피 묻은 손으로 성문을 밀어젖히려던 그 순간. 뒤에서 신호탄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몸을 바짝 굳혔다. 기다렸다는 듯 땅이
진동하고 커다란 함성이 하늘을 메웠다.
“ 젠장!”
장기를 끊어 낼 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며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힘 빠진 몸을 겨우 추스른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허공에 피어오른 붉은 연기와 더욱 선명해진 비린내. 창칼이
부딪치는 소음까지. 그 모든 것을 올려다보던 히폴로테스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편, 노을이 져 갈 무렵. 성문과 마주 보는 야트막한 안뜰에
마녀를 위한 처형장이 마련되었다. 흰색 두건을 머리에 쓴 마녀는
곧 자신의 목이 효수될 성문을 향한 채로 무릎을 꿇어앉았다.
보이지 않으니 들리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귀족들은 저번처럼 제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손가락질하고 있을
테고. 등 뒤로 내어진 길 끝에는 시프나드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것이다.
“두건을 벗겨라.”
“예.”
멀찍한 곳에서 시프나드의 명령이 들렸다. 옆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험한 손속으로 두건을 벗겨 내자 머리칼은 산발이 되었다.
고개를 내저어 시선을 바로 한 에즈라는 저 멀리 손바닥만 한
성문을 멍하니 보았다. 아주 높고 두터우며 무거운. 나는 죽어야
넘을수 있을 문을.
하늘은 넘어가는 해로 붉게 물들고. 산등성이는 이미 어둠에
잠겨 가고 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데 옆에 선 기사의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작은 중얼거림에 에즈라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던 그때.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연기가 치솟았다. 하늘로 뻗어
오른 붉은 연기가 흩어지더니 이윽고 묵직한 황금문이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서. 성 밖에 무슨 무,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