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주변이 너무도 익숙하다. 에즈라는 낡아 빠진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평생을 살아온 시린 돌탑. 그 방
안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께를 꾹 누르며
에즈라는 숨을 토해 냈다.
모든 건 꿈이었나. 미치도록 생생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도, 나를 둘러싼 폭풍 같던 일련의 일들도.
그냥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몰래, 더 이상 그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고 살다가 죽어 버렸더라면. 하지만
잔인하게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나타나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보며, 이것이 절대 현실일 리 없다고.
그날 당신은 왜 내게 손을 내밀었나. 버리고 놓을 거였으면서
왜, 왜 나를 붙들었나.
‘너를 사랑해.’
거짓을 속삭이는 따뜻한 눈은 과거와 닮았다.
‘사랑해서 그랬어.’
당신이 내게 사랑한다고 해서. 그래서 알았다. 이건 완벽한
꿈이라는 걸. 꿈속의 당신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니까.
꿈이니까 염치도 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내 멋대로 그 말을
듣고야 말아. 나는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계속 이 꿈을
반복해.
‘나도 사랑해요.’
웃으며 손 내미는 당신에게 차마 닿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목소리 따위는 나오지도 않지만. 가슴을 쥐어짜며 수도 없이
내질렀다. 그런데도 닿지 못해, 끝내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해.
“……울지 마.”
그리고 이렇게 눈을 떠. 눈물로 번진 시야 속에서 이 남자를
마주한다. 나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된 남자. 에즈라는 젖은 눈을
깜빡이며, 저처럼 우는 남자를 보았다. 매끈한 뺨에 튄 핏방울이
선명하다. 꿈에서 깨자 현실의 잔혹한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에즈라는 무거운 팔을 들어 올렸다. 가녀린 손끝이 눈가를
스치자 시프나드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엉망이 된 뺨을 감싼
여린 손. 엄지가 눈가를 느릿하게 쓸고 지나간다.
“피가 튀어서.”
거짓말. 흠뻑 젖은 눈가를 닦아 주며 여자는 또 헐떡였다.
그게 기쁘다면, 나는 나쁜 놈일까. 네가 나 때문에 우는 게
벅차다 말하면…… 너는 나를 미워할까.
정말 이 마음은 네게 못된 걸까.
“나 미워하지 마.”
에즈라는 피 홀리는 남자를 보며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나만큼 불쌍한 그를 가슴 가득 부둥켜안은 채 그렇게 오래도록
눈물 흘렸다.
황성 앞에서 시작된 농성은 벌써 수십 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니 황성도 입장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한결같이 에즈라의 처형을 요구해 온 귀족들로서는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성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이유로 귀족들은 제집처럼 황성을
드나들며 시프나드를 몰아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반강제적으로
귀족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시프나드 역시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바글바글 모여든 귀족들을
내려다보던 시프나드는 낯을 흐렸다.
“차일피일 미루실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원성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잠잠해지기는커녕 가면 갈수록 거세지기만 합니다.”
“네놈은 닥쳐라!”
그게 다 아브타크의 농탕질과 질 낮은 부추김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시프나드가 야만적인 어투로 외치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초에 출신부터 허접한
황제에게 경외심 따위가 생길 리 만무하다.
“……이러다가는 황실 안까지 쳐들어올 기세입니다. 정말
저대로 두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닥치라는 명령을 무시하며 아브타크는 다시금 입을 뗐다.
그것은 명백한 경고이자 우롱이었다. 질질 끌어 봤자 네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그리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그 속뜻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것은 황실의 존폐가 걸린 문제입니다. 민심을 잃은 황제의
말로가 어떠한지는 익히 보셨으니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귀족들은 이어진 말에 소리 없이 기함했다.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그는 명실상부 제국의 황제. 당장 황궁 병력을
동원해 아브타크를 죽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세력을
키웠다지만, 그는 한낱 재상일 뿐. 대체 뭘 믿고 저리 날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우려했던 대로 황제의 표정은 날짐승의 것처럼
사나웠다. 싸늘하게 굳어 버린 시프나드를 살피며 대다수의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모두 동의하나? 에즈라를, 아니 마녀를 처형하면 백성들이
잠잠해지고 제국이 다시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그, 그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을 테지. 백성들의 윤택한
삶을 짓밟은 건 아브타크의 뒤에 숨어 배를 불리기에 급급했던
자신들 때문이 라는 걸 모를 리 없으니까.
배울 만큼 배웠다는 이들이 마땅한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꼴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시프나드는 그들을 보며 대놓고 코웃음 쳤다.
“아아, 하긴 그렇지. 이 황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미룰수는 없어.”
유쾌함을 꾸며 내며 여봐란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설마 정말
애지중지 끼고 돌던 마녀를 내버리려는 건가. 이리 간단하게?
귀족들은 믿기지 않는지 머리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와스터의 물을 흐리는 마녀를 당장 투옥하라.”
근엄한 목소리 뒤로 적막이 내려앉는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알현실 안을 둘러보며 시프나드는 의아한 얼굴로 물어
왔다.
“명령이 들리지 않나? 그토록 자네들이 원하던 명령을
내렸건만. 생각보다 좋아해 주지 않으니 조금 속상한데.”
“지,진심이십니까?”
뒤늦게 한 귀족이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 마지막 선포만을 기다렸다. 시프나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담담히 내뱉었다.
“마녀를 죽이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쓰라렸다.
“특별히 아주 잔인하게. 자네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칠
테니…… 한 명이라도 빠지기만 해 봐.”
황제의 말은 익숙한 분노로 끝을 맺었다. 망설임 없이 일어나
귀족들을 뒤로하는 황제는 마치 내빼듯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저들끼리 남겨진 귀족들은 생각지 못한 수확에
기뻐하다가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더러운 것들을 뒤로한 시프나드는 큰 보폭으로 황궁
안을 활보했다. 그가 향한 곳은 에즈라가 머무는 침실이었다.
아마도 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황궁 병사들은 에즈라를
연행하기 위해 그녀의 침실을 찾았을 것이다.
시프나드의 걸음이 초조함에 더욱 빨라졌다. 그의 뒤를
따르던 시종들도 거의 뛰다시피 그를 쫓았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계단을 오르던 시프나드는 마침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계단을 내려오는 에즈라와 맞닥뜨렸다.
“……에즈라.”
병사들은 황제가 앞을 가로막자 길을 텄다. 그들이 두 사람의
주변으로 흩어지자 시프나드는 에즈라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너 지금 감옥 가는 거야.”
“내가명령했거든. 너 죽여버리라고.”
“알아요. 전해 들었어요.”
에즈라는 그의 가슴팍에 시선을 붙박인 채였다. 아마 저
옷자락 안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을 것이다. 팔뚝은 또
어떠한가. 흉터가 빼곡히 새겨져 있을 테고, 또 얼마 전에 칼을
맞은 등은……오
“등은좀 괜찮아요?”
남자의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혼에서 피가 흘러내린다는 것도.
머뭇거리다 내민 한마디 물음. 고작 그 한마디에 딱딱히 굳어
있던 입매가 살짝 떨려 왔다. 시프나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잠시 그리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는 허술한 연기를 이어 갔다.
“내가 말했지. 죽이지 않은 거. 후회할 거라고.”
“알잖아요.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못 죽인 거예요.”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인 남자는 지독히도 자신 없어 보였다.
그는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흘려 넘기며 제 가슴에 칼을
꽂았다.
“그 자식이 널 구하러 올 것 같아? 기다려?”
바보처럼 말끝을 떨고 말았다. 에즈라는 마땅한 대답 없이
무구한 눈동자로 저를 올려다볼 뿐이다. 그 맑은 눈길에
사로잡혀 있기도 잠시, 그녀는 그를 뒤로하고 말없이 스쳐
지나가려 했다.
“어디 가. 대답하고 가.”
보낸 주제에. 혹여 완전히 놓칠까 보느 그는 황급히 뒤돌아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돌려세운 여자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깜빡이지 않아도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뇨. 안 왔으면 해요.”
그런데 사실 기다렸다. 엄청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워질 만큼. 그를 생각하면 오지 않는 게 옳은데. 나는
너무 보고 싶어서. 자꾸 기대하고 또 기다리고 말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져 오는 진심이 아파서. 그는 잔뜩
미간을 구긴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 팔을 털어 낸 여자가
지나쳐 가던 순간, 그는 또다시 에즈라를 붙잡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빌어.”
마지막 애원이었다. 그 사람이 아닌, 내 곁에 있어 달라는.
“제발 살려달라고 빌어줘.”
볼품없을 거 알아. 나답지 않게 구질구질하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그래도 사랑은 원래 그런 거잖아. 내가 내가 아닌
게 되는 거잖아.
시프나드의 마지막 발악에도 에즈라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렴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책감 따위는 품지 말라고.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니까
아파하지도 말라고.
“나는 그 사람이 그만 불행하기를 빌어요. 또 자주 웃었으면
해요. 살아가다가 혹여라도 죽음 같은 건 생각하지 않게끔
말이에요.”
이기적이라 욕해도 좋았다. 내가 사라지면 그는 살 수 있을
테니까. 모두 다 털어 버리고 이렇게 훌훌 떠나고 싶었다.
그러니까 제발 나를 잡지 마. 두 번 다시 붙들지 마. 나 같은 것
때문에 자신을 망치지 마.
“그를 위해서라면 나는, 와스터 역시 멸망시킬 거예요.”
에즈라가 그리 내뱉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과
종들은 두려움에 물들었다. 진저리 치며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는 이들을 보며 에즈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등을
꼿꼿하게 폈다.
“……당장 투옥해.”
시프나드는 그 누구도 그녀의 다짐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잡았던 손에 힘을 풀자 에즈라는 아주 쉽게 그의
팔을 뿌리치고 사뿐 걸음을 옮긴다.
마치 본래 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녀는 너무 쉽게
멀어져 갔다.
병사들이 에즈라를 감시하며 계단을 돌고 돌아 내려가는
동안, 황제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감은 두 눈이 아득하고,
바닥을 디딘 발밑엔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다.
황제는 이윽고 뻣뻣한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절망을
다독였다. 한참 치미는 감정을 갈무리하던 그는 외롭고 슬픈
방을 둘러보다가 협탁 아래 숨겨 둔 서신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티텐 독립 소청. 에즈라 사형 촉구. 황성 진격 예정.’
다시 보아도 간단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남자의 것일 정갈한
필체를 오래도록 내려다보던 시프나드는 그것을 손안에 와락
움켜쥐었다. 구겨진 양피지를 망설임 없이 태워 버린 그는
뻔뻔하고 대담한 요구를 곱씹었다.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섰던 늦은 밤, 창틀로
날아든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까마귀 한 마리. 열어 줄 때까지
콕콕, 부리를 찧어 대는 탓에 창을 열어 주자 미물은 정신
사납게 날개를 퍼덕였다.
그것의 발에는 말아 놓은 양피지가 매어 있었다. 언짢은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기 무섭게 까마귀는 미련 없이 떠나가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창을 험하게 닫은 후, 그는 어렵사리
글을 읽어 내려갔더랬다.
‘황궁 병력 중립 요망.’
글은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 전령이 남자의 마지막 수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아마 내가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히폴로테스는 죽음을 불사하고 끝끝내
에즈라를 구해 내겠지.
황좌에 앉은 건 나인데. 너를 갖기 위해 황제가 되었는데.
끔찍한 무력감만 곁을 맴돌았다. 슬럼에서 굴러먹던 때도,
황제가 된 지금도 너는 나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너를 구할 수 없다. 여전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생전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 마음이 가장 아름다웠을 때,
끝내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