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새벽별이 뜬 깊은 밤. 인적 드문 항구에 낡은 배 한 척이
들어섰다.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배가 선착장에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해진 옷을 걸친 이들이 줄 지어 뭍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발소리 죽여.”
대장격인 사내가 속삭이자 뒤따르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은 최대한 허리를 숙인 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맨 끝에 선 이까지 모두 땅 위로 발을 딛고
올라온 그때였다.
“억!”
어디선가 날아온화살 하나가 해적의 어깨에 명중했다. 옆을
지키고 있던 동료가 나동그라지자 남은 이들은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어두운 밤중에 주저 없이화살을 날리는 것도 모자라
한 치도 빗나가지 않다니. 비범한 실력이다. 두목은 소문으로만
듣던 이들의 존재를 깨닫고 긴장감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흩어져! 최대한 빨리 골목으로 숨어든다.”
그때, 높고 낮은 건물 꼭대기에 숨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능숙한 움직임으로화살을 겨누었다. 이내
명령을 따르려 재게 발을 놀리던 해적들을 향해화살이
빗발쳤다. 병사들의화살촉은 하나같이 목구멍을 빗나가지
않았다. 줄줄이 쓰러지는 부하들을 살피던 두목의 낯빛이
흐려졌다.
“나와라! 구질구질하게 숨어서화살을 날리는 꼴이라니!”
그가 악에 받쳐 소리치자 문득화살이 멎었다. 뜻밖의 상황에
한숨 돌리는데 가지처럼 뻗친 골목 사이로 인영이 비쳤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네농이 말로만 듣던 해적 사냥꾼이군. 그런데 어쩌지? 나는
네놈이 지금까지 사냥한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다!”
얼마나 많은 병사를 숨겨 두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지금 홀로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제 주변에는 무지막지한 날붙이를 든
부하들이 수두룩했다. 당장 도끼를 날려 저놈의 가슴팍을 가를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는 여유 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친구가 별로 없나 봐.”
“뭐?”
해적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상냥했다. 남자는 느릿하게 칼을 쥐고
있던 손목을 두어 바퀴 돌렸다.
“소문을 제대로들었으면 오지 말았어야지.”
손을 푸는 모습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판단을 잘못했어.”
남자가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밤하늘 아래 드러낸
은빛 머리칼이 눈부셨다.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법한 얼굴에
사로잡힌 찰나, 그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럴때는기어야지.”
“허튼소리!”
“살려 달라고 목숨을 구걸해야지.”
윽박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을 이었다. 두목이
부하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한꺼번에 함성을 내질렀다.
“시끄러워. 사람들 깨잖아.”
나직한 경고에도 해적들은 히폴로테스에게 달려들었다.
두려움을 감추며 덤비는 이들을 멀거니 응시하던 히폴로테스는
가장 앞선 이의 목을 횡으로 베었다. 피가 얼굴에 흠뻑 튀었다.
흐르는 피를 대충 손으로 훔쳐 내자 얼굴 위로 피가 온통
번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옆에서
달려드는 이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쳐 밀어 낸 후 칼끝을 목에
박아 넣었다. 최대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단숨에 죽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정말지긋지긋해.”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히 달려드는 이들을 베고 또
베었다. 피로 젖은 손 때문에 자꾸만 칼이 미끄러졌으나 그는
상관 않고 칼질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은 온통 피와
시체들뿐이다.
쉬지 않고 움직인 터라 숨이 퍽 가빴다. 뜨끈한 피 때문일까,
시체에서 은근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도 했다. 피 칠갑을 한
남자의 은빛 머리칼은 이미 붉게 물든 후였다. 턱 끝에 핏물이
맺히더니 방울져 뚝뚝 떨어져 내린다.
“이게 다인가?”
히폴로테스는 자신을 빙 둘러싼 시체 무더기를 넘어
두목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린 듯한
두목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가오는 히폴로테스로부터
멀어지려 마구 발버둥 쳤으나 몸은 제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히폴로테스는 낮게 웃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반응은 참 한결같다. 제 모습도 이러할까.
히폴로테스는 자신의 마지막을 그려 보다가 결국 에즈라를
떠올렸다.
사치스럽고 웅장한 행렬 가운데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있던
너를. 여전히 빛줄기 앞으로 나서지 못하던 너를. 너는 마치
그곳만이 제자리인 양 구해 달라 손을 뻗지도, 발끝을
들이밀지도 않아.
내가 네게 다가서던 그때도 그랬어. 너는 나를 찬란한 빛줄기
보듯 올려다보았다. 사실은 더 아득한 어둠인지도 모르고……
겨우 나 같은 것 때문에 그곳에 잠겨 있기를 선택한 너를 모르지
않아서.
“저, 저, 저를 죽일 겁니까.”
“살고싶어?”
“예. 사, 살고 싶습니다.”
“네 부하들이 저 지경이 되었는데도?”
공포에 질린 사람에게 눈에 뵈는 게 있을 리 없다. 그는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두목의
항복을 지켜보던 부하들은 허망한 얼굴로 무기를 들고 있던
손을 늘어뜨렸다.
죽어 간 동료들의 사체를 응시하며 해적들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끓어오르는 분노는 두목을 향했다.
그토록 충성을 맹세했건만. 믿고 따르던 동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다니.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지 않은가.
“살려 주십시오……
그 애걸은 사내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히폴로테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칼날이 살갗을 찢고
허공으로 피와 살점이 튀어 오른다. 눈 감지 못한 시체는
흐물거리다가 뒤로 퍽, 넘어갔다.
“살고 싶으면 내게 충성을 맹세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남은 이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원망
어린 눈으로 히폴로테스를 노려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달려들려는 몇몇 해적들을 둘러보던 히폴로테스는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한 얼굴을 했다.
“나랑 함께 싸운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너희를 지켜
주겠다.”
따르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 아니다. 믿기지 않는
조건에 해적들은 의뭉스런 얼굴로 잘못 들은 것인가 귀를 후벼
팠다.
“지켜 주겠다고.”
다짐이 깃든 담담한 말. 그리고 어떤 외력에도 굴복하지 않을
법한 힘. 남은 이들은 잠시 고민했다. 동료를 무참히 죽인
남자를 따를 것인가. 과연 따를 수 있을까.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죽이고 싶지 않다. 지금 내겐 병사
하나가 귀하거든.”
굳어 가는 핏물은 끈적했고 히폴로테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불쾌한 얼굴을 했다. 망설일 새는 없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저 피는 제 것이 될 테니까. 끝내 무력에 굴복한
해적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결국 모여 있던 이들 모두가 항복하고 나서야 히폴로테스는
뒤를 돌았다. 그제야 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을
둘러보던 해적들은 우왕좌왕하면서도 그들을 따랐다.
본거지를 향하는 히폴로테스는 앞만 바라본 채 걸음을
재촉했다.
“테르모스는?”
“안 그래도 방금 전령을 날린 참입니다. 아마 새벽 즈음에는
도착할겁니다.”
“수고했어.”
“……예.”
이 방법이 통할지 아닐지는 모험이었다. 카코스는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등을 응시하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만약 마지막
수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는 물론이고 모두는 죽음을 면치 못할
테지.
도박이었고, 하늘에 달린 일이었다. 이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게 그를 더욱 절망케 했다. 카코스는 정신을 갉아먹는
불안감을 외면하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시각, 황성 안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는 것인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침상 맡에
가만히 앉아 있던 시프나드는 불꽃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칼을 휘둘러 방을 밝히던 불을 꺼 버렸다.
암흑에 잠긴 침실 안, 오감은 더욱 곤두섰다. 그는 또다시
창을 넘어 다가오는 살수들에게 칼을 던졌다.
앞선 이가 죽어 나가자 뒤따르던 이는 급히 커튼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비수를 고개를 빗겨 가뿐히 피했다. 가볍고 재빠른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그들에게 다가선 시프나드는 단도를
휘둘렀다.
목덜미를 베인 살수가 상흔을 더듬거리다 곧 고꾸라진다.
그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살수들을 주르륵 훑어보다가
머리를 헝클였다.
“여섯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누가 악당 아니랄까 봐
야비하네.”
황제는 거친 어투를 구사했다. 총 여섯 명의 살수들은 망설임
없이 시프나드와 에즈라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렇게는 안되지.”
시프나드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보다 에즈라에게 달려드는
살수들을 먼저 막아 냈다. 덕분에 몸을 내주는 것은 당연한 일.
옆구리가 베이고 등에 단도가 꽂혔다.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터져
나오는 신음을 힘겹게 삼켰다. 고요히 잠든 에즈라를 깨울 수
없으니까.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단 말이야.”
그의 말끝이 분노로 떨렸다. 살벌한 어조에 살수들이 찔끔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반원을 그어 둘을 베어 낸 두I,뒤를 노리던
칼을 굴러 피했다. 발목에 묶어 둔 단도를 꺼내 에즈라를 노리던
이의 목으로 던졌다.
쓰러트린 이들이 셋. 남은 살수도 총 세 명. 그들 또한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시프나드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문득 흐느끼는 울음이 들려온다. 너무도 익숙한, 그리운
흐느낌이. 그는 눈 감은 여자의 눈꼬리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네 때문에 울잖아.”
사실 알고 있다. 네가 우는 건, 그 남자 때문이라는 걸. 네
울음조차도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그게…… 너무화가나.”
그것을 끝으로 시프나드는 칼을 고쳐 쥐고 살수에게
달려들었다. 온 힘을 다해 한꺼번에 두 사람의 배를 찢은 두I,
바로 칼을 들어 올려 남은 이를 베어 냈다. 피를 뒤집어쓰기
무섭게 그는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대강 뱉어 냈다.
비틀거리던 남자는 에즈라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지킨 보람도 없게 너는 또 울고 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데 피 묻은 손으로는 네게 닿을 수 없어서.
“너무 아파.”
“네가우는 게 가장 아파.”
가슴속에 아직도 피가 들끓었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핏덩이를 몇 번이고 뱉어 내다가 그는 킥킥거렸다. 갈라진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던 남자는 결국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