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사실 에즈라가 시찰에 함께 나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녀는 측실조차 못 되는, 실상 존재마저
부정당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시프나드는 에즈라를 홀로 궁에 둘 수 없다며
시찰에 동행할 것이라 선언했다. 적지 않은 반항을 그는 끝까지
묵살했고, 이렇게 함께 전차에 타게 된 것이다.
에즈라는 황궁 앞에 위풍당당히 서 있는 금빛 전차를
발견했다. 총 두 대의 전차 중 앞선 전차 위에는 황비가 이미
자리해 있었다. 시프나드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듯했다.
에즈라는 셀리만 대동한 채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에즈라가 나타나자 명을 받은 호위병들이 그녀를 뒤편에
있는 마차로 인도했다. 전차에 올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데
앞선 전차로부터 날 선 시선이 느껴졌다.
따가운 눈총에 슬쩍 눈을 들어 확인해 보니 역시나 황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심정을 알 만한 터라 그녀를 원망할
생각일랑 없었다. 옆에 자리한 셀리가 옷자락을 정리해 주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는데 불쑥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언제 도착한 걸까. 기척도 없이 다가온 시프나드는 제 눈치를
보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런 시프나드야말로 불편해 보였다.
답지 않게 두 여자 사이에 끼어 눈치를 보는 것이 우스운 터라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이네. 날이 좀 쌀쌀해서 껴입으라고 전했는데. 잘
차려입은 것 같아 다행이야.”
“오, 오셨어요?”
에즈라가 대답하기도 전에 시프나드의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조한 얼굴로 시프나드를 응시하는
황비는 퍽 애달파 보였다. 그런 그녀를 싸늘한 눈으로 훑어보던
시프나드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돌려 황비에게 다가갔다.
황비는 그제야 조금 표정을 풀었다. 황제가 황비 옆에 나란히
서자 맨 앞에 서 있던 기사가 황금색 깃발을 들어 올렸다. 그
신호를 끝으로 말이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에즈라, 위험하니까 잘 붙들고 있어. 너무 빠르다 싶으면
바로 얘기해.”
어엿한 성인 여자를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
에즈라는 군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별로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니까. 은근한 무시에도 시프나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앞만 보았다.
삭막한 분위기를 안은 전차는 으리으리한 황성을 넘어서자
속도를 줄였다. 아무래도 백성들에게 건재한 황실을 보여 주기
위함인 듯했다.
화려한 금빛 마차가 수도 중심으로 들어섰다. 바쁘게 거리를
오가던 이들은 모두 발길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흘깃거리는
눈길들에는 흥미와 경오I,그리고 감춰 둔 불만이 서려 있다.
남루한 옷차림들을 훑어보던 시프나드는 잡고 있던 황금
손잡이를 더욱 세게 움켜쥐 었다.
히폴로테스의 치하 아래서 지낼 때보다 백성들의 삶은 훨씬
궁핍해 보였다. 수도가 이 모양이면 대체 국경 지역은 어떤
꼴이란 말인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가슴 한편이
묵직해졌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니 정말 좋아요. 하늘도 맑게 개어
화창하기 그지없으니…… 아, 바람도 좋네요. 이 모든 게 다
시프나드 님 덕분이죠.”
“내 덕분?”
황비가 눈치 없는 말을 지껄이자 시프나드는 대놓고 코웃음
쳤다. 이 여자 눈에는 꾀죄죄한 어린것들과 젊은이들의 포악한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걸까.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제대로 보라고. 자신들의
실상을 굽어 살펴주길 바라는 희망 깃든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이들의 기괴한 눈빛을. 저들의 절박함에
숨통이 턱턱 막혀 왔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면 이런 것에 무뎌지는 걸까. 책임감과
무력감이 짓누른다. 시프나드는 황급히 어깨 너머로 에즈라를
찾았다.
“아……,”
새하얗게 질린 여자는 몸이 좋지 않은지 어깨를 떨고 있었다.
옆에 선 하녀가 무어라 말을 걸자 고개를 힘차게 내젓는다. 그녀
역시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는 듯했다. 그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수도 끝자락을 벗어나던 그때였다.
“저게 뭐지?”
시프나드는 수도 변두리로 갈수록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양피지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이 누군가의
초상화라는 것을 눈치채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과 선명한 녹색 눈동자. 그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샐쭉 찢어진 입꼬리였다.
에즈라는 저리 웃지 않는다. 그토록 악독한 미소를 머금지
않는다. 보지 않으려 해도,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해도 사방에
마녀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나어린 것들이 낙서를 하거나, 반쯤
찢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시프나드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와스터를 저주한 마녀 !]
심지어 하단에는 자극적인 문장이 갈겨져 있었다.
“젠장.”
“마녀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황비도 당황한 듯 목소리를 냈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에즈라의 모습을 들키지 않는 것 정도였다.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벽보를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려야겠다
다짐하는데 마침 맞바람이 세게 불었다.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옷자락이 펄럭일 만큼 거센
바람에 에즈라의 로브가 훌렁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행진을 보기 위해 가까이 몰려들었던 이들은 검은
머 리 칼과 새하얀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마, 마녀다!”
“에즈라 님 !”
가까이서 전차를 구경하던 이가 크게 외치자 주변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셀리가 곧장 로브를 잡아 눌렀으나 이미
비틀거리는 에즈라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린 후였다.
“내가 봤어! 틀림없이 눈동자가 녹색이었다고! 호부 황제의
마녀야.”
“마녀다! 마녀야!”
하필이면 전차는 여봐란듯이 수도를 거닐던 중이었다.
전차의 앞뒤를 지키는 병사들 때문이라도 이 속도를 벗어나
달리는 것은 어려운 일. 진퇴양난에 빠진 시프나드는 이를
악물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아니지. 내가
없는 곳에서 위협을 받는 것보다야 이게 낫다. 차라리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게 나아. 내 곁에서 저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오
“주, 죽어라!”
어떤 겁 없는 젊은이가 호기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돌멩이를 던졌다. 채 닿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으나 그것은
무언의 신호탄이 되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주정뱅이
하나가 들고 있던 술병을 던진 것이다.
쨍그랑, 소음과 함께 산산조각 난 술병 조각이 전차에
흩뿌려졌다. 소스라친 셀리가 몸을 감싸 안았으나 에즈라는
손을 벌벌 떨었다. 정확히 머리를 노렸다. 정말 죽일
생각이었어. 저들은 나를…… 그만큼 증오하고 있다.
“마녀는 죽어야 해! 마녀는 와스터를 멸망시킬 거다!”
누군가 그리 외쳤다. 낡은 분수대 위로 올라간 젊은이 몇몇이
전차 행렬을 손가락질하자 사람들은 전차를 뒤따라오며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 저리가지 못해!”
“마녀를 보호하는 거냐! 너희도 다 똑같아!”
“너희가 인간이야? 나쁜 놈들!”
전차를 둘러싼 병사들이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외쳤으나 그들 역시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병사들이 잔뜩
움츠러든 에즈라를 돌아보며 머뭇거리자 백성들은 더욱
분개하기 시작했다.
“쫓아가, 쫓아가서 죽이자!”
“마녀를 죽이면 우리가 산다! 마녀는 와스터의 적이야!”
걸쭉한 욕지거리 뒤로 그런 고성들이 오갔다. 몰려드는
백성들이 많아지자 병사들 또한 에즈라를 보호하기 쉽지
않았다. 어느새 전차 가까이 몰려든 이들 때문에 행렬은
흐트러지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단말마의 신음에 시프나드는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팔뚝을 빗맞은 듯 에즈라가 그곳을 움켜쥔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가 당장 마차에서 내려서려 하자 황비가 덥석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간 돼요. 가지 마세요. 여기서 에즈라를 보호하면 일이 더욱
커져요.”
“그럼 어쩌자는 거야. 당장 이거 놓지 못해?”
“죽게 하고 싶어요? 이럴수록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고요.
다들 뭐 하고 있는 거니! 어서 에즈라를 보호하지 않고!”
“예, 예!”
“너희는 앞서가는 병사들에게 말을 전해라. 당장 내달려 길을
트라고 해.”
귀족은 귀족인 모양이다. 황비는 그 어느 때보다 위엄 있는
목소리로 아랫것들을 부렸다. 그들이 제 할 일을 찾아 흩어지자
시프나드는 한시름 놓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까지 세상 뒤편에 숨겨 둘 건가? 평생을? 앞에 내놓을
용기도, 그렇다고 보내 줄 용기도 없지. 그렇다면 네가 티텐과
다를 게 원가?’
사형 명령을 내리지 않자, 아브타크가 조롱하듯 꺼내던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콧방귀를 뀌며 지나쳤던 말. 그것이 믿어
왔던 모든 것을 혼들어 놓는다.
진정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황제가 되었는데, 너를 곁에
두려고 황제가 되었는데…… 네가 나를 황제로 만들었는데.
나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오히려 너를 궁지에 몰아넣고 더욱
아프게만 할 뿐이다.
“에즈라.”
시프나드는 애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즈라는 마차로
몰려드는 병사들과 백성들의 난장을 보다가 킥킥 웃고 말았다.
너무 우습지 않은가. 고작 저 같은 것 때문에 죽자 사자
달려들다니. 내가 뭐라고 지키려 들고, 또 죽이려 한다.
“웃어? 저 미친년이……!”
숨죽여 울듯 웃는 에즈라를 발견한 이들은 마구 돌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것들도 날아왔다. 몸을 스치고,
어깨를 때리고,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 그 모든 비난 속에서
에즈라는 기쁘게 웃었다.
퍽, 소리를 내며 몸을 때리는 것들이 하나둘 전차에 쌓여
갔다. 전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백성들 역시 달리며
그녀를 쫓았다.
“몸을 숙여요.”
“에즈라 님.”
“셀리는 맞을 이유가 없어요. 명령이에요. 앉아요.”
옆에서 괜찮냐 물어 오는 셀리를 꿇어앉힌 에즈라는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것임을 깨달은 셀리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이 얻어맞는 것을 보면
에즈라는 또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차라리 이것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간간히 신음을 흘리며 아픈 곳을 문지르는 에즈라를
셀리는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놓치지 마! 쫓아가, 죽여야 해!”
“돌을 이리 줘 !”
뒤에 선 이들이 앞선 이들에게 돌을 건넨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머리를 감싸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제야 모든 게 제 것 같았다. 이런 삶이야말로 본래 제
것이어야 했다. 평생을 이리 살아오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항상
눈물이 났다. 사실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증오를
받아들이는 건…… 늘 어려웠다.
홀로 나를 달래는 것도. 누군가를 바라지 않는 것도.
그래서 또 환영을 보는 것인가. 에즈라는 저 멀리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깊게
눌러쓴 로브 아래로 내려온 은빛 머리칼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에즈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일 리가 없다. 너무 잘 아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낯선 이로부터 그를 찾았다. 눌러쓴 로브 아래,
반쯤 그늘진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리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아니기를 바랐다. 이런 모습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저 남자도 어서 내게 돌을 던졌으면 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처럼…… 나를 원망하고 또 미워하기를. 그리고
나를 까맣게 잊어버리기를.
“히폴로테스.”
신음처럼 이름을 부른 찰나, 전차는 남자가 서 있던 골목을
지나쳤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와 바람. 또다시 로브가 넘어가고
출렁이는 검은 머리칼이 드러난다.
아우성이 커진다. 뒤를 돌아보자 쫓아오는 백성들은
작아진다.
“……히폴로테스.”
남자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