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일생일대의 중대한 갈림길 앞에서 호위병들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진땀을 흘렸다. 문을 열면 황제가, 열지 않으면 눈앞의
마녀가 목숨 줄을 조여 올 테니까. 허나 에즈라가 손을 뻗었을
때, 그들은 결국 오물 피하듯 후다닥 문을 열고 에즈라로부터
저만치 떨어졌다.
그 꼴이 우습고도 허탈해 에즈라는 숨죽여 웃었다. 그녀가
알현실로 발을 들이자 한창 격렬하게 오가던 고성이 뚝 끊겼다.
황금 의자에 았아 있는 시프나드를 올려다보던 에즈라는 붉은
양탄자 위를 천천히 걸었다.
“에즈라? 네가 여긴 어떻게……"
대체 호위병들은 뭘 하고 있는 건가. 시프나드가 문밖에 서
있을 호위병들을 향해 외치려던 찰나, 에즈라는 알현실
중심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다들 잘 들어요.”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발을 들이냐며 호통을 치려던
귀족은 그녀의 나지막한 어조에 입을 싹 닫았다.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적막 속에서 에즈라는 고백하듯 말했다.
“나는 마녀예요. 사람 죽인 마녀.”
그리 인정한 순간, 마음만큼은 편했다. 가슴팍에 얹은
손바닥이 뜨겁게 느껴졌고 심장은 벅차게 뛰었다. 에즈라는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아브타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저 비열한 남자가 원하는
게 원지도 잘 알았다. 나를 구해 내겠다 발버둥 치는 그는 이런
나를 원망할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정말이것뿐이니까.
“그런 내게 히폴로테스를 도와 티텐을 멸망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죠. 나는 와스터 역시 멸망시킬 거예요.”
“에즈라,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가 손을 뻗으면 다 말라비틀어질 거예요. 내가 딛는 땅은
모두 조각나 무너질 거야.”
더 이상 듣고 있기 힘들었다. 시프나드는 시시각각 굳어 가는
귀족들을 훑어보다가 결국 황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계단을 내려오려 하자 에즈라는 여봐란듯이 더욱 크게
소리쳤다.
“나는 와스터가 진저리 날 만큼 싫으니까. 당신들도, 이
나라의 백성들도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발악 같은 외침에 심약한 몇몇 귀족들이 딸꾹질을 해
댔다. 전대 황비는 마녀다. 남자를 흘려 쥐고 흔들어 나라를
기울게 하지 않았나. 게다가 살육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녀의 기이한 능력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고 그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신비로운 것 이면에는 늘 불안이 피어오르는
법이니까.
웅성거림이 커져 가자, 알현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나요?”
에즈라는 한껏 비아냥대며 자신을 둘러싼 귀족들을 빙
둘러보았다. 표독스럽게 치뜬 눈꼬리와 눈물만 머금던
눈동자에 깃든 독기. 귀족들은 절로 찔끔했다.
“내가 여기 있는 한, 와스터에는 망조가 깃들 거야. 당신들
다…… 지옥에 떨어질 거야.”
“닥치지 못해!”
보다 못한 시프나드는 성큼 계단을 내려와 에즈라의 팔을
붙들었다. 거칠게 잡아당기자 휘청이면서도 에즈라는 그의
팔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의 실랑이를 숨죽여
지켜보던 귀족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았다.
“이러지 마, 제발가만히 있어.”
닥치라며 윽박지를 때와 달리, 가까이 다가온 시프나드는
슬픈 얼굴로 애원했다. 그녀를 달래듯 품에 껴안은 황제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러면, 너 자꾸 이러면 내가 너를 지키기 힘들어진단
말이야.”
“……그걸 바라요. 당신이 나를 놓기를 바라.”
“네가 이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게 히폴로테스야?”
입술을 달싹이는데 대답을 듣지도 않고 시프나드는 에즈라를
품에서 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꽉 잡은 손을 풀지 않은 채였다.
죄어 오는 고통에 인상을 썼으나 시프나드는 모른 척 문밖의
호위병을 불렀다.
“너희는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들어와 에즈라를 끌어내.”
“예예!”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이들은 황제의 명령에
반색하며 알현실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러나 그뿐,
시프나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에즈라에게 다가온
호위병들은 차마 그녀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뭐하는 거지?”
“죄,죄송합니다!”
격렬한 분노에 손이 다 떨렸다. 설마 지금 마녀라는 이야기를
듣고 에즈라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황제의 명령에도
불복종할 정도로 마녀니, 저주니. 그런 것을 믿고
에즈라를……오
“에즈라는 마녀가 아니다.”
허나 오히려 그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다.
마녀에게 흘린 남자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되레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눈동자만 하나둘
늘어난다.
그것을 깨달은 시프나드는 이마를 감싸며 작게 신음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에즈라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로 여전히 악랄함을 꾸며
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이들은 겁에 질려 갔다. 모든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아브타크만이 헤벌쭉 웃었다.
와스터는 불안올 당연히 여기는 상황 속에 처했다. 도적
떼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서로를 잡아 뜯었고, 그럴수록 약자와
그 아래 더한 약자. 강자는 없는 참혹한 싸움이 약자들 사이에
번졌다.
모든 건 아브타크와 고위 귀족들이 만든 세법과
얼토당토않은 규제들 때문이었지만, 눈먼 이들이 알 리
만무하다. 백성들은 그 아래서 죽지 못해 삶을 이어 갔다.
해적이 물러나면 뭐 하는가. 그보다 더한 이들은 얼굴을
맞대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이었다. 히폴로테스는 날이
갈수록 처참해져 가는 제국을 둘러보며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백성들에게는 분풀이할 곳이 필요했다. 불시에 덮쳐 온
불행의 원인을 착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때 들려온
소문에 그들을 발광했다. 황제는 허수아비이며, 마녀를 끼고
산다. 그 마녀 때문에 제국이 멸망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라는
기괴한소문에.
결국 그 흉흉한 이야기는 눈 깜짝할 새 퍼져 나가 귀족들을
향하던 원성을 잠재웠다. 아브타크의 계획대로 된 것이다. 그는
에즈라 하나로 자신을 향하던 비난의화살을 돌렸다. 그뿐인가,
눈엣가시 같던 여자를 죽일 명분까지 만들었으니
일석이조였다.
이 정도 되면 시프나드가 아무리 뻗대도 에즈라를 살릴 수는
없을 터.
“에즈라를 미끼로 쓰겠다 이거군.”
늦은 밤. 슬럼에 위치한 근거지에 히폴로테스 일행과 독립군
수장, 르누아르가 둘러앉아 있었다. 한참 떼어 온 벽보를 읽어
내려가던 히폴로테스가 뒤늦게 중얼거리자 르누아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자는 늘 속을 읽기 힘들었는데 오늘따라 더한 것 같았다.
“히폴로테스 님을 황성으로 불러들이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저희가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최대한
빨리 일을 벌인 거고요. 이제 어찌할까요?”
“지금이라도 전면전을 펼치시는 건……,”
카코스와 데몰레온의 말에 르누아르는 얼굴을 흐렸다.
그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안 그래도 티텐의 독립군은
이런저런 분열이 일고 있었다. 자신들의 나라를 멸망시킨
남자의 지휘 아래 있어야 한다는 건 불편한 일이 분명하니까.
“아니, 작전을 바꾸지.”
히폴로테스는 벽보로부터 눈을 돌려 르누아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희는 티텐의 독립군이다. 나는 와스터의 반란군이
되겠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를 죽임으로써 너회는 독립의 명분을 쟁취해. 조건은
에즈라의 목숨이다.”
르누아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사이,
카코스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내리쳤다.
“히폴로테스님!”
“내가 먼저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면 너희는 반란과는 아무
상관 없는 티텐의 독립군으로 이 싸움에 임하는 거야.”
“지금 저희보고 당신을 죽이라는 말입니까?”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독립을 쟁취하지 않겠어? 어떤
일에서든지 명분이 빠져서는 안 돼.”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롭다니. 르누아르는 혼란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입을 가린 채 고뇌하던 눈이 결심으로
일렁이자 그를 눈치챈 카코스는 절박하게 외쳤다.
“안됩니다!”
“그리고 너희는 독립군 편에 서서 싸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성급한 결정입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섣부른 판단은 아니야. 남아 있는 해적 잔당들을 반란군으로
끌어들일 거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브타크는 우리의 움직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다. 어쩌면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계획은
무수한 희생을 낳을 것이며,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것을.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 용기만으로 버텨 왔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나라도 해 달라는 대로 해 줘야지.”
“나 되게 강한데. 못 믿는 거야?”
파격적인 데다가 독단적인 결정임에도 카코스는 더 이상
반기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처음으로 제논이 내비친 분노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제논!”
테르모스가 제논의 말을 끊었다. 올곧은 제논을 보며
히폴로테스는 미간을 좁혔다.
“아직도 모르겠어 ? 아브타크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에즈라를
살리고 싶으면 독립군에서 손 떼야 한다고. 지금은 운 좋게
피하고 있지만 만약 그가 우리 기지를 헤집어 놓겠다
마음먹는다면 죽도 밥도 안 돼. 해 보기도 전에 무너질 거야.”
“알겠습니다. 정녕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제논은 다른 이들의 경악한 눈들을 뒤로한 채 히폴로테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물러날 기미가 없는 제논을 지켜보던 데몰레온 역시 바로 예를
갖추었다.
“허락해 주십시오!”
손을 떠난 당신. 늘 한 발짝 앞서가는, 죽어도 곁을 주지 않는
게 모두를 지키기 위함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막아설 수 없다.
“저희도 이것에서만큼은 물러날 수 없습니다.”
이들이 나를 막기 힘든 것만큼 저 역시 이들을 막기
어려웠다. 지키고 싶은 마음이란 거,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나.
히폴로테스는 졌다는 듯 느리 게 고개를 끄덕 여 보였다.
“칼도, 방패도 우리가 한다. 그러니 독립군은 모습을 감추는
데 집중해. 미끼가 헛되지 않게끔 말이야.”
“……예.”
르누아르는 쥐어짜듯 대답한 후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턱을 넘기 전,
히폴로테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으나 그는 끝내 모른
척했다.
“의복은 여기 두겠습니다. 호,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단호한 거절에 하녀는 대놓고 안심한 얼굴을 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가 도망치듯 내빼자 침실 안에는 에즈라와
셀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에즈라를 피하는 하녀들 때문에
그녀의 시중은 모두 셀리가 떠맡았다. 공평치 못한 처사다
항변할 법도 하건만. 셀리는 무덤덤히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하녀들이 그녀 역시 마녀에게 홀린 것 아니냐며
수군거리든 말든 셀리는 그저 충실히 임했다. 그녀는 침상 위에
얹어진 의복을 집어 드는 에즈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다가섰다.
“도와드릴게요.”
“아뇨, 됐어요.”
“혼자 입기 힘든 의복이에요. 거북하셔도 제게 맡겨 주세요.”
어깨 우I,수수한 브로치를 떼 내던 손이 멈칫했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에즈라는 못 이기는 척
그것을 셀리에게 넘겨주었다. 셀리는 공손히 받아 들어
에즈라의 치장을 도왔다.
오늘은 황제의 국경 시찰이 예정된 날이었다. 얼마 전 혼인을
한 황제와 황비가 대외적으로 모습을 비칠 겸 나서는
시찰이었으나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것은 에즈라의
존재 때문이었다.
“로브를 꼼꼼히 뒤집어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얼굴을 보이시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요.”
에즈라는 셀리가 내미는 로브를 뒤집어쓴 뒤 매듭을 꼼꼼히
묶었다. 되도록이면 있는 듯 없는 듯 기척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