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에즈라에게서 몸을 물린 시프나드가 입술에 검지를 대 보이자
에즈라는 바짝 긴장한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시프나드는
소리 없이 검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에 커튼이
휘날리고 그 사이로 단검이 날아들었다.
챙. 반사적으로 날붙이를 쳐 낸 시프나드는 곧장 침상 앞을
지키고 섰다. 뒤편에서 몸을 말고 있는 에즈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검을 가지고 있는 게 천운이다.
“ 나와.”
황제는 다 이러한가. 시시때때로 자신뿐 아니라 아끼는 이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그런 자리인가.
“같잖은 짓 그만하고 나오도. 재미없으니까.”
시프나드는 움직임으로 그들의 수를 가늠했다. 총 네 명. 저를
죽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러니 이들의 목적은 에즈라, 그녀였다.
“하긴,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어.’’
다시 한번 커튼이 휘날리더니 단도가 날아들었다. 잡스럽게
구는 꼴이 누구 밑에서 굴러먹는 이들인지 알 것 같다.
시프나드는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채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 읏!”
먼저 엉거주춤 서 있던 살수의 목을 벤 후. 칼을 날려 단도를
집어 드는 이의 배를 뚫었다. 그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발로
차 올려 잡았다. 이때다 싶어 살수가 휘두르는 칼을 몸을 굴려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죽어!”
“씨팔, 어디서 명령이야.”
분노에 눈앞이 붉어졌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풋내기의 턱
밑을 뚫어 버린 후, 그는 도망치려 창 쪽으로 몸을 던지는 살수의
척추를 바스라뜨렸다. 후우, 숨을 몰아쉬는데 그제야 뒤에서
옴짝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황제한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를 아는데 돌아볼 용기가 없다. 살인귀
꼴로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네가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무서워서.
그의 옷자락을 물들인 피가 방울져 떨어진다. 비릿하고 질척한
핏물은 여전히 그가 쥔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가 튄
종아리와 피범벅이 된 두 주먹. 뺨과 눈가에 점점이 튄 핏물까지.
에즈라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숨을 고르는 남자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끝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저 등을
보면 눈물이 났다. 동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다른 건 주지 못했어도. 동정 하나만은 당신에게 주었으므로.
“거봐…… 당신은 결국 나 때문에 죄투성이가 될 거야.”
항진된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는데 끊길 듯 가느다란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당신을 망칠 거야.”
“상관없어.”
나는 원래부터 망가진 사람이니까.
“나는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바라지 않을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제 발 저린 사람처럼 그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난 내방식으로 너를지켜.”
나는 그 남자와 달라. 다르다는 걸 네게 보여 주겠어.
“……그 정도는 하게 해 줘.”
지금 매달릴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었다. 내어준
동정이라도 부여잡아야 했다. 사랑의 약자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희망을 품는 것뿐이었으므로.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수도의 거리에는 나다니는 이가 거의
없었다. 전차에 올라 텅 빈 거리를 구경하던 시프나드는 이내
으슥한 분위기가 감도는 성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성 안을 둘러보기도 잠시. 그를 마중 나온 시종을 따라 그는
응접실 앞에 다다랐다.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이 문을 열어 주자 여전히 번들거리는 테이블이 보였다.
시프나드는 가장 상석에 자리한 아브타크를 보며 눈살을 좁혔다.
아브타크는 말없이 옆자리를 턱짓했다. 황제에게 하는
태도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눈길도 주시지 않는 황제께서 어인 일로 낮은 이의 성을 다
찾으시고. 퍽 안달이 나신 모양입니다.”
“모르는 척하지 마. 다 알고 온 거니까.”
“ 무엇을?”
죽어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신경질을 돋우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어
눈앞의 뱀을 찍어 누르고만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네놈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
않았나? 왜 에즈라까지 건드리는 거야. 그건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평정을 유지하려 했건만. 생각할수록 길들이기 힘든 울화가
터져 나왔다. 대놓고 씩씩거리는 시프나드를 아브타크는 그저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이다.
“여자에 눈 먼 네놈은 모르겠지만 히폴로테스는 이미 세력을
키우고 있다. 반란군이든. 독립군이든 제대로 정비한 후 황성으로
진격하겠지.”
“ 뭐?”
그는 너무도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떴!다.
“그럼 그가 쉽게 마녀를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나?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 지금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내 계책에
숟가락 얹기 정도지.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 왔듯 조용히 입 닦고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다. 황제여.”
그는 대놓고 키득거렸다. 완벽한 조롱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게 없었으므로. 허울뿐인 황제. 제 편에 서
줄 그 어떤 권력도 없다. 고작 제 힘으로는 에즈라 하나
지키기에도 벅차지 않나.
“내가 네놈을 배신한다면? 나까지 적으로 돌려도 괜찮을까?”
“ 괜찮고말고.”
아브타크는 선뜻 대답하며 다리를 꼬았다. 시프나드는 그를
내려다보면서도 숨통이 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를 말해 줄까? 네놈이 힘없고. 별 볼 일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지. 너는 내게 적수가 못 돼.”
“여자를 완전히 갖고 싶나? 그럼 당장 사형 명령을 내려.”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마녀의 사형장으로 히폴로테스를 불러들일 거다. 그놈은
너와 달리 위협적인 존재라 더 이상 질질 끌 수는 없거든.’,
그제야 아브타크의 속셈을 눈치챈 시프나드는 그대로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놈은 에즈라를 미끼로 쓰려는
속셈이었다.
“되도록 빨리 진행해야 해. 놈이 더 세력을 키우면
곤란해지니까.”
그리고 내게는…… 타개할 방도가 없다.
“마녀 사형시킬 명분은 충분하지 않나? 물론 정점을 찍는 것
또한 내 계획에 있지만. 멍청하게 굴지 말고 당장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거야.”
아브타크는 으레 그러하듯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고수했다. 볼
장 다 봤다는 양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를 돌아 스쳐
지나가는 모습마저도 그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을 보여 주는
듯해서.
“에즈라의 목숨은 보장하는 건가?”
“당연하지. 그래야 지금처럼 황제를 내 뜻대로 휘두를 것
아닌가.”
아브타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칼도, 방패도 들지 못하는
한심한 황제가 할 수 있는 건 텅 빈 주먹을 말아 쥐는 것뿐이니까.
살수의 침입이 있었던 날 이후, 에즈라는 황궁 안의 수많은
방을 전전했다. 매일같이 침실을 바꾸어 어디에 머무는지 짐작 못
하도록 혼동을 주려는 의도였다. 그만큼 에즈라의 방에는 목숨을
노리는 살수들이 심심찮게 들이닥쳤다.
덕분에 에즈라를 한곳에 가둬 둘 수 없게 되자 시프나드가 택한
방법은 사람을 붙여 그녀를 보호하는 것 정도였다. 하녀들은
졸지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떠안게 된 것이다. 바짝 촉을
세워 그녀를 감시하던 것도 잠시. 줄 끊긴 인형 같은 에즈라를
하녀들은 방 안의 가구 보듯 했다.
하녀들은 나태해졌고 그럴수록 틈을 보였다.
그러니 자신이 원할 때면 그 틈을 타 심심찮게 복도를 거닐던
에즈라가 아브타크를 마주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녀들
덕이었다.
본궁의 후미진 복도를 지나 후원으로 향하던 에즈라는 마침
반대편 복도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브타크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모르는 척 빠른 걸음을 옮기려는데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얼마 전까지 지하 감옥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지내시는 데는
좀 괜찮으신지요.”
“시,신경쓰지 마세요.’’
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익히 아는 바. 한심하게도 몸이 달달
떨려 왔다. 아브타크는 지레 겁먹은 에즈라를 흥미 어린 눈으로
훑어보았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화로 몸을 던지셨다 들었습니다.”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즐겨 하시는 분인 줄을
몰랐네요.”
“시시콜콜하다뇨. 그리 말씀하시면 섭하지요. 다른 분도
아니고 전대 황제와 현 황제 두 분께 사랑받는 대단한 애첩의 일
아닙니까.’’
전 황제를 입에 담자마자 여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더이상 내게 말걸지 마세요.”
“히폴로테스. 그 남자가 당신을 이리 쉽게 놓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는 분명 너를 되찾기 위해 황실을 적으로
돌릴 거다.”
가면을 벗은 목소리에 멀어지려던 발걸음이 멎었다. 에즈라는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돌연 싸늘해진 남자가 히죽거렸다.
“그리되면 내겐 너무 성가신 일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물론 너를 구하기 위해 쳐들어온 놈을 베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만, 쉽게 쉽게 가자는 주의라.”
깊게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가 나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 들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놈의 기를 꺾어 다시는 와스터에 발도 못 들이게 하고
싶거든. 그러니 네년이 먼저 죽어 버리는 거야. 그러면
히폴로테스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살아가기야 하겠지.
모르겠어? 지금 네년은 두 남자의 발목을 잡고, 목숨 줄을
당기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라는 거지.”
망연한 얼굴을 즐거이 구경하던 아브타크는 매듭을 지었다.
“저는 지금 알현실로 가는 길입니다. 아침나절부터 논할
문제가 많아서. 그럼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덩그러니 남겨진 에즈라는 손끝을 맞잡았다. 터져 나올 듯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벽에 등을 기댄 채 눈물 고인 눈가를
마구 닦아 냈다.
‘발목을 잡고. 목숨 줄을 당기는……:
“안돼.”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민도 잠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에즈라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복도를
내달리던 그때였다. 마침 식사를 마친 호위병들이 복도 끝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에즈라는 본능적으로 그들로부터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어?”
“뭐 하는 거야, 잡아!”
살았나, 죽었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축 처져 있던 여자가
아니었다. 에즈라의 예상치 못한 일격에 얼빠져 있던 호위병들은
급히 에즈라를 쫓았으나 무거운 철 갑옷을 두른 이들이 날렵한
여자를 잡기란 퍽 어려운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허리에 찬 검과 들고 있던 창이 무거웠다. 식사
이후라 그런지 배가 당기고 숨도 찼다. 그들은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에즈라의 옷자락만 보고 달렸다.
도망가던 에즈라가 저 멀리 멈추어 서자 그들은 뜀박질을 멈춘
채 벅찬 숨을 골랐다. 한숨 돌린 후. 허리를 들어 올린 호위병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 젠장……:,
누군가 신음처럼 욕지거리를 했다. 웅장한 알현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문 앞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날 선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늦게나마 그리로 달려가 에즈라의 양팔을 잡아챘으나
그녀는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돌아가시죠. 모시겠습니다.”
“당장 놓는 게 좋을 거예요. 앞으로 내 몸에 손대는 이들은 모두
저주할 테니까.”
에즈라가 으름장을 놓자 호위병들은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차마 닿지 못하고 허공을 배회하는 손은 여러 개였다. 가녀린
여자를 잡아채 끌고 가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으나 살벌한
경고가 두려웠다.
그도 그럴게 눈앞의 여자는 마녀라 하지 않았나. 사람을 제
맘대로 조종하고, 날벌레 잡듯 생명을 눌러 죽이며, 혈육의 피로
목욕을 했다는…… 고국을 멸망시킨 마녀.
“문 열어요.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