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그가 분노를 담아 몇 번이고 소리쳤다. 얼마나 그리 절박하게
매달렸을까. 일분일초가 몇 년 같았다. 그러다 한순간. 에즈라의
몸이 움찔거리며 물을 울컥 토해 냈다.
“우으……”
“에즈라, 에즈라!’’
잠시 인상을 쓰며 신음을 뱉던 에즈라는 이내 특 손을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혼이 빠져나간 시프나드는 겁먹은
어린아이가 되어 곁에 있는 의사를 멀거니 응시하기만 했다.
울듯 찌푸린 얼굴은 허망했고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의사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달랬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정말인가?”
“예. 여기 보십시오. 가슴팍이 제대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물론 정말 위험했습니다.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
“다행이다. 정말……정말다행이야.”
채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흠뻑 젖은 황제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 것은. 시프나드는 푹
숙인 고개를 여자의 가슴께에 묻은 채, 더없이 애처롭게 이마를
부볐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방관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
빈 야수. 야만스러운 짐승인 데다가 글도 모르는 천치. 할 줄 아는
건 칼질밖에 없는 황제. 그리 손가락질받는 남자의 애달픈 모습은
그들을 당황케 했으니까. 쿡쿡 찔려 오는 죄책감에 결국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여긴 정말 오랜만이네.”
히폴로테스는 방파제 끝자락에 서서 새파란 바다를 구경했다.
얼굴에 닿는 짭짤하고 눅진한 바람은 육지의 것이 아닌, 바다의
것이었다.
제국의 여러 항구도시들 중 이곳은 가장 번화한 도시이자
그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티텐의 정복을 위해
제국을 떠나던 날, 이곳에서 배에 올랐고 또 너를 향해
나아갔으니까.
“그때와는 많은 것이 변했죠. 앞으로도 많은 것이 변해 갈
것입니다.’’
“그보다 선박은 이게 다야? 지금쯤이면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때 아닌가?”
그가 바다를 등지며 카코스를 마주 보았다. 심기 불편한 눈빛에
카코스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보신 것처럼 교역이 생각보다 훨씬 더 침체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해 저 역시도
당황스럽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홤제란 놈이 아브타크의 농간질에 손 놓고
있겠지요. 안 봐도 훤합니다! 그 멍청한 놈이 뭘 알겠습니까!”
언제 다가온 것인지 불쑥 나타난 데몰레온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최근 틈만 나면 끼어들어 호통을 치는 터라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카코스가 째려보았으나 눈치까지 없는 그가 알 리
만무하다.
히폴로테스는 저 멀리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을 이곳저곳을 누비는 사람들은 예전보다
활기를 잃은 채였고. 상점 또한 파리가 날렸다. 아마 잊을 만하면
침략해 들쑤셔 놓는 해적들의 소행일 터.
“티텐의 병사들을 집합시켜. 함께 해적을 소탕한다.”
“바로 황성으로 가실 줄 알았습니다! 병력도 꽤 되지 않습니까!
먼저 아브타크 그놈을 처리하는 게……"
보아하니 식량조차 바닥을 보이고 있는 듯했다. 히폴로테스는
골목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뗐다.
“아니. 우리의 목적은 에즈라고, 목표는 티텐의 독립이다."
“대체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몸을 숨기고 있던 티텐의 기사 하나가 은근슬쩍 의중을 물어
온다. 꽤 답답하고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해적을 소탕해 병력을 불릴 것이다. 제국에 티텐의 힘을 보여
줄 것이고, 티텐을 향한 좋지 않은 여론 또한 뒤집을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 그 후에 황성으로 진격한다.”
“예. 맡겨 주십시오.”
카코스가 빠릿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곁에서 얼빵한
얼굴로 히폴로테스를 응시하던 기사는 뒤늦게 고양되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한다. 아브타크는 분명 에즈라를 노릴
거야. 허울뿐인 황제인 시프나드가 에즈라를 곁에 두고 얼마나
버틸지가 관건이다.”
히폴로테스가 그들을 뒤로한 채 골목으로 다가서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아이 하나가 히폴로테스의
허벅지에 이마를 박고 뒤로 나동그라진 것은.
“아얏!”
당황하기도 잠시. 히폴로테스는 끙끙거리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주제에 입술을 물고 울음을 참는
것이 조금 우스워서일까. 잔뜩 굳어 있던 입매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아파!”
“ 미안.”
“몰라! 아프잖아요!’’
어린아이가 걸쭉하게 읊조린 욕설에 내민 손끝이 멈칫거렸다.
그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헐레벌떡 달려와 엄한 얼굴을 했다.
“얼씨구, 이게 어디서 성질이야. 아빠 손 놓지 말라고 했지. 말
안 들으니까 다치는 거 아녀!”
그의 품에는 더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히폴로테스를 보고는 부끄러운지 홱 고개를 돌려 아비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여자아이가 칭얼거리자 남자의 표정은
더없이 풀어졌다. 그러다가 남자는 히폴로테스의 시선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요. 잠시만 한눈을 팔면
사고를 칩니다. 제 불찰이죠.”
“아닙니다. 아이를 보지 못했으니 저도 부주의했습니다.”
남자는 뒤늦게 히폴로테스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선이
굵어 강인한 느낌의 미남자는 어디로 보나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더욱 그를 압도했다.
정말이지 살면서 이리 건장하고 훤칠한 남자는 처음 보았다.
물론 두 번 보지 못할 것이다. 장담할 수 있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율리! 뭣 하고 서 있어. 어서
죄송하다고 인사드리지 않고.”
“칫,죄송합니다."
“아냐, 나도 미안하다.”
눈이 마주치자 사내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는 쭈뼛거리며 제 아비 뒤로 후다닥 달려가더니 몸을 숨겼다.
히폴로테스는 이내 도망치듯 멀어져 가는 이들에게서 쉽사리
눈을 뗄수 없었다.
제 앞에서 꾸짖을 때는 언제고.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들의 엉덩짝을 쓸어 주다가 아프지 않았냐며 다정하게 물어
주고 있었다. 아이는 못내 그것이 좋은지 퉁퉁거리다가도 금세
새로운 것을 향해 손짓했다. 아비는 그것을 못 이기는 척 따른다.
“……히플로테스님?’’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제논의 부름에도 그는 그들이 아주아주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아예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발치를 응시했다. 쓰라린 가슴께를
문지르던 그는 한숨을 흘리며 웃고 말았다. 그렇게라도 허한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다. 한심한 거 잘 아는데. 자꾸만 저들에게서
내가 놓친 것들을 찾았다. 나와 에즈라. 그리고 어쩌면 평생
함께했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내 손과 네 손을 꼭 잡은 채 우리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을, 아주 소중한 것을.
놓친 것은 잊히지 않는다. 잃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언제나 혹독하다.
마지막으로 후회는 해도, 미련은 버린다.
“ 가자.’’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일단 그리
내뱉었다. 지금 나는 속죄해야 하니까. 하지만 사랑은 그런 거
아닌가. 목숨을 내주어서라도 구해 내고 싶다가도 결국 함께
살아가고 싶어지는 거.
늦은 거 잘 알지만. 내게 남은 건 너를 위한 죽음뿐일 테지만.
지금만큼은 이리 상상해 보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너와의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데.
어째서 소중히 하지 못했던 걸까. 이 사랑이 벌이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달랐을까.
뒤늦게 목적을 상기해 낸 남자는 거침없이 멀어져 갔다. 그를
지켜보던 이들도 하나같이 그를 줄 지어 따랐다.
에즈라는 생전 처음 보는 방에서 눈을 떴다.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기증이 일었다. 머리를 털어
정신을 차린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저녁인 듯 미미한 달빛과 촛대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방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크기는 전과 다를 것 없이 적당했으나 가장
놀라운 것은 침상 하나 빼고는 방 안에 든 것이 없었다. 그저 벽과
또 천장, 빛과 어둠뿐. 아무것도 없었다.
왈칵 두려워진 에즈라는 곧장 문으로 달려갔으나 예상했듯
열릴 리 만무하다. 몇 번 문을 두드려 보던 그녀는 가망 없는
일에서 손을 뗐다. 힘 빠진 몸을 옮겨 침상에 걸터앉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언제 깼어? 방금? 뭣 좀 먹을래?”
“너 이틀 동안 내리 잠만 잤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거짓은 아닌 듯 그는 퍽 애가 닳은 얼굴이었다.
“말 안 하기로 작정한 거야? 내가 직접 입을 벌려 줘야 말을
할까. 용?’’
훌쩍 가까이 다가가 짐짓 사나운 목소리로 겁박했으나 별다른
대꾸가 없다. 기세를 잃은 남자는 곧 에즈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즈라, 나도 너를 가두고 싶지 않았어. 네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네 자유를 보장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 좀 진정되면 그때 다시 밖으로 나가게 해 줄게.”
“왜요? 왜 내 탓을 하는 거예요? 내가 또 죽을까 봐 두려워요?
그렇다면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것도 당신 욕심
아닌가요?”
사람은 사랑받는 만큼 잔인해질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특권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너…… 내가 너를 위해 뭘 했는지 알기나 해?”
“아뇨,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당신이 나를 위해 뭘
포기했는지 내겐 중요하지 않아. 왜냐고?”
고요히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어깨를
떨었다. 온몸 가득 퍼져 나가는 분노에 세차게 뛰어 대는 가슴은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억울함과 사무치는
원망. 그리고 갈 곳 잃은 증오까지.
“나는 당신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 없어!”
에즈라는 처음으로 크게 내질렀다. 오로지 눈앞의 남자가
괴로워하기만을 바라며 그렇게 그를 할퀴었다.
“당신 멋대로 나를 마음에 둔 거잖아! 왜 나한테까지 그걸
강요해! 나는, 나는……!”
“세상엔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이들이 있지. 가축처럼.”
격앙되어 가는 외침을 그가 뚝 끊어 냈다. 가축. 그 단어에
에즈라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손 안에서 옷자락이 험하게
구겨졌으나 에즈라는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반평생을 살아온
티텐에서의 삶도, 히폴로테스의 곁에 머물렀던 삶도.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삶까지.
나는 가축이었던가.
시프나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에즈라의 앞에 버티고 섰다.
커다란 몸집의 그림자가 에즈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삼켰다. 그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에즈라의 뺨을 감쌌다.
“너와 나는 같아. 나와 내 어미도 같았지, 뭐 지금은 죽어
버렸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무기는 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만들어 낸 칼날 같은 말. 그리고 그게 안 되면…… 연민에
호소하며 매달리고 또 구걸하는 것.
“내 마음만이라도 인정해 주면 안 돼? 나도 잘 알아. 어차피
네가 나를 사랑할 일 따위, 평생 없을 거란 거.’’
“불쌍한 척하지 마요. 당신이 나를 속인 그 순간부터, 나는 그런
거다 버렸으니까.”
허나 그 두 가지 중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건 없었다.
경멸만이 가득한 녹색 눈동자가 첨예하게 번뜩인다. 두 번 다시
저 눈빛이 온화한 호선을 그릴 일은 없을 것이다.
“줄 게 없어요. 내겐 동정마저도 당신 것이 아니야.”
매정한 말만 내놓은 채 그녀는 뒤를 돌았다. 에즈라가
시프나드를 스쳐 지나가던 찰나. 급히 뒤를 돈 시프나드는
에즈라의 손목을 잡아챘다. 거친 완력에 휘청이는 에즈라를
침상으로 끌고 가 내던지자 에즈라는 그대로 어푸러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이제부터 제대로 잘 보두. 나는 네가 아끼는 그네를 망가뜨릴
거야. 그리고 지금 여기서 너를 강제할 거야.”
잇새로 씹어뱉듯 남자가 경고했다. 어깨를 움켜 쥔 커다란 손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기만 하다. 에즈라는 잘 알았다. 지금 그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걸. 나를 상처 주고 말겠다는 오기였다.
“할수있으면 해 봐요.”
에즈라는 턱을 들어 올려 그를 비웃었다. 이런다고 상처받을
사람이 자신뿐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나를 짓밟은 뒤 너는
정상일 것 같은가. 에즈라는 무언의 말을 전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으득, 그가 턱이 불거져라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시프나드가
어깨를 밀어 넘긴 후 제 입술로 고개를 내리던 그때였다.
당장이라도 겹칠 듯 다가오던 입술이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그가
휙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살폈다.
“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