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백성들이 전대 황비님을 황비로 받아들일 리 만무합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고위 귀족의 여식과 혼사를 추진해
주십시오.’’
“혼사? 나보고 너희가 정해 주는 여자랑 혼인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이는 게 예사롭지 않다. 본래 그가 노린
목적은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아브타크의 교활한 계략을
알아챈 시프나드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야, 내가 종마야?”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황제는 이마를 감싼 채 물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잔인한 적막은 그곳에 제 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방증했다.
그것이 얼마 전의 일로. 이름뿐인 황제가 된 저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에즈라를 황궁 안에 두기 위해서 결국 혼인을
빙자한 거래에 응해야 했다.
황제라는 자리는 생각과 너무도 달랐다. 신경 써야 할 곳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저 혼자서는 무언가를 추진할 수 없었다.
작은 것 하나도 제 맘대로 할 수 없는 자리인 것이다. 하나를
가지려면 둘을 내주어야 하는. 비참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이 자리를 놓을 수 없는 건…… 에즈라를 내 손안에
잡아 둘 수 있으니까.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셔서 놀랐답니다.”
“고마워.”
시프나드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응접실을 대강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다. 참 슬픈 곳이다. 슬럼에서
태어나 죽어 나가는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주 슬픈 천국. 그는
윤기가 흐르는 미색 커튼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헛웃음을 뭐라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여자의 뺨이화르륵
달아오른다. 그녀는 뜻밖의 횡재에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황제의 용모가 너무 훤칠하지 않은가.
황제만 걸칠 수 있는 의복은 흐트러져 있고, 검은 머리칼도
대충 쓸어 넘긴 모양새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야성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무엇보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꼬리는 매서웠지만 어딘가
야릇해 절로 발끝을 오므라들게 했다. 비천한 출신의 허수아비
황제라 기대 없이 나온 자리였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를 핥듯 응시하는데도 황제는 팔짱을 낀 채 김이 올라오는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흥 없는 얼굴이 자존심 상할 법도
했으나 오히려 승부욕을 불러일으켰다. 아아, 저 무관심한 시선이
나를 향할 때의 짜릿함이 란.
그녀가 홀로 덧없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때였다. 황급히
달려온 남종 하나가 허리 숙여 황제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
순간.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새카만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인다. 급격한 변화에 입만
벙긋거리는데 황제는 별다른 말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는 뭐가 그리 다급한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럼. 혼인하는걸로알지.”
시프나드는 역겨운 여자로부터 미련 없이 등을 돌린 후 큰
보폭으로 도망치듯 멀어져 갔다.
‘황제면 뭐 해. 출신도 모르는 더러운 종자야. 아버지 명령만
아니었다면 얼굴 마주할 일 따위 없었을 거라고.’
응접실에 들어서기 전,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춘 채 시프나드는
여자의 투덜거림을 들었었다. 하녀와 마주 보고 낄낄거리던
고약한 태도가 눈에서 가시지 않는다. 그리 조롱할 때는 언제고.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뒤바뀌던 태도라.
시프나드는 이를 악물며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저런 여자
따위 처박아 두면 그만이다.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시프나드는 초조함에 달리기 시작했다.
“에즈라 님. 부디 걸음을 멈추세요.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이리 막무가내로 몸을 움직이시면……!”
“따라오지 마세요.”
셀리는 차마 에즈라에게 손을 뻗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팔을
붙잡고 돌려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을 가로막고
가녀린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옭아맬 수도 있었지만 역시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이러다가 또 쓰러지실 거예요. 제발 다시 침실로 돌아가세요.
네?”
에즈라는 셀리의 애원에도 아랑곳 않고 걸음을 옮겼다. 불과
며칠 전까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던 터라 몸 상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묶여 있던 팔다리에는 여전히 밧줄 자국이 선명했고.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가득했다. 수시로 어지러워
줄곧 쓰러지기도 했다.
손끝 하나까지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산송장처럼 드러누워
숨만 내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문득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생을 갉아먹는 악몽에 지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다 포기하고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정신을 놓고 싶었다.
때때로 막혀 오는 숨통에 진정 숨이 멎을 듯했다. 그렇게 숨이
넘어가기를 바라다가도 결국 숨을 터 놓으며 컥컥거렸다. 그게
못내 슬펐다.
“안돼요. 이제 돌아가세요.”
일순,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셀리가 달려와 앞을 가로막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고르던 에즈라는 울듯
신음했다.
“나도, 나도 숨 좀 쉬고 싶어서 그래요.”
“에즈라님.”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이 정도면 많이 괴로웠잖아.
아니야?”
셀리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을 닫고 그대로 멈추어 섰다.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선 에즈라는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전 황제가 만들어 놓았다는 후원으로 걸음하는 여자의
발길마다 눈물방울이 새겨진다.
본궁의 뒤편. 후원으로 향하는 비밀스러운 계단. 반듯한 계단을
내려가자 아담한 문이 나타났다. 에즈라는 피 맺힌 손끝으로
그것을 밀었다. 이윽고 드러나는 풍경을 보며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문턱을 넘지 않은 채로. 그림 같은화를 먼발치서
구경했다.
그와 나눈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별것 아닌
시간들이었다. 에즈라는 천천히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남자가
매어 준 그네에 다가가 툭. 그것을 건드렸다.
주인 잃은 그네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지만 주저 않고
그네에 앉았다. 밧줄을 꼭 잡고 발로 땅을 밀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가르며 그네는 잔잔히 움직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등 뒤에 그가 나타날 것만 같다.
밀어 달라고 말하면, 가볍게 등을 밀어 줄 것 같고. 조금 더 밀어
달라고 하면……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할 것만 같아.
한 번만 더 이곳을 보고 싶었다. 그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니까. 아무렇게나 꺾어 온 풀꽃 다발처럼. 오로지 나만
생각하던 남자의 손이 스쳤을 테니까.
사실은 제대로 사랑해 보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 날이 내
생에 마지막 날이라도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사랑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자격 없다는 건 너무 잘 아는데.”
다른 생이라면. 그래. 이번 생이 아니라 다음 생이라면……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고여 버린화는 너무 삭막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라 버린
들꽃들은 풀 무더기로 보였다. 그날의 황홀했던 모든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에즈라는 천천히 그네에서 일어서
호숫가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 나갔다. 발목에서 찰랑이던
물결은 어느새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목으로. 목 부근에서 넘실거리는 물이 턱을 적시고
입가를 적신다. 한 발만 더 내밀면 디딜 곳 없어 풍덩 빠져 버릴
것이다. 빠지면, 그래서 마구 허우적대다 보면 그가 올 거야.
그가 나타나서 허리를 잡아 주고, 숨통을 틔워 주고 물방울
맺힌 얼굴을 마구 쓸어 주는 거야. 그리고 티텐에서의 그날처럼,
당신은 울먹이는 나를 놀리는 거지. 그럼 나는, 나는……오
그날 못 했던 말을 전할 거야. 당신을 너무 사랑한다고.
“에 즈라!”
나는 분명 그날, 사랑을 느꼈다고.
“안 돼! 에즈라!”
뒤에서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들려오는 절박한
부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히폴로테스의 것이
아니었기에. 에즈라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에즈라.”
수면 위에 아슬아슬하게 보이던 여자의 인영이 사라지자
시프나드는 곧장화로 달려갔다. 절박하리만치 허둥지둥
물살을 헤치고 나아갔다. 에즈라가 사라진 지점 가까이 다다른
시프나드는 깊게 잠수했다.
다행히 그는 금방 저 아래로 멀어져 가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잔잔하고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든 것만 같은 여자를.
주변에서 너울대는 검은 머리칼 역시 보드랍게만 보인다.
너무한 거 아닌가.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지 않는대도 내 앞에서 죽어 버리다니. 그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그럼에도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 너를 영원한 잠에 들게 할
수는 없어. 아프고, 울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해도 네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나를 원망해도 좋으니…… 나를 떠나지
마.
시프나드는 가느다란 팔을 덥석 잡아챘다. 가벼운 몸은 끄는
대로 너무도 쉬이 올라왔다. 수면 위로 숨을 뱉기 무섭게 그는
에즈라의 몸을 뒤에서 감싸 안고 물 위를 유영했다.
“ 젠장!”
뭍으로 에즈라를 밀어 올린 뒤 그 역시화를 빠져나왔다.
혼비백산한 하녀들과 시종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에워쌌지만
시프나드는 오직 에즈라의 햠을 두드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에즈라, 정신 차려 봐.”
핏기 없이 질린 뺨을 두드리고, 잔뜩 젖은 어깨를 감싸고
가슴팍에 귀를 댔다가 어쩔 줄 모르고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금방이라도 품 안에서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몸을 부여잡으며 안
된다.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에즈라, 왜, 왜 눈을 안 떠.”
그럴수록 차갑게 식어만 가는 여체가 두려웠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게 무서워졌다.
“뭐라도 좀 해 봐! 살려 내! 살려 내라고!”
이윽고 홀딱 젖은 황제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향해 마구
소리쳤다. 부름에 따라 의사들이 달려오긴 했으나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나서지 않았다. 저 여자를 살렸다가 어떤 후폭풍을
맞을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저런 마녀 따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옳다. 그리 여기며 물러나려던 그때였다.
“저리 비키게!”
뒤늦게 달려온 의사 하나가 사람들을 헤치고 시프나드의 앞에
나섰다. 시프나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든 말든 의사는 황제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에즈라를 험하게 채 갔다.
그는 에즈라를 바르게 눕힌 후 턱을 들어 올려 숨길을 텄다.
이윽고 주먹을 쥐고 가슴께를 사정없이 짓누르자 시프나드는
화들짝 놀라 의사의 팔을 꽉 잡아 저지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이럴 시간 없습니다!”
나이 든 노인의 호통에 시프나드는 곧장 손을 놓았다.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에즈라는 더욱 창백하게 질려만 가는 듯했다. 온
힘을 다해 가슴께를 누르는 노인을 지켜보던 시프나드는 결국
보다 못해 그를 밀어 낸 두I,직접 그녀의 가슴팍을 자극했다.
“내가. 내가 너를 위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데.”
내가 너를 위해 월 내버릴 수 있는데. 모든 걸 감수하겠다
다짐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눈 떠! 눈 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