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태연한 말투가 그의화를 돋운 모양이었다. 쾅. 주먹으로
테이블을 부서져라 내리친 남자는 분노에 차 버석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가 말을 잇지 못하자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년이 쭈뼛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 얼마 전부터 아브타크는 티텐 출신의 사병들과 살수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명령인 줄 알고 나갔다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전우들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어요. 아브타크는……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걸요.”
“그 자식은 괴물입니다. 절박한 이들의 소망을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하는 일은 추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치미는 분노에 그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여전히 꽉 쥔
주먹에서 비참한 설움이 전해져 왔다. 히폴로테스는 눈을 내리깐
채로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나는 티텐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아브타크와 별다를 것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내게 온 거지?’’
“우, 우리는 황제께서 저희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어째서?”
“지금 황제께서는 아브타크 때문에 황권을 잃으셨고, 죽음의
위기까지 겪으셨잖아요. 아닌가요?”
나어린 살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흘깃거리는 시선을
보아하니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우리가 그 자식 때문에 얼마나 더러운 짓까지 했는데! 심지어
죄 없는 여자를 몰아붙여 아이를 잃게 하고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무고한 살상을 저질렀으니 우리라고 해
봐야 그쪽과 다를 거 없습니다. 똑같은, 똑같은 죄인입니다.”
“아이를…… 잃게 해?”
카코스는 문득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몸을 바짝 굳혔다.
위험하다. 더 이상 저 남자가 입을 떼게 해서는 안 되었다.
카코스가 막 나서려던 찰나, 히폴로테스는 벌떡 일어나 남자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다시, 다시 말해 봐.”
“이……가. 갑자기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갑자기?
작은 중얼거림 뒤로 붉은 눈이 살인귀처럼 번뜩였다. 짙고
선명한 분노에 남자는 덜덜 떨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바동거렸으나 무용했다. 이내 싸늘하게 식어 내린 남자는
무표정해졌다.
“ 윽!”
“히폴로테스님!’’
그는 무자비한 주먹으로 남자의 뺨을 갈겼다. 순식간에 피가
터진 입술 새로 울컥 피가 흘러나와 히폴로테스의 손등에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곳에 모여 있던 이들은 몰아치는 공포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갔다.
“제대로 말해야 할 거야. 말해. 누가, 뭘 어쨌다고?”
그가 더욱 숨통을 틀어쥐었다. 괴로움에 허덕이던 남자는
어렵사리 터진 입술을 열었다.
“저, 저는 아닙니다. 그 일을 저질렀던 동료들은…… 모두
시프나드의 손에 죽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아브타크가…… 황제의 여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손끝이 벌벌 떨려 왔다. 죄 없는 여자가 아이를 잃었다고 했다.
죄 없는 여자. 황제의 여자. 아브타크가 노릴 여자가 그녀 하나
말고 더 있을까. 그 생각이 스친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고 발밑이
아득해진다.
잊고 있던. 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외면해 왔던 장면이 불쑥
나타났다.
‘이런 짓. 어떻게 하면 그만둘래.’
‘……들어주실 건가요?’
벅찬 상황 속에서도 네가 끝까지 지켜 내려 노력했던 것.
‘아기의, 아기의 상태를 알고 싶어요.’
“티텐은 지금 최악의 상황입니다. 아직도 수습을 다 하지 못해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은 황폐하고, 전염병까지 일어 죽어 가는
이들이 부지기숩니다.”
멱살을 틀어쥔 주먹에 힘줄이 불끈 솟았으나, 이번에는 남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와스터는…… 티텐을. 티텐의 백성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의 힘으로 티텐을
독립시킬 겁니다. 도와주십시오. 저희도 목숨을 바쳐 당신을
돕겠습니다.”
소리 없이 바스러져 가는 히폴로테스 앞에 남자는 넙죽
엎드리며 애원했다.
“못 할 짓 한 거 압니다. 잘 압니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우리는……”
히폴로테스가 그의 멱살을 버리듯 놓았다. 더 이상 무언가를
생각하기 버거웠다. 휘몰아치는 절망과 공포, 자괴감에 빠져 그는
결국 얼굴을 가리고 신음했다.
소리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아서.
악을 쓰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각조각 부숴 버리고 싶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홀로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이 아이 아버지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맞아,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
“아……:’
히폴로테스는 또다시 젖어 가는 뺨을 느끼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기괴하게 들리는 웃음은 점점 작아지더니 흐느낌이
되었다.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를 멀거니 지켜보던 남자 역시 잔뜩 얼굴을 구기며
괴로워했다.
“……죄송합니다.”
‘웃지 말라니까 그렇게 우는 거예요? 울지 말아요. 당신이 울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고르는데 문득 따뜻한 손이 뺨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 그 날. 볼품없이 일그러진 내게 너는 애달픈 얼굴로
말했었지.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요.’
그러니 견뎌 내야 한다. 내게 남은 건 후회가 아니니까. 이제
뒤를 돌아볼 시간 따위 없으니까.
히폴로테스는 얼굴에서 손을 뗀 후 닥친 현실을 제대로
마주했다. 그는 허리춤에 찼던 칼로 손을 뻗었다. 설마, 저 남자를
죽이기라도 할 참인가. 안 된다. 그리 두어서는 안 되었다.
카코스가 덜컥 겁을 집어먹고 그를 말리기 위해 막 나서려던
찰나였다.
제논이 카코스의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
이를 악문 카코스가 경고하듯 제논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뻗어 카코스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제논 뒤로. 히폴로테스가 칼을 뽑아 드는 것이 보였다. 급박한
상황에 카코스가 제논을 밀치려던 그때, 히폴로테스는 칼을 반
바퀴 휘둘렀다. 하늘을 향했던 칼끝이 바닥을 향하고, 깨끗이
잘려 나간 소맷자락이 스르륵 바닥에 떨어진다.
“다시 황성으로 갈 거다. 황성으로 가서…… 아브타크를 죽일
거다.’’
살수는 잘려 나간 옷자락을 말아 쥐며 고개를 수그렸다.
히폴로테스의 손목에 매듭지어진 낡은 천 조각.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나는 황제가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티텐을 대신해
싸우겠다.’’
황제, 아니 황제였던 남자의 얼굴은 빈틈없는 강철 같았다.
“목숨을 걸고 독립을 약속한다. 그러니
말을 늘이던 남자는 손안에서 칼을 돌려 칼날을 숨겼다. 턱을
들어 올린 채 모두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게 복종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꿇었다.
폭풍이 지나가고 새 시대가 밝았다. 황제로 즉위한 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이른 새벽, 푸른 빛에 잠긴 알현실에는
냉기만 흘렀다.
“축하하네. 이제 뭐라 불러야 하나. 폐하? 그래, 이제는 폐하라
부르며 고개를 조아려야겠지.”
평소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사치스럽게 치장한 귀족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야 할 테지만, 지금은 단 두 사람만 존재했다.
시프나드는 황금 의자에 떡하니 앉은 채로 아브타크를 맞이했다.
아브타크의 손에는 빳빳한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양피지에 쓰여진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다가 툭. 반으로 접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감히 황제의 계단에 발을 들였다.
“퍽 애가 달았나 보I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날이 밝기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오는 걸 보면.”
“본래 거래는 빠르게 끝을 맺는 게 좋아. 그리고 서로
뒤돌아서는 순간, 뒷말은 삼켜야 하지. 알잖나, 나는 질질 끄는 걸
제일 싫어해. 아주 넌덜머리가 나.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어.”
아브타크는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꼭 늙고 교활한 뱀
같았다. 바닥을 질질 기는 주제에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도 모르는
뱀. 시프나드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궁금한 게 있어. 어째서 직접 황제가 되지 않은 거지?
여기까지 와서 황실의 혈통이니 뭐니,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아. 내가 아니라 네놈이 황제가 되었으면 될 일
아닌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당장 나를 죽이고 황제가 되어도 될
텐데?”
“젊어서 그런가, 뭘 모르는군. 세상의 권력이 모두 황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황제라는 자리는 그 무게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지. 오히려 포기해야 하는 것 천지야. 또
거추장스러운 것을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하고 그만큼 자유는
억압되지. 그리고 무엇보다……:’
시프나드는 그 교만한 태도에 입가를 비틀었다. 역겨움이
치밀어 절로 눈가가 떨렸다. 앉아 있는 황금 의자에서 당장이라도
거친 가시가 솟구칠 것만 같다.
“외로운 자리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외롭다 한다. 시프나드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었다. 그는 아주 힘겹게 에즈라를 떠올렸다가
지워 냈다. 과연 그녀가 내 곁에 있어 줄까. 그런 의심이
들었으므로.
그것을 간파한 아브타크는 키들거리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렵게 꼬여서 나도 조금 힘들었네. 뭐, 이런저런 피해도
많이 보았고. 하지만 결국 움켜쥐었으니 된 거야.”
히폴로테스가 라티아를 황비로 들였더라면, 그리고 나를
재상으로 임명했다면. 이렇게까지 귀찮아지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절로 이가 갈렸다.
“아직 남은 게 있지. 그 날은 놓쳤지만 히폴로테스는 반드시
죽여야 해.”
히폴로테스의 죽음이라. 시프나드는 온종일 머릿속에서 그를
베고, 가르고, 또 찢었다. 그의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가벼운
마음으로 에즈라를 품에 안을 것이다.
“그는 그 여자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할 거네. 왜냐고? 네가
에즈라를 죽이지 못할 거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어때. 자신
있나?”
“충분히.’’
자신 있었다. 그를 죽일 자신이. 하지만 단 한 가지는 자신이
없었다. 에즈라, 네가 나를 보게 할 자신은 없어. 내가 그놈을
죽이고, 우리 둘만 세상에 남은 그 날. 네가 나를 보게 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오
“갖고싶어.”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그것만이 진심이고. 또 원하는 단 한 가지였으므로.
새로운 황제의 즉위는 눈 깜짝할 새 이루어졌다. 하루 새
손바닥 뒤집듯 천지가 개벽했으니 놀랄 법도 하건만, 백성들은
그저 시큰둥했다. 황제의 혈통이니 뭐니.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되레 최전방을 지켜야 하는 병사들이 반란에 혈안이 되어 국경
수비를 등한시하지 않았나. 그 결과로 제국 이곳저곳에 해적의
출몰이 잦아졌다.
해안과 인접한 지역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았고, 수도 인근
지역이라고 딱히 다를 건 없었다. 흉년의 여파로 삶은 팍팍했고.
들끓는 해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뿐인가. 저들끼리 치고받느라 민생을 돌보지 않는
귀족들까지. 그러니 하루 벌어 먹고살기도 벅찬 이들에게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는 건 그다지 피부로 와닿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혼란이 하루할리 재정비되는 것
정도였다. 그들은 제국의 부흥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 정도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제국 전체를 감싼 혼돈. 황성 역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같이 귀족들은
황제를 알현했다.
최근화두는 감옥에서 풀려난 에즈라의 처신 문제였다.
“그 여자는 전 황제의 황비입니다. 그뿐입니까! 망국 출신의
여자 아닙니까. 백성들 사이에서도 남자를 흘리는 마녀라, 기괴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 여자를 어찌 곁에 두시겠다 하십니까.
당장이라도 죽여야 합니다.”
“말조심하라! 한 번만 더 에즈라를 그렇게 모욕하면 네놈
목부터 베겠다.’’
젊은 귀족이 호기롭게 나서며 외치자 시프나드는 결국 성질을
참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뛰쳐 내려와 한 대 갈길 듯한 기세에
귀족은 입을 닫았다. 황제나 되어서 저리 품위가 없어서야!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귀족들은 은근히 불만을 내비쳤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아. 체통. 근데 어쩌지? 출생이 미천해서 그딴 거 모르는데. 할
줄 아는 게 칼질밖에 없어.”
시프나드가 대놓고 이죽거리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브타크는 마치 경고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불꽃이 튀기는 신경전. 누구도 먼저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귀족들은 숨죽인 채 진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다.
“좋습니다. 전대 황비님을 곁에 두십시오. 대신 대외적인
부분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