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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94화 (94/113)

94화

말은 쉬지 않고 달렸다. 황성을 빠져나간 히폴로테스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질주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은 구름이

짙게 끼어 별 하나 비치지 않는다.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 비가 내리는 듯했다.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에 눈가가 젖고, 또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니까.

히폴로테스는 뒤늦게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축축한

공기와 텅 빈 골목. 수도의 변두리로 흘러들어 온 터라 주변은

적막하다. 앞서 내달리는 카코스를 따라 그는 그저 말을 달렸다.

아직까지도 머리가 멍했다. 쓰라린 가슴에는 시린 바람만이

머물렀다 곧 빠져나갔다. 그 무엇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의미 없었다.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과 흐린 시야. 그곳에

여자의 마지막이 맺힌다.

어렴풋이 웃어 보이던 네가. 울면서도 끝내 미소 짓던 너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겠지.

“……멈춰라.”

그 어떤 말도 나누지 못했다. 오늘이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매일, 매 순간 속삭일 걸 그랬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모든 걸 버리고 나를 사랑한 너를 위해…… 이제

나도 버릴 준비가 되었다고. 그러니까 다시 한 번만 더 나를

사랑해 달라고.

“지키지 못했다.”

나는 늘 너를 지키지 못했고, 너는 또 나를 구했어.

“히폴로테스 님……"

“나도 한 번쯤은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감히 다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카코스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할 듯합니다.”

히폴로테스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말에서 훌쩍 내려섰다.

그는 히폴로테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브타크는 끝까지 추격해 올

겁니다.”

“어째서 내명령을 어긴 거야.”

뒤늦게 들끓는 분노를 힘겹게 내리눌렀다. 음습하고 좁다란

골목에 살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기서 다 같이 죽기라도 할 참이었나? 나를 구하겠다고,

고작 너희 세 명이서?”

분노하는 사람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얼굴. 그것은

삶을 포기한 이의 얼굴이었다. 지금 상태라면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것이 더욱 두려웠다.

카코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예. 죽음도 불사할 마음이었습니다. 저희 셋이라도 끝까지

투항하려 했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 당신을 구할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어 마땅하다 판단했습니다.”

히폴로테스는 말에서 내려서 세 사람을 마주 보았다. 단호한

얼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후회도 없다. 저 같은 이에게

이토록 을곧은 충성을 내보이는 이유는 뭘까.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이 살아왔던 밑바닥 인생들. 동정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저 내 처지와 비슷해 보였던 것뿐인데.

“너희는 내가 너희를 구원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거창한

의도가 아니었어. 내게 필요하니 손 내밀었던 거다. 그러니

스스로 의미 부여하지 마.”

차갑게 일갈하며 뒤돌아선 남자는 위태롭게 떨고 있었다.

카코스는 전해져 오는 아픔에 울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 순간,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그는 하나뿐인

구원이었다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저를

알아봐 준 것입니다. 배곯는 이방인 사기꾼을 책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저는 당신으로부터 길을 챂았고, 빛을

보았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멍청하고 몸만

쓸 줄 아는 등신이라는 멸시만 받아 왔습니다. 그런 제 무용을

칭찬하고, 황자의 호위 자리까지 내어주셨던 그날 저는

목숨으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데몰레온은 이 미 눈물을 줄줄 홀려 대고 있었다. 카코스가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았으나 데몰레온은 눈물을 닦아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멀뚱히 서 있던 제논과 히폴로테스의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저는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히폴로테스 님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불명예를 안고 살 바에야,

죽어서라도 명예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융통성 없기는. 제논은 끝까지 진실만을 전했다. 고개 숙여

낮게 웃던 히폴로테스가 나지막이 입을 뗐다.

“……그래서 내가 월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가 처음으로 물어 왔다. 떨리는 말끝을 눈치챈 제논은 가슴

한 켠이 꽉 죄어 오는 것을 느꼈다.

“세상을 적으로 돌리신다 해도 끝까지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칼을 잡아 주십시오.”

히폴로테스는 손목에 묶은 뉙스를 내려다보다가 더듬어

나갔다. 고요한 남자를 지켜보던 제논은 한 발짝 다가서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라 할 수 있는 칼을 두 손

들어 바쳤다.

“오로지 황비 님, 한분만을 위해서요.”

나 자신이 아닌. 수없이 무가치한 것들이 아닌. 오직

에즈라를 위해서.

이들의 말이 맞았다. 한심하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에즈라를 그곳에 두고 온 이상, 끝까지 포기할 수도 없었다.

히폴로테스는 주저 없이 제논이 내민 칼을 받아 들었다. 능숙한

몸짓으로 허리춤에 칼을 찬 남자의 붉은 눈이 냉철하다.

“테르모스는?”

짧은 물음에 침잠되어 있던 카코스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그는 상기된 어조로 대답했다.

“테르모스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럼가로

모시겠습니다.”

히폴로테스는 은근히 미간을 좁혔다. 안 그런 척하면서 저

몰래 이런 일을 꾸몄다니. 이들은 자신이 반란에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을 동안, 저들끼리 이미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바보가 된 기분이야.”

“……너무 기분 나쁘게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데몰레온의 풀 죽은 목소리를 뒤로한 채 히폴로테스는 먼저

걸음을 뗐다. 슬럼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타고 온 말을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려둔 채, 부러 돌고

돌아 슬럼의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이미 수도에는 병사가 깔린 듯했다. 한발만

늦었어도 그들에게 잡혔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등골이 다

서늘했다. 소란스러워지는 지상의 두런거림을 들으며 그들은

개미굴 같은 슬럼을 더욱더 깊이 파고들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이들 몇몇과 어깨가 부딪치기도

했으나, 그들은 이내 세 사람의 몸집을 보고 몸을 퍼덕이며

달아났다. 그러기를 몇 번, 슬럼가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곳에 들어섰다.

“가관이군.”

폭이 좁은 골목을 따라 발로 차면 부서질 듯한 판잣집이

빼곡하다. 지하 중에서도 지하라 앞이 깜깜했으며 무언가 썩는

듯한 냄새가 진동했다. 등잔 하나 내놓을 수 없는 형편들인지

불빛은 하나도 없었다.

고약한 내음이 풍겨 오자 데몰레온은 대놓고 코를

틀어막으며 투덜거렸으나 히폴로테스는 그저 묵묵히 길을 따라

걸었다.

“다 왔습니다.”

카코스는 일 층짜리 목조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건물 안에는 질 낮은 옷감들이 번잡하게 널려

있었다. 옷감에 먼지가 쌓이지 않은 걸 보아하니 장사를 하긴

하는 모양이다.

“뭐 하는 곳이지?”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뚱딴지같은 대답이 되돌아온다. 아무 기척도 없는데 주변을

휘휘 둘러 살피는 것을 보아하니 퍽 비밀스러운 일인 듯했다.

히폴로테스는 미 간을 좁히 며 낡은 포목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리로오시죠.”

뽀얗게 았은 먼지가 날려 숨이 막혀 오고 손끝에 거미줄이

엉겨 온다. 대강 거미줄을 털어 내던 히폴로테스는 아무렇게나

매달린 옷감 너머, 테르모스의 기척을 눈치챘다. 그가 시야를

가린 천을 넘기자 테르모스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입술에 검지를 대 보이며 침묵을 요구했다.

히폴로테스 대신 카코스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자

테르모스는 상점 구석진 곳으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좁다란 목조 건물 뒤편에 방 한 칸이 더

있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법한 얼기설기한 나무문. 그 문을

툭 밀어 열자, 탄탄해 보이는 목재 테이블이 보였다.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촛대가 놓여 있다.

“누구지?”

히폴로테스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낯선 이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짧은 순간 그들을 파악한 히폴로테스는 낮게

조소하며 문턱을 넘었다.

“이렇게 얌전하게 기다리는 걸 보아하니. 아브타크가 보냈을

리는 없고.”

아브타크. 그 이름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지금나랑 뭐하자는 거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모두 이십 대 중후반의 젊은

청년들. 심지어 솜털이 보송보송한 이까지 있었다. 허나 험하게

칼을 잡아 온 것을 티 내기라도 하듯 드러난 신체 곳곳이 성치

않았다.

팔과 손등, 심지어는 눈썹 부근과 뺨까지. 히폴로테스는

참혹한 상처들을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히플로테스 님, 이자들은……,”

“우리가 직접 말하겠네.”

테르모스의 말을 끊어 낸 남자는 히폴로테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희는 티텐의 백성들입니다. 당신이 마녀를 유혹해

멸망시킨 티텐.”

“그래서?”

뻔뻔한 얼굴로 되묻자 말을 꺼낸 이의 미간이 단번에

구겨졌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게 아마 저들의 대장 격인

듯했다.

“고국을 멸망시킨 사람을 앞에 두고 뭐 하는 거지?

당장이라도 일어나 칼을 빼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보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브타크군.”

툭 내뱉은 말에 그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설마 그런 것도

간파할 줄 몰랐나. 어느새 상석에 았아 있는 히폴로테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괬다.

“너희가 아브타크 밑에서 굴러먹던 살수라는 건 알고 있어.”

“그걸 어떻게……,”

“손등만 탔으니까. 아브타크의 살수들은 타들어 갈 듯한

날씨에도 꼭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더라. 그게 더 눈에 띈다는 걸

혼자만 모르나 봐. 멍청하게.”

범상찮은 남자. 그는 한결같이 권태로운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시뻘건 눈길이 스치는 곳마다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르누아르는 머뭇거리다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는 아브타크에게 속았습니다. 티텐이 제국에 복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아브타크는 직접 티텐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복원 중인 티텐을 도와주며 민심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죠.”

“접근?”

“예. 그가 접근한 이들은 젊고 힘 있는 기사들이었습니다. 아,

참고로 저희는 모두 최전방에서 싸우던 왕실 기사단입니다.

살아 있는 이들은 남아 있는 티텐이라도 재건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갈았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렇게 무참하게 우리를 짓밟은 제국을

무찔러 주리라. 독립을 이뤄 내리라. 뜻을 함께한 이들은

수십에서 급격히 늘어나 수백까지 모였습니다.”

“……계속해.”

“그는 다가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자신의

사병이 되어 반란에 가담한다면, 티텐을 독립시켜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반란이 성공하면 자신은 제국의 대상이 될 테고,

그럴 능력쯤은 충분히 있다며 자신이 시키는 일은 뭐든 하라

했습니다.”

“그럼 기다리면 될 일 아닌가. 아브타크는 곧 재상이 될

텐데.”

“그렇게 일이 풀렸다면 우리가 당신을 찾아올 일 따위 없었을

겁니다! 아브타크는,그 자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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