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황금관은 그냥 주워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아브타크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그 칼은 깊이 생각하고 쥐어야 할 거야.”
낮은 경고에 아브타크는 천천히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렸다.
눈살을 찌푸린 남자의 탐욕은 문득 주저하는 듯했다.
“……거기에 묻힌 피가 얼만데.”
고작 한마디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공간 속, 히폴로테스는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그리 자신을 위로하며 에즈라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즈라.’
사실 나는 겁이 많아. 욕심도 많고 또 이기적인 데다가
그만큼 불안해하기도 했지. 그러다가…… 어느 날은 두렵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했지만, 무기를 들 때마다 꼭 한 번씩
마른침을 삼켰어.
눈을 감고 기도했어. 오늘이 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렇게 지옥을 살아왔어.
“잡는 순간 한 서린 영혼들이 달려들 거야. 그리고 귓가에
매일 밤 소리를 질러 대겠지. 죽어라, 죽어라. 네 영혼까지
찢어발겨 주마, 하면서.”
소름 끼치는 저주에 아브타크는 차마 그것을 줍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먼발치에 서 있던 시프나드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여봐란듯 칼을 주워 든 시프나드는 손안에서 그것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재빠른 몸짓으로 히폴로테스의 목을
겨누었다.
아무렇게나 잘려 나간 뾰족한 칼끝이 남자의 목덜미를 슬쩍
파고든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는 꽤 선명했다.
모두가 숨을 내쉬는 것도 잊은 채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실랑이가 일었다. 전차에서 내려선 여자
하나가 병사들 사이를 무참히 헤치며 두 남자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에즈라.”
두 남자에게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병사들 사이를 막무가내로
파고들며 에즈라는 소리 내어 울었다. 남자의 목에서 타고
흐르는 피를 보며. 그 언젠가 나를 향해 다가오던 당신의 발이
생각나서.
깨진화병 조각을 아무렇지 않게 밟으며 내게 다가왔었다.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피를 흘리며 내게 다가왔었어. 그러니
당신은, 우리는…… 충분히 벌을 받은 것 아닐까.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이제 그만 우리를 놓아 주면 안 되는
걸까. 그도 아니면, 그의 죗값마저 모두 내가 짊어질 테니 저
사람만큼은 행복해지 면 안 될까.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돌아가.”
시프나드의 살벌한 일갈에도 에즈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히폴로테스만을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이렇게나 아픈 눈빛으로 나를 마주하는 당신을.
나를 세상 가장 한심하고 버러지 같은 여자라고
손가락질해도 좋아. 사람을 무참히 죽인 저주스러운 마녀라
욕하고 침을 뱉는대도 좋아. 예전처럼 빛 한 점 없는 삶 속에
가둬 둔대도…… 괜찮아.
여전히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하던 찰나, 히폴로테스가 손을 뻗었다. 닿아 온
손끝은 무척 차가웠다. 여전히 흉터투성이인 손으로 그는
에즈라의 손등을 쓸어 보았다.
그러다가 아주 천천히, 경애를 담아 입술을 내렸다. 잠시
닿았다 영원히 멀어져 가는 그는 태양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마치 잊지 말아 달라 각인하듯. 그도 아니면 기억해 달라
애원하듯.
그렇게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
나는 이 감각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잊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걱정 마. 지금 나 되게 나쁜 황제잖아.”
안심하라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정하고, 온화했으며……
처음 손 내밀던 날처럼 상냥해서.
“악당은 아주 오래오래 살아남거든.”
두 손에 얼굴을 묻고만 싶어. 부끄럽게 흘러내리는 눈물도
감추고만 싶었다. 눈물 젖은 입술을 열어, 이 눈물은 당신을
향한 동정이 아니라 고백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히폴로테스를 뒤로한 에즈라는 시프나드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순식간에 장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날을
드러낸 검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시프나드를 향해 겨누었다.
“에즈라, 너 지금…… !”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는데
에즈라는 냉담한 눈을 빛낼 뿐이었다.
“황실의 핏줄이 하나만 남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맹랑한 일침을 가하자 병사들이 분개하며 칼을 고쳐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자신과 히폴로테스를 죽일 듯한 분위기에
에즈라는 더욱 칼날을 들이 밀었다.
“제가 여기서 시프나드를 죽이면 저분께서 황위를 지키셔야
하겠지요.”
“웃기는 소리 ! 뭣 하는 거냐. 당장 황제를……!”
“아무도! 누구도 움직이지 마세요. 나는 여기서 죽는대도 이
칼은 꽂고 죽을 거니까!”
“다, 다들 움직임을 멈춰라! 황제께서 위험하시다!”
에즈라가 기사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발악하듯 외치자
기사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이 들고 일어나는 병사들을
진정시키려 목청을 높이는 사이, 시프나드는 달달 떨리는
칼끝을 보며 어렵사리 미소 지었다.
정도를 넘은 허탈함을 이기지 못한 시프나드가
히폴로테스로부터 칼을 거두고 나서야 에즈라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봐 주네.”
“황성 문을 열어 !”
에즈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명령했다.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의 병사들이 대열을 흐트러뜨리며
뛰쳐나왔다. 검은 철 갑옷으로 위장한 제논과 데몰레온,
카코스였다.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그들은 재빨리 달려와
히폴로테스를 잡아끌었다.
“히폴로테스 님, 이리로!”
대놓고 도망치려는 상황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분노에
틀어쥔 주먹을 떨던 아브타크가 주변을 둘러보며 성을 냈다.
“궁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창칼을
든 이들이 가쪽으로 빠지고 뒤를 지키고 있던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앞줄의 궁수들은 무릎을 꿇고 그 뒤로 선 이들은
서서 활을 겨누었다.
사방이화살 천지였다. 또 다른 궁지에 몰렸으나 에즈라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다. 그녀는 부러
여유를 가장하며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찢을 듯 칼을 가깝게
겨누었다. 칼끝이 살을 움푹 파고들자 시프나드는 윽, 단말마의
신음을 홀렸다.
칼날을 타고 흐른 핏방울이 손아귀를 적셔 나갔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에즈라는 황망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히폴로테스만을 바라보다가, 그러다가 눈물을 삼키며 살짝
미소지었다.
‘……기억을 되찾았다.’
그 미약한 웃음 한 점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기억을
찾았다는 걸.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도. 내가 누구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그렇기에 나를 떠나보내는 걸까.
네가 아픔만을 가져다줄 내 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번쩍 정신을 차린 히폴로테스는 제논의 손을 뿌리친 후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끈질기게 놓지 않는 이들을 벗어나려
애걸하며 몸부림쳤다. 허망한 손을 뻗어 무어라도 잡기 위해
휘적였다. 허나 잡히는 것은 그저 공허한 바람뿐이다.
“안 됩니다! 제발. 지금은 저희를 따라 주십시오!”
“안 돼. 안 돼, 나는 아직……"
너를 놓을 수 없는데. 놓고 싶지 않은데.
“가셔야 합니다!”
“이거 놔라!”
“황비님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드실 겁니까!”
제논의 발악에 부질없는 반항이 곧장 멎는다. 툭, 떨어져
내리는 손에는 감각이 없었다. 등 뒤를 옭아맨 데몰레온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멀어져 버려서 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니다.
머저리처럼 고인 눈물 때문이었다. 지금 내 세상은 모든 게
흐리게만 보이니까.
또다시, 나는 이렇게 너를 놓친다. 닿을 수 없다. 닿았다가도
영원히 멀어져 가는 너를…… 나는 잡을 수 없어.
결국 히폴로테스가 에즈라로부터 뒤를 돈 그때, 이대로는 안
되겠던지 궁수 하나가 에즈라의 목덜미 부근으로 활을 날렸다.
경고하듯 스치고 지나가는화살은 에즈라의 팔뚝을 베어 냈다.
홋, 그녀가 실낱같은 신음을 흘리자 시프나드는 벌컥 내질렀다.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한 번만 더 에즈라를
위협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병사들이 찔끔하며 하나둘화살을 내렸다. 길게 베인
팔뚝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림에도 에즈라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을 뿐, 시프나드로부터 칼을 거두지 않았다.
피 냄새가 더욱 짙어지고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릴 무렵, 황성 앞에 다다른 히폴로테스와 그의 수족들은
말을 가로채 완전히 달아났다.
“황성 문을…… 닫아.”
에즈라는 잔뜩 흐려진 남자의 흔적을 좇다가 소리쳤다.
“한 명이라도 저들을 쫓아 나가기만 해 봐!”
겨우 작달막한 여자의 명령에 이도저도 못 하고 있는
꼴이라니. 기사들은 구겨진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욕을
뱉었다. 개중 들고 있던 무기를 패대기치며 소란을 피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난장이 된 곳에서 에즈라는 힘 빠진 팔을 축 늘어뜨렸다.
눈물처럼 떨어져 나뒹구는 칼을 발로 차 버린 시프나드는
그제야 여린 팔을 움켜잡아 뒤로 꺾었다.
“읏!”
그로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오금을 걷어차자 에즈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전대 황제를 살려
보낸 꼴이 되었으니 귀족들과 기사들의 위상을 위해서라도
에즈라를 험히 다뤄야 할 터.
“……너는 나를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할 거야.”
시프나드는 부디 여기서 더 에즈라가 날뛰지 않기만을
바랐다. 원하던 것을 이뤘기 때문일까, 다행히 에즈라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도 난동을 피우지도 않았다.
발광하던 해가 산등성이 뒤로 넘어갔다. 이제 하늘은 어둠에
잠겼으며, 그 아래 것들은 모두 그림자가 되었다. 운명처럼 홀로
남은 공주는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다짐했다.
힘 빠진 몸을 비척이기도 잠시, 그녀는 너무도 외로워
아이처럼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