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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92화 (92/113)

92화

오늘따라 더욱 시뻘건 해는 하늘에 불길을 일게 했다. 그

불길 가운데, 붉은 깃발이 올랐다. 침입으로 인한 위급 상황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의복을 갈아입던 히폴로테스는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구경하며 완벽한 황제의 몸가짐을 갖추었다.

“생각보다 늦었군. 웬만하면 밝을 때 오는 게 좋지 않아?”

“……히폴로테스 님. 성문이 뚫렸습니다. 이제 정말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애원하는 목소리에는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히폴로테스는

무릎까지 꿇은 카코스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다들 떠나라. 나는 마지막까지 황제처럼 내려가야겠으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어떻게 히폴로테스 님을 두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절대. 절대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명령이다.”

“히폴로테스님!”

“마지막명령이야.”

나직한 목소리는 단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의 담담한 표정을 모두는 간절하게 올려다보았지만

히폴로테스는 늘 칼을 걸어 두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갈 뿐이다.

“데몰레온, 네 아비는 반란에 가담했다. 물론 너와 네 아비를

탓하지 않아. 드높은 기개를 가진 채 진정한 기사로 살아가며

와스터를 지켜라. 그리고 카코스.”

그는 끝으로 황제의 검을 집어 들었다.

“너는 부양해야 할 여동생이 있잖아. 혼인을 앞뒀다지.

지참금은 내가 직접 보내놨어. 너는 나 대신 매일 열심히

일했으니까, 상이야. 지금까지 수고했다.”

카코스는 황망한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쥘 뿐, 무어라 답하지

못했다. 푹 숙인 고개 아래,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만이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제논, 주변에 너를 따르는 기사가 많더군. 시프나드는 너랑

똑같은 슬럼 출신이니 신분으로 차별할 주제가 못 도부 그러니

걱정 말고 함께해 온 기사들의 곁을 지키며 본분을 다해라.”

말이 끝나자 주변은 고요했다. 히폴로테스는 여전히 묶여

있는 뉙스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꼴 보기도 싫었던 이 칼을,

이렇게나 아끼게 되었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아, 그리고 테르모스에게는 돌아오지 말라고 전언을 보내

놓았으니, 걔 걱정은 하지 말고.”

참 이상하리만치 가뿐했다. 열어 둔 창에서 흘러 들어온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끼던

히폴로테스는 돌연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데몰레온, 제논. 황실을 지키는 모든 병사들을 후퇴시켜라.

황궁 앞에서 물러나게 해.”

단호한 명령에 카코스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자신을

지나치는 히폴로테스의 발걸음을 차마 잡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애걸했다.

“안됩니다. 히폴로테스님……제발.”

“한 명의 병사도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앞에서

지키고, 너희 자신도 지켜. 그리고 때를 봐서 항복해.

"만약이라도 이 명령을 어기면…….”

명령을 어기면, 무슨 벌을 줘야 하나. 그때쯤이면 저는

이들을 벌할 수 없을 테니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게 어쩐지

우스워 킥킥거리다가 정말 부끄러운 말을 내뱉었다.

“죽기만 해 봐.”

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부탁 같은 것을. 늦으면

전하지 못할…… 진심을 담아.

거대한 성문이 뚫리자마자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다. 황성 앞을 지키던 병사들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말을 탄

기병과 전차를 모는 기사들은 성 안을 휘저으며 본궁 앞까지

진격했다.

기사들은 먼저 본궁 앞에 다다라 각 맞춰 진을 쳤다.

허겁지겁 뒤따라온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부대를 찾아 하나둘

모여들었다. 허나 피 튀기는 전투를 상상하던 이들은 곧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수백 정도는 본궁 앞에

배치시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모든 병사를 물린

것인지 본궁 앞은 병사 하나 없이 휑하기만 했고, 간헐적으로

불어닥치는 바람만이 반란군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하늘을 찌를 듯 드높던 기세는 식어 가고 이런저런

숙덕임이 커져 갈 무렵, 보다 못한 아브타크는 전차를 몰아

최전선으로 전진했다.

“뭣 하고 있는 거냐! 다들 긴장을 놓지 마라. 언제 어디서

황궁 병사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 주변을 샅샅이 살펴 매복된

병사가 없는지 확인을……!”

“그럴 필요 없다.”

허나 아브타크의 외침은 덧없었다.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그를 짓눌렀으니까. 군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홀로 모습을 드러낸 황제를 멀거니 응시했다.

황제의 뒤로 무언가를 보호하듯 황금문이 굳게 닫혔다. 수십

개의 계단 위에 서 있던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항복했다.”

항복하다니? 황제를 지켜야 할 이들이 모두 내뺐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황제는 도망가지 않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걸까. 부대를 이끌던 기사들은 투레질하는 말고삐를

휘어잡으며 우왕좌왕했다.

무엇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제임을 드러내는 남자를

무시하기란 버거웠다. 은빛 머리칼 위에 얹은 황금관, 황제만이

걸칠 수 있는 검은 허리띠와 그것에 새겨진 와스터 제국의 문양.

마지막으로 그가 허리에 찬 검은 스스로 증명해 낸 무력을

상징했다.

기사들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를 우러러보았다.

졸병들 사이로 불온한 기운이 흐른다.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아브타크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 한심한 모습을

지켜보던 시프나드는 금세 아브타크의 앞을 치고 나가

전차에서 훌쩍 내려섰다.

전차 위에 홀로 남겨진 에즈라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시선 끝에 맺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토록 피해 다니던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아……,”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미려한 남자는 낮은 한숨을

쉬더니 계단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당장이라도 완전 무장 한 병사들이 떼로

달려들어 그에게 칼을 꽂아 넣을 것만 같아서. 그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갈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

내가 죽는대도, 그는 죽지 않기를 바라서.

에즈라는 히폴로테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프나드는 턱이 아릴 만큼 이를 악물었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는 뚜벅뚜벅 다가가 계단 아래 버티고 섰다. 그는

히폴로테스를 마주한 채로 당당히 외 쳤다.

“히폴로테스는 들어근서! 우리의 반란은 정당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입맛대로 휘두르는 황제로부터 와스터 제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함이니까!”

벼락같은 음성에 벌떡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주제에, 고작

내뿜는 위용에 사로잡히 다니. 무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네놈의 공포정치를 몰아내고, 진정 와스터를 포용하는

황제가 될것이다!”

히폴로테스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시프나드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도 먼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서로를 노려보던

중, 먼저 고개 숙인 이는 히폴로테스였다.

“그거 좋네.”

“……뭐?”

그가 고개 숙여 킥킥 조소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라고

하기엔 너무 즐거워하는 게 아닌가. 병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상을 찡그린 채 그를 살폈다. 광인을 구경하는 듯한 얼굴이

하나같이 재밌어 웃음을 삼키기 힘겨웠다.

숨죽여 웃던 황제는 한순간 싸늘하게 돌변했다.

히폴로테스는 발아래 펼쳐진 일직선의 길을 훑어보았다. 성문

앞까지 이어져 있을 황제의 길. 반란이라면서,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제 앞에 길을 텄다.

그것만으로도 마지막치고는 만족스럽지 않은가. 끝까지

에즈라에게 비참한 꼴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당신은 어쩔 텐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할

텐가.”

“그럴 리가.”

그는 고개를 내저은 후 한 걸음 내디뎠다. 두 번 다시는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향하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에즈라를 다시 한번 더 눈에 담았다.

창백한 뺨이 평소보다 더 질려 있다. 피딱지 았은 입술은

다시 터진 모양인지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연듯빛 눈동자가 근원 모를 눈물에 일렁였다.

왜 그때는 말하지 못했을까. 네 눈동자를 무척이나 아름답다

생각했다는 걸. 그래서 너와 처음 눈을 맞추었던 그날, 네 눈을

뒤로하기 힘겨웠다는 걸.

그때마다 거짓을 속삭여야 한다는 게…… 언제부턴가 내

숨통을 조여 왔어.

히폴로테스는 가녀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외면하며

길의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았으니, 이걸로 모두 되었다.

잠시 주저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그는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시리도록 무표정한 얼굴은 냉혹했다. 결심을 마친 황제는 눈

깜짝할 새 수십 개의 계단을 내려오더니 넓은 보폭으로 병사들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망토

자락을 흔들자 병사들은 넋을 잃고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 순간, 황제는 머리 위에 놓여 있던 황금관을 집어 들더니

지나온 등 뒤로 미련 없이 내동댕이쳤다. 쨍그렁,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권위가 돌바닥을 구른다. 그

행태에 기함한 병사들은 숨을 멈춘 채로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어 히폴로테스는 와스터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피불라로

손을 뻗었다. 고귀한 황금 브로치를 거칠게 떼어 낸 황제는 믿을

수 없게도 그것조차 허공으로 획 던져 버렸다.

병사들 사이로 날아간 그것은 이름 모를 이의 발 아래 부서질

것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 역시 거칠게 벗어 내더니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는 개구진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발 앞에 늘어진 붉은 망토를 짓밟고 지나가자 불로 지진 듯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마지막이었다. 황제의 길 끝에

다다른 남자가 우뚝 멈추어 서자 병사들은 히끅, 어깨를 떨었다.

그들 모두는 황제의 행태를 황망한 심정으로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군.”

유쾌한 어조로 중얼거린 히폴로테스는 주저 않고 황제의

검을 뽑아 들었다. 거칠게 검을 빼 들 때와 달리 그는 묶여 있는

뉙스를 조심스레 풀어냈다.

“나한테 이거 빼고는 다 필요 없거든.”

적막 가운데 그의 음성만이 칼날처럼 꽂혀 들었다. 일순,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들어 올린 히폴로테스는 무도한 검을

들어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다. 황제의 검이니 뭐니, 그래

봤자 한낱 날붙이일 뿐. 땅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무지막지한 완력에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일었다. 날이

두터운 칼은 순식간에 쩌적 금이 가더니 제대로 반 토막이 났다.

반동에 튀어 오른 칼날은 번쩍이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그런……7

“화, 황제의 검이 부서졌어.”

소리 없이 경악한 병사들은 미약한 신음을 홀리다가 툭,

무기를 떨구었다. 그러든 말든 히폴로테스는 날이 부러진 검을

대강 내버렸다. 그 무신경한 태도를 지켜보던 아브타크의

이마에 핏줄이 잔뜩 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 황제의 검을 망가뜨리다니!”

히폴로테스는 서늘한 눈으로 아브타크를 응시하기만 했다.

되레 조급해지는 건 아브타크였다. 그는 주저 없이 전차에서

뛰어내린 후 병사들을 헤치고 황제의 길 위로 걸음했다.

“이런, 보석이 빠져 버렸어.”

그가 향한 곳은 돌바닥을 아무렇게나 구르던 황금관이었다.

허리 굽혀 그것을 주워 든 아브타크는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소중히 감싸 안았다. 조금 상하긴 했지만 칼처럼 두 동강이 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아브타크는 곧 매서운 눈으로 히폴로테스를 쏘아보았다.

그가 씩씩거리며 히폴로테스 쪽으로 걸어가자 두 사람의

대치를 먼발치서 구경하는 이들은 흥미를 감출 수 없었다.

“곧 죽여 주마.”

아브타크는 히폴로테스에게 바짝 다가서서 그리 중얼거렸다.

아브타크는 심란한 마음으로 두 동강이 난 칼을 내려다보았다.

날이 완전히 부러졌지만 어떻게든 다른 방법이 있을 터.

검은 히폴로테스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아브타크가

착잡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검으로 손을 '뻗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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