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리 중얼거린 황제는 여직 들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말아
쥐고 수직으로 세웠다. 이미 널브러진 몸뚱이는 근육이 경련해
간헐적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히폴로테스의 칼끝은 정확히
심장을 노렸다. 그가 칼을 치켜들어 가감 없이 내리찍은 순간.
모여 있던 모두는 헛숨을 들이켠 채 숨을 멈추었다.
그가 박힌 칼을 뽑아내고 나서야 모두는 막혔던 숨을 터
놓았다. 피로 범벅된 황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시신은 남김없이 불태워라.”
황제의 명령에 귀족 영애들이 철퍼덕 쓰러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도를 넘은 잔혹한 처벌. 이건 정말이지……
마귀가 내릴 법한 처우가 아닌가. 게다가 이곳엔 라티아의
아버지인 아브타크가 있었다.
눈가를 가린 채 숨죽여 우는 아브타크를 곁눈질하던 귀족들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명령에 하나둘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자는
미쳤다. 완전히 돌아 버리고 만 거야.
지나친 공포는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끝내 반항을 일게 한다.
악한 이를 내쫓아야 한다는 정의심을 부채질해, 모든 건 옳은
일이었다고 정당화하게 만들지.
“자비를 베풀어 치아는 친족에게 돌려주도록 하도록.”
히폴로테스는, 아브타크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한때는 사랑했다던 측실의 사체에서 뒤를 돈 황제는 처음처럼
고결하게 걸어 나갔다. 아브타크는 황제의 검 끝에서 혈육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아브타크의 앞에 멈춰 선 히폴로테스는 그에게 손을 뻗어
한쪽 어깨를 감쌌다. 아브타크의 곁에 선 시프나드의 타들어 갈
듯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히폴로테스는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아브타크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일 뿐.
“치아라도 잘 묻어 주는 게 좋겠어. 귀족 영애로서 저건……
너무 불쌍한 말로잖아.”
연극이 끝난 후, 모두에게서 뒤돌아선 황제는 시리도록
무표정했다. 툭툭. 일정한 박자로 어깨를 토닥여 준 히폴로테스는
그를 뒤로하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피로
이루어진 궤적이 남았다. 혈육의 핏자국을 보던 아브타크는 눈물
뒤에 숨어 쾌재를 불렀다.
“소문 들었나? 황제께서 완전히 폭군이 다 되셨다네.”
“그럼, 손님들이 그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던데. 익히 들어 알고
있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측실을 직접 찢어 죽였다면서?”
정육을 파는 상점 앞에는 싱싱한 고깃덩이가 사방에 걸려
있었다. 핏물이 배어 나오는 고기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흥미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돌린다. 상점 주인 부부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남자는 선뜻 부인이 장단을 맞춰 주자 신이 났는지 부인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여보. 그뿐이 아니야! 심지어 그 측실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
있었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사람이 그렇게 잔인할 수
있나. 응? 나 원 참. 정말 소름이 끼쳐서…… ”
으으, 남자는 상상만으로도 섬뜩한지 닭살이 돋은 팔뚝을 마구
문질렀다. 그 심약한 꼴을 흘겨보던 아내는 팽.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뒤편에 마련된 닭장으로 다가가 한
마리를 움켜잡았다. 가판대로 되돌아온 부인이 닭 모가지를
조르자 닭은 날개를 퍼덕이며 반항했다.
“웃겨! 황비님을 음해한 것은 그 측실이라며. 황비님께서는
황손까지 수태하셨었다는데. 실종되셨던 것도 모자라 결국
돌아가셨다니 …… 내가 황제라도 모가지 싹둑이야.’,
부인은 소리 높여 울던 닭의 모가지로 넓적한 칼을 퍽.
내리꽂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닭이 축
늘어진다. 부인이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흡족한 얼굴로 살피자
남자는 기함하며 뒷걸음질 쳤다.
“왜 그래?”
“아, 아니. 뭐. 하. 할 일 계속해.’’
“또 어디 가! 물건이나 정리해!”
또 할 일을 미뤄 두고 도망칠 심산인가 보다. 하는 일이라곤 입
터는 것밖에 없으니. 쯧. 혀를 찬 부인이 벌써 내빼 버린 남편을
씹으며 인상을 팍 찌푸리던 그때였다.
“어……?”
발밑이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철컥거리는 소음이 가까워졌다.
쇠붙이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분명 병사들의 철 갑옷에서 나는
소리였다. 혹. 누군가 군사를 일으키기라도 한 걸까.화들짝 놀라
상점 밖으로 나온 부인은 곧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게 무슨일이래?”
“그러니까 말이야. 어디서부터 온 건지 알아?”
“그건 몰라도. 저 흑갑옷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몰려나온 이들은 호들갑을 떨다가
저들끼리 귀엣말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럴 만도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갑옷을 두른 병사들이 줄 지어 골목을
지나고 있었으니까. 넓은 골목을 빠듯하게 채우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행렬. 그만큼 병사는 많았다.
덕분에 골목을 누비던 이들은 급히 상점으로 뛰어들거나 벽에
몸을 바짝 붙여 길을 터야 했다. 상점 사람들이 하나둘 불쾌한
얼굴을 내비치며 수군거렸으나 병사들은 마치 목각 인형처럼
오직 앞만 바라본 채 절도 있는 걸음을 옮겼다.
“황궁 병사는 금빛 갑옷을 입는다고. 저 병사들은 대체 정체가
뭐야?”
“나, 나는 본 적 있네! 그 왜 수도 중심에 데모스 가문의 성이
있지 않나. 전에 식재료를 가져다 대다가 보았지. 저건 데모스
가문의 사병이 분명해.”
“쉿! 말조심하게. 다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좋겠어.”
부인은 세 남자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며 이마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이런저런 일로 수도가 어수선하지 않았나. 저
갑옷을 입은 병사들뿐 아니라, 생소한 갑옷의 병사들이 수도를
누비는 것을 꽤 많이 보았더랬다.
“이건분명……반란이네.”
반란.
떠들썩한 웅성임 속, 이름 모를 이의 속삭임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제야 불길함의 정체를 깨달은 부인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줄곧 장렬한 눈빛의 병사들을 응시하던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이 토막 냈던 닭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지나 질척하게 고인 핏물은 가판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편, 황성을 향하는 사병의 수는 황궁 병사들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라티아 살육 사건 이후,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공포스러운 황제에게서 뒤를 돈 것은 둘째 치고, 황제가 반란에
맞설 의욕이 없어 보였던 이유가 컸다.
귀족들은 반란을 위한 전투를 준비하면서도 모든 게 무의미한
신경전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승기는 아브타크에게 기울었고.
그가 들이미는 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그래서 사병을 빌려준 귀족도 적지 않았다. 어차피 큰 병력
손실도 없을 텐데, 이길 게 분명한 반란에 가담하지 않으면
머저리가 아닌가.
그리하여 히폴로테스의 편에 선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오래도록 황실을 보필해 왔다는 유서 깊은 가문들 또한
대외적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아브타크에게 은밀히 사병을
보내왔고, 아브타크는 그들의 위신을 생각해 모른 척해 주었다.
이로써 반란의 하늘은 피처럼 붉었다. 황성 앞에 진을 친 수백
명의 기사들과 병사들. 그들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소음이 허공에 울렸다.
새빨간 노을이 산등성이 뒤로 져 갈 무렵. 병사들은 두 갈래로
찢어지며 길을 냈다. 그 길을 두 편의 전차가 가로질렀다. 앞서
전차를 몰던 아브타크는 금빛 옷자락을 휘날리며 황성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병사들을 천천히 둘러본 후 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그 날이 도래한 것이다! 흉포하고 잔악한 황제를
몰아내는 날이!”
“워! 워!”
군기가 바짝 든 외침이 울려 퍼지고 병사들은 박자에 맞추어
창으로 바닥을 찧었다. 진동하는 발밑이 더없이 큰 흥분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모인 이들은 한층 격렬해진 감정을
갈무리하려 깊이 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뒤이어 마차를 몰고 온 시프나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미
승리에 취한 듯 울컥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시프나드는 대강 눌러썼던 투구를
신경질적으로 벗은 후 머리칼을 털어 냈다. 그 야성적인 모습에
충성을 맹세하는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저 같은 뒷골목 무뢰배를 우러러보고 추앙한다. 감히 이들이
상상이나 할까, 내 출신이 어떻고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얼마나
더럽게 굴러왔는지. 혹시 모르지.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구걸하던
내 머리 위로 침을 뱉은 이들이 있을지도.
“시프나드…… 괜찮아요?”
침잠되어 가는 남자를 여자가 붙잡았다. 꼭 감싸 오는 작고
보드라운 손을 느끼며 그는 고개 숙여 실소했다. 퍽 걱정되는
얼굴로 제 옆을 지키던 여자는 눈을 요리조리 돌려 가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완전 괜찮아.”
“ 다행이네요.”
그는 어설픈 웃음을 띤 에즈라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휙.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는 곧장 쥐고 있던 창을 높이 치켜든 채
소리쳤다.
“나는! 황실의 피를 이어받아 황제가 될 것이다! 황제가
되어……:’
그래, 나는 황제가 될 거다. 황제가 되어서 진정한 힘을 갖고
말겠어. 설사 그것이 어떤 희생을 낳게 된다 해도.
잠시 말을 늘이던 남자는 이내 단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그 상태 그대로 입을 떴!다.
“와스터를 진정한 대제국으로 이끌어 나갈 것이다!”
히폴로테스를 몰아내고 내가 황제가 되는 거다. 그래서 너를.
내가. 그로부터 구원해 내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레와 같은 환호가 높은 물결처럼 일었다.
물에 빠진 듯 귓가가 먹먹해졌으나 에즈라는 귀를 틀어막을 수도.
시프나드의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에즈라. 나와 같이 황성에 가자. 나, 황제가 돼야 하거든.’
깊은 밤, 불쑥 찾아와 무릎을 꿇던 남자는 그리 고백했다.
자신에게는 진정한 황실의 핏줄이 흐르고 있다고. 그러니 나를
가두었던 잔인무도한 황제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와스터
제국의 주인이 되겠다고.
‘정말로 당신이 황실의 핏줄이에요? 평생을 슬럼가에서
살아왔다고 했잖아요.’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을 때, 그가 뭐라 했던가.
‘사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건……"
“너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황비로 만들어 줄게.”
회상을 끊어 내는 선명한 음성. 귓가에 속삭인 남자는 이내
꼿꼿한 자세로 앞만 바라보았다. 그가 전차를 몰기 시작하고
나서야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마주한 광경에
에즈라는 손끝까지 얼어붙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황성의 문은
언제부턴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위병들의 사체가 쌓여
있었으니까.
“ 가자.”
“……그래요, 같이 가요.”
뒤늦게 대답한 에즈라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는 남자의 뒤에
서서,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