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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90화 (90/113)

90화

그 시각. 히폴로테스는 알현실에 귀족들이 차례로 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황성 앞에 크고 작은

전차가 줄 지어 서 있었다. 꾸며 놓은 무대를 즐길 이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수족들은 불안한 얼굴로 히폴로테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즐기며 그는 검은 띠를 허리에

고정하고, 널따란 어깨 위로 망토를 둘렀으며 몸의 일부분 같은

칼을 찼다.

마지막으로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까지 단정히 쓸어 넘긴 그는

한낱 인간이라기보다는 지상에 내려온 남신 같았다.

“그……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아부하는 거야? 나 이제 곧 황제 아닐 텐데.”

데몰레온이 순수한 감탄을 전하자 히폴로테스는 싫지 않은 듯

유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불경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글쎄.”

그는 벌컥 성을 내는 데몰레온을 뒤로하고 다시금 창가로

다가갔다. 무료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몰려드는 이들을

구경하는데 카코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히폴로테스 님, 정말 황비님이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어느 부분을 보고 의심조차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시프나드가 에즈라를 죽게 놔둘 리 없으니까.”

그는 확신했다. 라티아는 아브타크와 공모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약한 여자가 무모한 짓을 벌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끔찍한 짓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저지른 거겠지.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추악하고 음습한 감정을 뾰족한

칼끝으로 찌르고 휘저어서 충동질하는…… 고약한 짓이었다.

그런 짓을 눈 깜짝 않고 혈육에게 하는 이는 진정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닐까.

욕망이라는 악마에 잡아먹힌 괴물.

어차피 황제보다는 칼잡이에 가까웠던 인생이 아닌가. 그런

역겨운 것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싸그리 죽여 버렸어야 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되었던 거야.

“황비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아브타크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것

아닙니까?”

테르모스의 말에 히폴로테스는 대답 대신 쓴웃음을 머금었다.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지. 여전히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에즈라는 그토록 원하던 시프나드의 곁에 설 것이라는 걸. 내가

아닌, 그의 울타리 안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 나가리란 것도.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괴로움뿐이고. 너는 내 곁에 있으면

끔찍한 과거를 기억해 낼지도 몰라. 계속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천하디천한 마녀라 손가락질당할지도 모르지.

그러니 나는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할 거다. 그리고…… 지옥에서 네 행복을 빌 거야.

“사랑 때문에 죽다니. 낭만적인 죽음이잖아.”

너라도 내가 포기한 행복을 찾아 나갈 수 있다면. 나는 내 모든

걸바칠수 있어. 목숨까지도.

에즈라를 잃었기에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그는 후련한

마음으로 호쾌한 미소를 꾸며낸 후, 미련 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웅장한 알현실 안은 높고 낮은 귀족들로 북적였다. 이리 많은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었고 그만큼 주변은 시장통처럼

시끄럽기까지 했다. 고위 귀족들은 값비싼 부채를 빼 들어 별 볼

일 없는 이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 오만한 태도에 비교적 급이 낮은 귀족들은 모멸감을 감추려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각자의 사정으로 지쳐 가던 귀족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질 즈음이었다. 오직 황제를 위해 존재하는

황금문이 열린 것은.

“조용! 조용히 하시오!”

호위병 두 명이 굳이 외치지 않아도 알현실 안은 이미 물

끼얹은 듯 고요했다. 알리지도 않고 알현실 안으로 들어선

히폴로테스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황금 의자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걸음마다 차르르 흘러내리는 망토

자락과 강인하면서도 미려한 얼굴선. 허리춤에 찬 칼은 여전히

무지막지해 보였다.

누가 보아도 두말할 것 없이 황제라 칭할 것이다. 그가 아니면

과연 누가 황제라 들고 일어설까. 현혹된 귀족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향한 경외심이 피어올랐다. 강렬함을 두른

황제는 좌중을 압도한 채로 황금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오늘 그대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은, 직접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중대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붉은 눈에 사로잡힌 이들은 히폴로테스가 말을 잇기만

기다렸다.

“긴말할 것 없고. 황비가 또다시 위험에 빠졌다는 건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예전에 그 배후였던 마리노스의 가문을 내가

직접 멸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을 테고.”

히폴로테스는 들고 있던 검 끝으로 장난치듯 단상을 툭툭

두드렸다.

“나는 오늘 이번 일의 배후를 직접 처단할 것이다.”

들여라.

황제의 명령에 고개를 얕게 끄덕여 보인 호위병들은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훤히 열리자 그 중간에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쏟아지는 새하얀 볕에 눈살을 찌푸리던 귀족들은 이윽고

그 인영의 주인을 알아보더니 하나둘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 이분은……

가까이에 서 있던 한 귀족이 이마를 짚으며 눈을 비비적댔다.

잘못 본 것인가. 허나 아무리 해진 옷을 입고. 역겨운 하수구

냄새를 풍기고, 더러운 오물을 덕지덕지 묻혔어도 그녀는

라티아였다.

최고 귀족이자 황제의 측실인 라티아.

“죄인을 끌고 와.”

“예.”

제논은 그녀의 어깨를 밀치며 알현실의 중앙으로 라티아를

끌고 갔다. 한가운데 도착하기 무섭게 그가 오금을 걷어차자

라티아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붉은 융단을 짚은 손이 사시나무 떨듯 달달 떨려 왔다. 꽂혀

드는 시선들 따위는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죽음을 목도한

여자는 죄어드는 배를 움켜쥐더니 기어코 우욱, 구역질을 꿱꿱 해

대기 시작했다.

“허우윽……욱!”

내장을 뱉을 듯 토사물을 쏟아 내는 여자는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모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찡그렸다. 수치심 따위는 이미 사라져 존재하지도 않았다.

라티아는 저 멀리 자신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히폴로테스를 흘긋거렸다.

손에 쥔 검을 한 바퀴 돌려 보던 남자는 지루한 듯 턱을 곳버다.

목덜미에 바짝 다가온 죽음을 느끼며 라티아는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듯 아브타크를 찾았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중에서 우습게도 단번에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황금 의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현자처럼 자비로운

얼굴을 한 아버지는 눈이 마주친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웃어

보였다. 마치 내일 또 볼 사람에게 눈인사를 하듯. 가볍고, 그만큼

무의미한.

“아. 아……으, 으으. 아아악!”

그제서야 외면하려 아등바등했던 진실이 뇌리를 강타했다.

아브타크는, 나를 버린 나의 아버지는…… 이 죽음에서 나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반성하는 기미도 없이 소리나 내지르다니. 침통함을 감출

수가 없어.’’

벼락처럼 떨어지는 냉담한 목소리에 라티아는 질척하게 젖은

입가를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히끅거리는 목소리는 처절했고.

발끝은 자꾸만 오므라들었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건 어떤지.”

“……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그 여자야말로 내게 무릎 꿇고 이마를 땅에 박은 채 잘못을

빌어야 해!”

반쯤 실성한 라티아는 자신의 말에 도취되어 벌떡 일어섰다.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귀족들의 시선을 그러모았다.

“다들 생각해 보I! 고작 망국의 마녀 따위가. 감히 내 자리를

탐내고 빼앗았는데! 내가 더. 그 자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잖아.

걔가 없었으면 내가 황비가 되었을 거잖아!”

악랄한 미소가 미치광이의 것과 다를 게 없다. 추악한 욕망을

위해 영혼을 팔아넘긴 여자는 빈껍데기와도 같았다.

“그. 그 파렴치한 여자가, 여자가 내게서 뺏어 간 것에 비하면

그 하찮은 목숨 따위는……!”

“좋아. 아주 다행이야.”

유쾌한 목소리는 가벼웠다. 독밖에 남지 않은 라티아의 분개를

끊어 낸 그는 진정 기껍다는 듯 고개를 유순히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나, 둘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의 발걸음이

조금 들떠 보였다.

“난 또 용서를 빌며 목숨을 구걸하면 어쩌나 했어. 그래서

이들이 한목소리로 당신의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애걸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어느새 코앞에 선 남자를 망연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처참해진 라티아를 동정 없이 내려다보던 히폴로테스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가 묵직한 칼을 뽑아 들자 칼끝이 붉은 융단을

쿡 찔렀다.

“그리고 어차피 살려 줄 생각 따위 없었다.”

칼을 들어 올리는데 문득 에즈라와 함께 누워 속삭였던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저무는 해 아래서 탁 트인화를 구경하며

바람을 느끼고, 그네를 타던.

‘이제 더는 그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기로 약속해요.’

그래, 네가 내 곁에서 처음으로 편안히 웃던 날.

‘당신과 나포함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딱 한번만 더.”

감았다 뜬 눈이 피처럼 붉었다. 라티아가 마지막 숨을 들이켠

찰나. 칼날을 가로로 쥔 남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수평을

그었다. 칼끝이 그린 수평선은 여자의 흰 목덜미에 그대로 자국을

남겼다.

“아

칼날이 지나간 허공으로 루비 같은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남자의 매끈한 뺨에 흩뿌려진 그것은 결국 타고 흘러 그의 턱

끝에 맺혔다. 그는 번듯한 턱선을 손등으로 대강 훑어내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여자가 미약한 신음을 흘리더니 두 팔을 휘적이다 바둥거렸다.

가없는 고통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 일도에 가녀린 목이 뒤로

꺾이며 작은 몸뚱이 역시 뒤로 넘어갔다. 퍽. 소리와 함께 덜 잘린

머리에서 피와 알 수 없는 액체가 곧 붉은 양탄자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그 누구도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뜬 채로

모든 것을 방관했다.

“황비를 죽였는데…… 이걸로는 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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