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그래, 성공적이었나?”
기다란 식탁 정중앙에는 금빛 촛대가 놓여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세 개의 불꽃 두|,먼저 말을 꺼낸 아브타크는 막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있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았지만 성공이라 하더군.”
“……그리 쉽게?”
거짓이면 어쩌려고? 의심조차 하지 않는 순진한 모습에
아브타크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천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아니면 태생이 그러한 것인지 멍청하기 짝이 없다.
피실피실 비웃음을 흘리는 아브타크를 노려보던 시프나드는
무심히 툭 내뱉었다.
“그보다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당신 딸은?”
“글쎄. 원하는 대로 이용당해 주었으니 고맙다 인사는
해야겠지.”
무정한 말투에 그는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시프나드가 손끝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며 눈살을 찌푸리자
아브타크는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새까만 새들이 어둠
속을 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어. 아주흡족한 명령이지.”
“모든 귀족을 황성 안으로 초대하겠다더군. 적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봐. 아, 황제라
그런가? 어쨌든 아주 배포가 커.”
자존심을 살살 긁는 말은 명백히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그
꼼수를 모를 리 없는 시프나드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귀족들을 불러들였다면 당신 뜻대로 되겠군.”
“그렇겠지.”
“라티아, 그여자를 구할 건가?”
식탁 위로 거론된 딸의 이름에 입을 닦던 아브타크는 들고
있던 천 조각을 내던지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을 끅끅거리던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고 나서야 조금 진정한 듯했다.
“그렇게 무심한 어조라니.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뜻을 같이한 사람의 딸인데. 연민 정도는 비쳐 줘도
괜찮잖아.”
“별로. 그쪽 태도를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드네.”
얼굴도 어렴풋한 여자의 비참한 말로가 저절로 그려졌다. 그
여자야 개밥이 되든 말든 상관이 없다만, 사람의 탈을 쓴 악마를
눈앞에 두고 있자니 조금 불쌍한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살릴 생각일랑 없었군.”
“부정할 수 없이 귀찮은 일이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니, 애초에 입맛 따위 들지 않았다.
그가 습관처럼 스푼을 내던졌으나 아브타크는 사람 좋은
얼굴로 통쾌하게 웃어 보일 뿐이다.
“부족함 없이 준비하게. 내일이면 황성을 향할 테니.”
그토록 고대하던 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한껏 들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아브타크는 탄일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던
시프나드는 더러운 야욕으로부터 뒤를 돌아 도망치듯 멀어져
갔다.
사각형의 방들로 구획된 지하 감옥은 상상보다 훨씬 더
넓었다. 사시사철 습기가 어려 있었고, 돌 사이사이에는
곰팡이가 끼어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뿐인가, 비가
내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쫄딱 비를 맞아야 했으며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시간 개념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처음 마주한 감옥에 기함하며 들어갈 수 없다 난동을 피울
때는 언제고. 라티아는 이곳에 꽤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머지않은 날. 아버지가 저를 구하러 올 것이라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이 모든 치욕으로부터 무뎌지려 애써 왔다.
라티아는 황비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던 자리에서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금 회상했다.
‘에즈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저는,
저는 어떡하죠? 히폴로테스가 분명 저를 죽이려 들 텐데요.’
‘내가 설마 하나뿐인 피붙이를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당연히 다 방법이 있지. 너는 내가 시킨 대로 하기만 해. 가만히
감옥 안에 있으면 내가 너를 구할 이들을 보낼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진지했고, 은근히 다정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정말인가요? 겨우 그런 방법으로 저를 구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어떻게든 너를구해 줄 것이니 걱정 마라.’
걱정 말라는 말을 곱씹고 있자니 오늘따라 횃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적막하다.
라티아는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강렬하게 타오르는 횃불을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작 불그림자 하나에 그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저 자신이 경멸스럽고 또 한심했다.
자조하기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쭉 빼내어 쇠창살 너머의
병사들을 살폈다.
감옥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수가 턱없이 적다. 심지어 몇몇은
쿨쿨 졸고 있는 걸 보아하니 새벽녘인 모양이었다. 오늘도
잠들지 못한 채 라티아는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거렸다. 어제는,
오늘은, 어쩌면…… 내일은.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보낸
살수들이 병사들을 해치우고 자신을 구하러 올 것만 같아서.
얼마나 오래도록 수모를 견디며 기다렸던가. 아버지가
오기만 하면, 곧 편안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우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이 더러운 옷을 찢어 버리고, 또
머리카락에는 향유를 붓는 거야. 상한 손톱도 광을 내는 게
좋겠다.
그보다 이제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지금 시간대라면 정말
저를 구출해 내려 올지도 모른다.
성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불안을 잠재우려 그녀는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웠다. 유려한 몸짓으로 병사들을 베어 내고
소름 끼치는 걸쇠를 풀어내는 살수들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러다가 어처구니없게도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라티아는 낭패감을 지우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도 저를 구하러 오지 않은 것이다. 대체
언제 온다는 것일까. 온다고 했는데, 지금쯤이면 와야 하는데.
혹, 저를 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불쑥 떠오르는 의문을
외면하려 라티아는 도리질 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제 아비가 아닌가. 같은 피가 흐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혈육.
불온한 기분을 떨치려 머리칼을 하나둘 뽑아내는데 짐짓
밖이 소란스러워졌다.화들짝 놀란 라티아가 급히
무릎걸음으로 창살 앞에 다가서자 누군가의 발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렸다.
뚜벅거리는 일정한 발소리는 얼핏 금욕적으로 들릴 만큼
절도 있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코앞에서 멈추었다.
기다리는 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세 파악할 수 있었기에 차마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라티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철창으로부터 떨어지려 하자
제논은 냉정한 목소리로 하급 병사에게 명령했다.
“문을 열고, 연행해.”
“예!”
연행하라는 말에 불쑥 얼굴을 들어 올린 라티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시린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기사는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언제였더라, 에즈라와 함께 정원을 거닐었던 그
비천한 출신의 기사였다.
“다, 당신……!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것이냐! 내가 누군 줄
알고!”
“윽,가만히 계십시오!”
라티아는 발작하듯 사지를 떨며 몸부림쳤다. 졸지에 턱을
얻어맞은 병사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움찔하기도 잠시,
라티아는 곧 오만한 미소를 띠며 잡힌 팔을 휘둘러 쳐 냈다.
“너, 너는 잘 알잖아! 나는 이런 꼴을 당할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나는……!”
“예. 아주 잘 압니다.
도사린 죽음을 외면하려 애쓰던 라티아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 기괴한 몰골에 혐오감이
피어올라서일까, 제논은 답지 않게 신랄한 말을 쏟아 냈다.
“당신은 황비님과 황손을 살인한 죄인이지.”
“……뭐?”
“아주 죽어 마땅해. 그러니 더 이상 반항한다면 그냥 여기서
다져 주겠어.”
또박또박 위협하는 얼굴이 매서웠다. 어찌나 이를 악문
것인지 턱이 불거져 있었고. 말아 쥔 주먹은 그가 힘겹게 분노를
참아 내고 있다는 것을 대변했다.
꽂혀 드는 무참한 살기. 바짝 긴장했던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단숨에 기가 죽은 라티아는 곧 휘청이며 제 발로
감옥에서 기어 나왔다.
“아. 아침이었어?”
돌계단을 오르자 쏟아지는 빛줄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티아는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볕을 피하려 팔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매일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느라
까마득히 몰랐다. 이미 오래전 아침은 밝아 오고 있었으며, 곧
들이닥칠 손님들을 위한 준비로 황성 안이 매우 바쁘다는 것을.
그런 소란이 깊은 지하까지 닿을 리 없잖아.
“이만가시죠.”
떠미는 손길에 터벅터벅 좁은 걸음을 옮기던 라티아는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의뭉스러운 눈으로 살피는 병사의
시선이 곱지 않다.
“나는, 그, 어디로 가는거죠?”
앞서가는 제논과 양옆을 지키고 선 병사들. 뒤에 꼬리처럼
따라붙은 병사들은 어림잡아 열댓 명. 모두 완전 무장을 한 채,
창칼을 들고 있었다. 제논이 대답해 주지 않자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던 병사 하나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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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라티아는 점점 황궁의 중심으로
향했다. 황성 밖이나 연무장을 향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라티아는 시간이 갈수록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새파랗게 질려 갔다.
걸음을 옮길수록화려한 차림새의 귀족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까. 마치 성대한 축제라도 연 것처럼 명망 있다는
귀족 가문들은 모두 모여든 모양새였다.
그들이 질서 있게 황성 안으로 들어와 본궁을 향할 동안,
라티아 역시 본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보다 키가 훌쩍 큰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추레하고 비루한 몰골의 저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이리 비참한 모습을 저들 앞에 내보여야 한다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몸을 최대한
옹송그리며 병사들에게 찰싹 달라붙는 꼴은 어쩐지 가엾기도
했다.
“이, 이봐요. 왜 이렇게 귀족들이 많은 거죠? 유서 깊은
가문들이 아닌 귀족들까지 모여들다니……,”
“조용.”
뚝, 말을 끊어 낸 제논은 앞서 걸음을 멈추었다. 본궁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진 곳에 멈춰 선 채로 알현실을
향하는 귀족들의 행렬을 굳건히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보고 여기, 이렇게 서 있으라고?”
“……너무 기분 상해하지는 마시죠. 어차피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일 테니.”
주인공이라는 말이 이토록 섬찟하게 들린 적은 결코 없었다.
등골을 타고 오스스 소름이 돋아 입만 벙긋거리는데 마침 모든
귀족들이 들어찬 것인지 황금문을 지키고 서 있던 호위병이
그들에게 붉은 깃발을 들어 보였다.
“따라와.”
익숙한 본궁의 계단을 까진 발로 오른 후, 알현실 앞에
멈추어 서자 심장이 튀어 나갈 듯 뛰어 대고 손발에 식은땀이
맺혔다. 미치도록 초조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물거리는 시야를 꽉 메우는 황금문에는 여느 때처럼
제국의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그게 혼을 빼앗아 갈
만큼이나 위압감을 주어서…… 라티아는 생전 처음으로
도망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