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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88화 (88/113)

88화

시프나드는 기이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건넸다. 굳이 대답을 바란 물음은 아닌 듯했다. 그는

혼란이 깃든 눈을 내리깐 채 침상맡에 주저앉으며 손을 뻗었다.

굳은살이 이리저리 박인 손바닥이 뜨끈한 이마를 감싼다.

진중한 얼굴로 열감을 확인한 그는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에

찐득거 리는 무언가를 발라 주었다.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시프나드잖아요.”

“여기가 어딘지는 안 물어봐?”

기억을 착기 전과 다를 것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시체처럼

옴짝달싹하지 않는 여자는 눈만 굴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궁금하지 않으니까요. 이제는 어디든 상관없거든요.”

모든 걸 놓아 버린 여자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져 있었다.

깨진 손톱과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인 몸. 때때로 아래에서 피가

흘러나왔기에 수시로 하녀가 드나들었다. 의사가 전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이 여자의 모든 곳은 성치 않다. 회복되려면

멀었으며, 어쩌면…… 이대로 영영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디서 어디까지 기억나?”

“처음부터 끝까지요.”

예상을 한참 빗나가는 반응에 시프나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을 되착은 사람이라기엔 너무도 잠잠하고

평화로운 목소리 였으니까.

“당신이 나를 절벽 아래로 떠밀고, 맹추가 된 나를 속이는

것도 모자라 기만하고 또 인형처럼 가지고 놀고. 아이의

아버지라 거짓말을 하고…… 괴롭게 만들었잖아요.”

“아니, 가장 중요한 게 틀렸어. 지금 너를 괴롭게 하는 건

내가아니야. 네 과거지.”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간 주제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시프나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 파렴치한 태도에

소름이 끼쳐 눈살을 찌푸리자 시프나드는 변명하듯 급히 말을

이었다.

“에즈라, 나는 그 남자와 달라. 너를 그 지옥에서 구해 낼 수

있어.”

“어떻게요?”

“다시 네 기억을 지워 버릴 거야. 괴로웠던 기억은 모두 잊고,

새로운 에즈라로서의 삶을 살아 나가는 거지. 나는 그런 네 곁을

끝까지 지키겠어.”

“싫다고 하면, 내 말대로 해 줄 건가요?”

“……아니.”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조금 느리게 내놓은 대답은 맥아리가

없었다. 어쩜 하는 생각이 거기서 거기일까. 하하, 짧은 웃음을

터트린 에즈라는 정해진 대답을 내놓는 남자를 단념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다들 똑같아요. 똑같이 나를 이용하고,

달콤한 말로 구슬리며 갖고 놀다가 필요가 다하면 내버리겠죠.

당신은 얼마나 갈까요? 내게 흥미가 다하면 당신은 어떻게

내버릴래요? 전처럼 절벽에서 떠밀 건가요? 아니면 손쉽게

칼을 휘두를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그가 성마르게 대꾸하며 위협하듯 상체를 들이밀었다. 더욱

가까워진 거리에서 서로를 헤집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살벌한 눈을 했다.

“기억 잃고 싶지 않아요.”

“거짓말. 솔직해져 보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때, 네가

어떤 얼굴로 웃었는지! 나랑 슬럼에서 평범한 삶을 살 때

편했잖아. 안 그래?”

이미 단정하듯 말하면서 그는 불안한 사람처럼 닦달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괴로운 기억들에 파묻혀서 살 거야? 정말

그러고 싶어?”

“그래야 하니까요.”

허망한 대답에 시프나드는 합죽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잊어버렸다가 지금처럼 벌을 받을까 봐 무서워요.”

에즈라는 그를 고통 어린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직까지도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대듯 쿡쿡 쑤셔 왔고,

식은땀으로 온통 젖은 등 뒤는 무척이 나 축축했다.

천천히 한 팔로 침상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킨 여자는 두 팔로

배를 감싸며 몸을 옹송그렸다. 설마 울기라도 하는 걸까. 바르르

떨리는 등줄기가 설움에 들썩인다. 벌을 받아야 한다는, 그래야

한다는 말에 문득 시프나드는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에즈라는 터무니없이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그런데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나 너를 모르면서,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못내 괴롭고 아파서.

처음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겨우 여자 하나 가지고. 죽네 마네 난리 법석 떠는

사내놈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던 수많은 날들.

빌려 간 돈을 갚지 못한 놈팡이 하나를 지독하게 고문하던 어느

날, 고작 빵 한 덩이를 가지고 와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동정을

구하던 노모의 주름진 손. 도둑질을 한 아이를 매질할 때면,

차라리 자신을 때려 달라 애원하며 아이의 앞을 가로막던 부모.

그 훔친 것을 주저 없이 동생에게 내미는 형과 꿀떡꿀떡

받아먹던 어린것까지. 처절한 슬럼가에서 수도 없이 보아 온

광경이었지만 아무 감정도 일지 않았더랬다. 그 누구도 내게

그렇게 대해 주지 않았으니까. 알지 못하는 것에 공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무엇도, 누구도 가슴 깊숙이 밀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

건드린 적 없던 유일한 어떤 곳.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을…… 그런.

“황제가 될거야.”

잘못 들은 건가. 떨림이 우뚝 멎은 에즈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 우두커니 았아 있는 여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였다. 귓가를 파고든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남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에즈라는 이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었다.

왜요? 왜, 왜 갑자기.”

“황제 되면 안 굶는다길래.”

“……뭐라고요?”

평이한 어조에 덜떨어진 음성이 튀어 나갔다.

“안 굶는다더라. 괜히 죄 없는 사람 때려서 빼앗지 않아도

되고. 한 푼 받아 내자고 손가락 자르지 않아도 되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박쥐처럼 굴면서 사람 안 죽여도 되고. 음,

또 …,”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깊이 팬 미간과 떨리는

말끝을 감추지 못했다.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꽉 죄어들더니 기어코

목구멍까지 막혀 왔다. 말을 잇기 힘든 건 저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시프나드는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개같은 귀족 새끼들한테 침 뱉을 수도 있다며.”

“시프나드, 그건.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내가, 내가 잘

알아요. 이런 일은 당신마저도……!”

어설픈 위선과 거짓을 내지르며 에즈라는 절박한 눈을 했다.

사실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 무엇이라도 그 사람을

위협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어 겁이 났다.

“무엇보다 너도 가질 수 있고.”

에즈라.

내가. 감히 나 같은 게 너를.

“너를 가질수 있대."

열망하는 눈빛이 강렬했다. 차마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는데 더 이상의 반항은 의미 없다는 듯 시프나드는

벌떡 일어나 문을 향했다.

“어디, 어디 가는 거예요. 아직 말 안 끝났잖아요.”

“손님이 오셨거든.”

갑자기 손님이라니. 발소리는 물론이고 그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에 에즈라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기도

잠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황급히 쥐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낸 뒤 침상에서 벗어나려 허둥지둥 움직였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

“왜이러는거예요. 시, 싫어요.”

그가 획 몸을 돌려 큰 보폭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소슬바람에 에즈라의 어깨가 그대로

굳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창문을 살폈으나 침실 안의 창은 모두

꽁꽁 닫힌 채였다.

그러면 이 바람은 대체 어디서 불어온 것이란 말인가. 등

뒤에 선 이가 내뿜는 섬뜩하고 탁한 기운에 아픈 몸이 꺾일 듯

휘청였다. 이윽고 묵직하게 닿아 온 손은 얼음장 같았다. 어깨를

다독여 주던 손은 스물스물 타고 내려가 팔뚝을 움켜잡았다.

“누구, 누구세요?”

“공주님. 모든 건 아주 순식간이랍니다. 어떤 고통도 없지요.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지금과는 아예 다른 삶을 살아가실

수 있어요.”

공주님이라는 호칭에 심장이 그대로 멎는 것만 같았다. 저를

공주라고 부를 이가 티텐의 사람이 아니면 또 누가 있을까.

아득한 어둠으로 질질 끌려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반응을 즐기며 술사는 귓바퀴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시간이 벌써이렇게 됐군요.”

나긋한 속삭임은 이어졌다.

“이제는 주무실 시간이에요.”

앞은 시프나드가 가로막고 있었으며, 이름 모를 술사는 제 등

뒤를 온통 껴안은 채였다. 무어라 항변하려 입술을 떼기도

전이었다.

두 사람은 기회만을 엿보다가 표적을 낚아채는 매처럼

에즈라에게 달려들었다. 채 반항다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침상에 짓눌린 에즈라는 덮쳐 오는 두려움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불붙은 듯 뜨겁고 축축한 손바닥이 거침없이 다가와 눈가를

가리고 이마를 감쌌다. 사지를 제압당한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으나 무용했다. 어떻게든 낯선 이의 손길을 피하려

고개를 휘젓던 에즈라는 결국 입꼬리를 올려 킥킥 웃고 말았다.

숨을 길고 얕게 흘리다가 눈을 감았다. 사방이 고요해지고

몸이 붕 뜬 기분이 들다가 곧 발밑으로 새까만 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러 들어왔다. 에즈라는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점점 차오르는 물이 가슴팍을 지나자

물비린내가 풍겨 오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결국 머리끝까지 삼켜 버린 물속에서 에즈라는 숨을 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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