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주는 혼자 남아서-87화 (87/113)

87화

그가 일컫는 모두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호위병은

간단한 묵례 후 뒤를 돌았다. 의사들이 여전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밍기적대자 히폴로테스는 성가심을 내보였다.

“가봐.”

“그, 그럼 혹 불편하시기라도 하면 바로 불러 주십시오.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

그럴싸한 대답을 줄줄 내뱉은 의사들은 서둘러 멀어져 갔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기에 히폴로테스는 다시금 방으로

돌아와 몇 개의 램프를 더 밝혔다. 그럼에도 안개가 짙게 낀

탓에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 안에서 히폴로테스는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시퍼런 안광을 빛냈다.

막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카코스가 과격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숨을 몰아쉬는 걸 보아하니 전언을 듣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온 듯했다.

“히폴로테스 님 ! 몸은 괜찮으신 겁 니까?”

“보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카코스는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카코스 뒤로 눈가가 짓무른

데몰레온과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제논이 들어섰다.

테르모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테르모스는 그분의 흔적을 쫓는 데 애쓰고 있습니다.”

히폴로테스의 의중을 읽은 카코스가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짧게 끄덕여 보였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기에

그들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카코스는 뻣뻣하게 몸을 곧추세운

채로 말을 이었다.

“라티아 님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아무래도

술수를 부린다는 이들의 힘을 빌린 모양입니다. 잠들어 계신

동안 이런저런 자백을 받아 냈습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가지

않는 술법이라 하더군요.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며칠이 지났지?”

“사흘입니다.”

부러 에즈라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으나 히폴로테스 역시

묻지 않았다. 참담한 심경이 어떨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솔직해지자면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한

번도 쓰러지신 적 없으시잖습니까.”

말없이 서 있던 데몰레온이 젖은 눈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으나 히폴로테스는 그런 그에게서 무심히 시선을

비꼈다.

“상황설명해.”

망설임 없는 명령이 떨어지자 카코스는 굳게 눈을 빛내며

입을 뗐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고위 귀족은 물론이고, 들러리 신세

취급을 받았던 부호 귀족들까지 긁어모아 사병을 합친

모양입니다. 그렇게 몸집을 부풀린 세력이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잠들어 계셨던 며칠 새, 수도와 먼

지역까지 또 다른 황자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이것 또한 아브타크가 의도한 일이 분명합니다.”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는 것을 구구절절 피력하고 있는데도

그는 한 치의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마치 조각상처럼 묵묵히

보고를 들으며 계속해 보라는 듯 눈짓만 했다.

“흉포한 황제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세력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며 황성 안은 물론이고 수도와 슬럼가까지 들썩이고

있습니다. 아브타크는 반란을 숭고한 일이라며 포장하고

정 당화하고 있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불리한 상황임을 전해야 하는 카코스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허나 책사는 이 모든 걸 극복해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궁지에 몰릴수록 머리는 차갑게

심장은 뜨겁게 만들어야 한다.

“히폴로테스 님. 여기서 아주 작은 틈도, 물론 명분도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황실에 충성하는 귀족

세력을 모아 황성의 병사들과 합병시켜야 합니다.”

“잠깐만, 황실의 핏줄을 이은 히폴로테스 님께 백성들이 등

돌릴 이유가 없잖아!”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리를 달달 떨던 데몰레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불쑥 소리를 내질렀다.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기에

카코스는 미간을 구기며 데몰레온을 노려보았다.

“민심이 좋지 않아. 황비님을 찾기 위해 제국을 뒤집어 놓고

황궁 병사들의 인력을 낭비하지 않았냐며 불평을 늘어놓고

있지. 심지어 흉년이 든 것까지도 황제가 무능한 탓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기에 황실의 핏줄이 하나 더

남아 있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더욱 불을 지핀 꼴이야.”

냉정한 어조로 구구절절 설명해 나가던 카코스는 몸을 돌려

히폴로테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바다 건너 티텐의 백성들이

제국의 반란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는 정보까지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거래 조건은 티텐의 독립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제기랄, 듣자 듣자 하니까! 너는 대체 누구 편인 거냐! 왜

그딴 불쾌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거야!”

씩씩거리는 데몰레온의 분노는 쉬이 꺼지지 않을 것처럼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한시가 급박하고, 이렇게 싸울 시간도

아깝건만.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올려다보던 카코스는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목소리 낮춰, 데몰레온.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히폴로테스

님을 섬기기로 맹세했다. 그리 섬기기에 충언을 아끼지 않는

거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심각성을 인지하는

게 중요한…… !”

“조용.”

말을 이올수록 분개하던 카코스는 나지막한 말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관망하던 히폴로테스는 침실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칼을 잡아 쥐었다.

“라티아를 데려와.”

히폴로테스는 가볍게 칼을 휘둘러 날을 세웠다. 가드 부분에

단단히 묶여 있는 뉙스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카코스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히폴로테스 님. 제발 그것만은 안

됩니다.”

“맞습니다. 주, 죽이시려는 거라면! 너무 성급하십니다!”

데몰레온 역시 카코스의 의견에 맞장구치며 끄덕였다.

방금까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히폴로테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지독히도

씁쓸하고 허탈한 미소에 제논은 그가 손 놓지 못하는 뉙스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문득. 제논과 히폴로테스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제논이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아브타크에게 명분을 내주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아브타크가 원하는 대로 되고 말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리 둘 수는 없습니다!”

“아니.”

단호한 대답이 흥분을 자른다. 히폴로테스는 턱을 들어

올리며 오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는 뭐가 어찌 되든 상관이 없어.”

“……예?”

“황제니. 제국이니. 권력, 명예, 영광, 삶과 죽음까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는 모든 걸 포기하겠어.”

생에 처음 원하는 게 생겼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에즈라

하나뿐이야. 그래서 나는 다 버려서 에즈라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전부 내버릴 수 있어. 나는 너를 위해 네

발 앞에 모두 내려놓고 발등에 입 맞출 수 있어.

“무기를 내려놓을 거다. 무기를 내려놓고, 에즈라에게 갈

거야. 나는 더 이상 그 애를 혼자 두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그 전에 꼭 끝내 놓아야 할 일이 있지.”

말을 멈춘 남자의 붉은 눈이 희번득 빛났다. 드디어 안개가

걷히고, 마침 새어 들어오는 청명한 아침 볕은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밝았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오는

새하얀 빛 무리에 모두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부서지는 빛줄기 아래서 히폴로테스는 손에 쥔 황제의 검에

시선을 고정했다.

“카코스, 진짜 마지막이야.”

그가 다짐하듯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더는 없어.”

숙였던 고개를 든 히폴로테스의 눈이 카코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사로잡았다. 죽어도 따르고 싶지 않은 명령이었으나

수없이 들어 왔던 명령이 아니었다.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탁이었다.

“그러니까 모두를 불러 모아. 오늘의 주인공은 나와

라티아다.”

누구도 그가 내린 결정을 뒤집을 수 없을 것이다.

히폴로테스는 넋이 나간 이들을 둘러보며 끝내 못 박았다.

“라티아를 데려와.”

한참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은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러 왔다. 숨 한번

내쉬는 것도 지긋지긋했고,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을

조각 내고 또 찢어 버리고만 싶었다. 염치도 없지. 살고 싶어

꾸역꾸역 공기를 축내는 제 몸이 진저리 날 만큼 혐오스러웠다.

고작 팔을 들어 올리는 것뿐인데. 사지는 돌덩이처럼

천근만근이었다. 에즈라는 꾸물꾸물 기어가는 속도로 납작해진

배를 더듬어 나갔다. 원래 뭐가 있었나. 아니, 아니다. 모든 게

길었던 꿈처럼 느껴져서 에즈라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모든 건 꿈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 분명 그리 생각하는데도 이 지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뭘까. 가장 중요한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하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그저 아래로, 그 아래로

계속 줄줄 새어 나가는 것처럼.

에즈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방이 너무

어두워서 모든 게 그림자처럼 보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자 시야를 가리는 발이 눈에 들어왔다.

곁에는 드리운 그림자밖에 없었다. 늘 그렇듯 아무도 곁에

없다. 아랫배를 쓰다듬다 보니 눈꼬리에서 무언가 자꾸

흘러내렸다. 아아,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 애원했던 것은

주제넘는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저 같은 것에게는 그

누구도 허락된 적이 없는데.

나를 닮은, 사랑한 누군가를 닮은 또 다른 생명.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얼마 전까지 나는 너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꿨었어.

나와 달리 네가 태어난 날을 꼭 기억하려고 했어.

태어나자마자 꼭 안아 주고 나아갈 삶을 축복하고, 너를 위해

준비해 놓았던 배내옷을 입혀 주고, 발음마저도 황홀한 이름을

선물하고. 매년 네 탄일을 축하하는 거야.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또 상상했어. 네 눈동자는 나를 닮았을까, 아니면 그 사람을

닮았을까. 그러다가 결국 그를 닮기를 바라고 말았지. 너를 볼

때조차도 그를 떠올리고 싶었거든.

네 머리칼은 누구를 닮았을까. 그것 역시 그 사람을 닮았으면

했어. 내 머리카락은…… 결이 좋지 않으니까. 그만큼 네게는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었어.

그냥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만큼,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으니까. 그 사랑이

하나쯤은 내게도 있었으면 했다. 아주 평범하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는 그런.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왜 하필 내게 온 거니. 고귀한 신분의 귀족

여인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평범하고 순박한 여인에게 갔다면.

나 같은 죄인을 어미로 두지 않았다면…… 나만 아니었다면

너는 찬란한 세상을 살아갔을 텐데.

에즈라는 고개를 바로 한 채 격자무니가 새겨진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숨이 불규칙하게 이어지더니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온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작열감에 벅찬 숨을

몰아쉬다가도 신음이 터질까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비틀어

이불자락을 찢어발길 듯 움켜쥐고 이마를 부비며 몸부림쳤다.

괴로움을 잊으려 가슴께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내리치기도

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가슴의 통증이 잊혀지길 바라며.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고 붉어진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그러다가 이내 기운이 다해 눈물만 흘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어 눈가가 바싹 마를 즈음, 문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저 없이 문턱을 넘을 때는 언제고. 침상 바로 앞에 선 채로

답지 않게 멈칫하던 남자는 곧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