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하필이면 먹구름 아래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에즈라가 몸을 일으킬 때부터 그녀를
직시하고 있던 살수들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를 그녀를 뒤쫓고
있었다.
아니, 뒤쫓기보다는 그녀 혼자 자빠져 산을 구르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쉬이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의 발악을 내려다보며
희열을 느끼는 사냥꾼처럼.
어둠 속에서 질서 없이 자리 잡은 나무를 피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몇 번이나 나무줄기에 몸을 부딪치고 나서야 에즈라는
제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느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풍겨 오는 비릿한 피 내음에도
또다시 머리를 뒤흔들며 부정하는 여자는 가느다란 두 손을
휘적이며 아슬아슬한 걸음을 재촉했다. 또 어딘가에 부딪쳐
긁히고. 각진 돌에 베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은 발과
종아리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 아악!"
젖어 들어 턱과 뺨에 들러붙는 검은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그러다가 정신 나간 여자처럼 절규했다.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과
함께 발을 헛디딘 에즈라는 그대로 산비탈을 구르고 말았다.
구르며 염치없이 빌고 또 빌었다. 아이만큼은. 이 아이만큼은
지키게 해 달라고. 내게 남은 단 한 가지를 빼앗아 가지 말아
달라고.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추적추적 내린 비로 질척하게 젖어 든 검붉은 흙바닥.
울퉁불퉁. 갖가지 크기로 땅에 박혀 말랑한 피부를 위협하는
무자비한 돌덩이들. 끝이 뾰족한 잔가시들과 잘게 찢어진
나뭇잎들이 머리칼과 몸에 이리저리 엉겨 붙는다.
그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웠으나 가장 저주스러운 것은……
하필이면 산비탈 중심에 우뚝 솟아 있던 둥근 돌덩이였다. 배를
꽉 감싸 몸을 웅크린 채 처참한 모습으로 구르던 에즈라는 눈을
뜰 수 없었고, 앞에 자리 잡고 있던 돌을 보지 못했다.
신음조차 뱉지 못할 만큼의 충격과 고통이 배를 강타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손바닥 아래서
에즈라는 생명이 완전히 끊겨 버렸음을 깨달았다.
죽었다. 피를 흘리며 죽어 버렸다.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어.
“하. 하, 하하……”
경사가 완만해진 곳까지 굴러 내려온 에즈라는 그제야 배를
감쌌던 손을 풀었다. 툭, 힘없이 늘어진 팔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시체처럼 하늘을 보고 누운 채 여자는 간헐적으로
신음 같은 웃음을 토했다.
“아아악!”
그러다가 울부짖으며 자지러졌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양손에 쥐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눈을 감은 채로 줄줄
홀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에즈라는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서
몸을 바르작거렸다.
‘에즈라. 오지 마라.’
‘너 같은 건 죽어 버려야 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불타 잿더미로 가라앉는 나의 나라. 끝까지
나를 걱정했던 아버지와 피를 나눈 자매들의 참혹한 죽음.
아비규환 속에서 불타 죽거나 돌 더미에 깔린 채 고통스럽게 죽어
가던 무고한 사람들까지 .
“맞아. 내가 죽였잖아! 내가 다 죽였잖아! 그런데, 그런데…… ”
대체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던 걸까.
“어떻게 당신을 잊었을까.”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수많은 히폴로테스를 보았다. 내게 사랑을
연기하던 남자. 내 아버지를 죽이며 조롱하던 남자. 나를 살리고
나를 강제하고, 내게 손찌검을 하고, 인정사정없이 사람을 베는
주제에 뒤돌아 헐떡이던…… 끝내 나밖에 남지 않았다며 사랑을
구걸하던 불쌍한 남자.
그리고 그런 당신의 발치에 매달리며 사랑을 속삭이던 내가
있어.
에즈라는 대자로 누워 하늘에서 내리는 장대비를 모두 맞았다.
뻔뻔하게도 죄가 모두 씻겨 내리기를 바라며 울듯 웃었다.
“……히폴로테스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내가. 태생부터 저주스러웠던
내가. 사랑했던 모두를 죽여 버린 내가. 처음으로 살린 당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나를 살게 한 당신을 어떻게 잊었나.
모든 걸 잃는대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아.
흐린 시야에 퍼렇게 번뜩이는 낙뢰가 비쳤다. 뒤늦게 짐승처럼
포효하는 밤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히 폴로테스!”
처절한 부름 역시 하늘이 우는 소리와 세찬 빗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살수들은 잠시 주춤하다가 뒤늦게
그녀의 주변을 둘러쌌다. 망가진 인형처럼 자신을 놓아 버린
에즈라를 지켜보던 그들은 착잡한 심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정말 죽여야 하나. 우선 데려가서 상황을 보고하는 건……:’
“미쳤군. 이 여자는 기억을 찾았다. 살려 둬서는 안 도!!.
아브타크 님의 명령이다.”
“그래도 이미 아이를 잃지 않았나. 이젠 아브타크 님께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니야.”
살수들은 명령에 주저하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죽여야 하지만.
인간으로서 동정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자 짧게 고개를 털어 낸 살수 하나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런 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지. 한 번만 더 명령에 토를
단다면 네 목도 베겠다.”
무엇보다 되돌리기엔 늦었다. 다들 동조하는 분위기에 처음
말을 꺼낸 살수는 착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즈라는
여전히 텅 빈 눈동자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살수는
기다란 검을 빼 들더니 간헐적으로 헐떡이는 가슴팍을 겨누었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날이 잔뜩 선 칼끝을 박아 넣으려 팔을
치켜든 그때, 엄청난 빠르기로 날아든화살이 그의 손등에
명중했다. 억, 단말마의 신음을 흘린 살수가 칼을 놓친 채 바닥을
구를 정도의 완력이었다.
“빌어먹을……손등이 뚫렸다.”
살수가 쉬이 일어서지 못하고 끙끙거리자 다른 이들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급히 검을 빼 들고 사위를 이리저리 살폈으나
화살을 날린 이의 기척은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언제. 어디에서화살이 날아올지 모를 상황에 처했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 바짝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살수들은
에즈라를 재빨리 해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 속셈을 읽은 듯화살을 날린 이가 새까만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작 그만.”
한마디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살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점차 다가오는 남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짙은 안개 탓에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 누구냐.”
“칼 거둬. 대가리에 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황제가 벌써 여기까지 쫓아온 것일까. 살수들은 에즈라의
앞으로 우르르 몰려와 남자로부터 그녀를 숨겼다.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에화살 하나만 덩그러니 들고 있던 남자는
픽. 짧게 실소했다.
“지능도 낮은데 눈치까지 없으면 어떡해.”
어쩐지 비아냥대는 어조가 낯설지만은 않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탓에 그들은 곧바로 남자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시프나드님.”
아브타크의 곁을 오래도록 지켜 온 살수들은 그제야 겨누었던
칼날을 천천히 내렸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눈빛만은 잔뜩
벼른 칼날처럼 살기가 홀렀다. 미련 없이 그들을 스쳐 지나간
시프나드는 곧장 널브러져 있는 에즈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잔뜩 빗물을 머금은
몸은 시체처럼 핏기가 없었고 진흙으로 더러워진 흰색 키톤은
아래서 흘러나오는 핏물에 젖어만 갔다.
에즈라는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보랏빛 입술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저 아래로 내려앉는 것만 같아 급히 그녀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밀랍 같은 이마는 불덩이였다. 치미는 분노에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뺨과 이마에 달라붙은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정리해 주던
시프나드는 이를 까득 갈았다.
“니네가 얘이 꼴로 만들었어?”
“……황비를 죽이라는 아브타크 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연약한 사냥감 쫓으면서 재미
좀 봤나?”
“명령입니다. 어쩔수 없었습니다.”
그는 구차한 살수의 변명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에즈라를 내려다보던 시프나드는 이내 가뿐하게 에즈라를 안아
든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죽여 버리겠다 발광하며 칼을
휘두를 것이라 예상했건만. 시프나드의 뒷모습를 응시하던
이들은 발이 묶인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차라리 분노를 터트리는 게 덜 무서운 일이라는 걸
잘 알았다.
“안 가?”
잔뜩 어깨를 굳힌 살수들은 무덤덤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시프나드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으나 그들의 목적지는 단
하나였다. 수도 중심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아브타크의 성을
향해 그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평생 눈뜨지 않기를, 정신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눈을
감고 시간을 죽였다. 캄캄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닥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밖은 비가 내리는 것인지
적막한 방 안에 을씨년스러운 빗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세졌다가, 또 한때는 옅어졌다가. 비는 제멋대로 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창틀을 음산하게 흔들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을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한다. 그렇게
내리는 빗물이 가슴속에 하나둘 어린 모양이었다. 그는 결국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린 채 흐느끼고 말았다. 나는 또 지키지 못했다.
지키지 못하고 혼자 이리 살아남았어.
“왜,왜 나는……:’
내가 원한 건 뭐였을까. 아니, 애초에 원하던 게 있었던가. 내가
손에 거머쥔 것들은 진정 내가 원한 것이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건 무슨 의미가 있나. 황제라는 높은
자리. 손안에 든 커다란 부와 드높은 명예, 마음껏 쥐고 뒤흔들
권력까지.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소중한 것들을
짓밟고 일어서며 끝내 움켜쥐고 놓지 못했던 건가.
한심하고 미련하다. 지나온 삶이 온통 후회와 미련으로 물들어
있어서 차마 뒤돌아보기가 두려워질 만큼. 그냥 이대로 이 삶을
끝내 버리고 싶을 만큼이나.
그래도 용기를 냈다. 히폴로테스는 지금까지의 삶을 거슬러
보았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어머니 대신 죽었더라면.
형과 아우를 참혹하게 죽이지 않았더라면. 티텐을 멸망시키지
않았더라면, 네 앞에서 사랑을 연기하지 않았더라면. 끝내 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냥.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삶이 고통인지도. 하늘이 내린 벌인지도 모르고
살아갔을 거야. 이미 죽은 사람은 아픔을 모르니까. 아픔도
후회도 모른 채 살아가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겠지.
그런데 네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내 모든 게 뒤집어졌어.
그렇게 살다 죽기를 바라다가도 죽음조차 혼자인 것이
두려워졌어. 네가 없는 삶은, 모든 걸 가진 삶보다 의미가 없다.
모든 건 여기까지였다. 숨이 멎은 사람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미동도 않고 있던 히폴로테스는 이내 벼락 맞은 사람처럼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슴푸레한 방 안에는 램프 몇 개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깊이 잠들었던 것뿐인지 몸 상태는 그대로였다.
잠시 가슴팍을 더듬던 히폴로테스는 침상에서 내려와 직접 문을
열고 나섰다. 그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앞을 지키던
호위병들과 세 명의 의사는 경악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런 표정 할 필요 없다.”
“하, 하지만……:’
“가서 모두를 불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