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옮겨.”
“예!”
“셀리, 뭐 하고 있는 거지? 어서 따라가지 않고.”
재게 발을 놀리는 살수들과 달리 셀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 못 미더운 태도에 눈살을 찌푸리자
뒤늦게 정신이 든 것인지 셀리는 대강 허리를 숙여 보인 후, 급히
살수들의 뒤를 따랐다.
셀리는 본궁 지하에 마련된 비밀스러운 뒷문으로 살수들을
인도했다. 전쟁이나, 반란 등. 급박한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곳이었으므로 아는 이가 드물었으나 입이 가벼운
하녀들이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사방이 돌로 이루어진 미로를 훤히 꿰고 있는 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황제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덕분에 아직
황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으나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그. 무겁지는 않으세요?”
“닥치고 앞서가기나 해.”
임신부인 에즈라가 걱정돼 힐끗 뒤를 돌아보았으나 차가운
대꾸만 되돌아왔다. 초조함에 몸짓이 뻣뻣해졌다. 점점 길은
오르막길로 변했고, 그럴수록 뒤를 쫓아오는 살수들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 도착했어요.”
가쁜 숨을 내쉬며 잠시 호흠을 고른 셸리는 녹슨 걸쇠를 풀고
문을 밀어젖혔다. 끼긱. 소름 끼치는 소음 뒤로 바람이
들이닥쳤다. 감았던 눈을 뜨자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의 입구가
보였다.
문턱을 넘어 야트막한 주변을 둘러보니 황성과 꽤 멀리 떨어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지하를 이용해 완전히 황성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리로!”
가장 먼저 어둠이 내려앉는 숲은 몸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법. 저물어 가는 노을 아래,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낯선 곳을
파악해 낸 살수는 에즈라를 고쳐 업고 숲속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세 사람은 숲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발 아래 엉겨
붙는 부러진 잔가지와 자잘한 돌들. 가죽 신발 앞코에 모래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는다.
허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살수들은 밖으로
드러난 두터운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지 않게 조심하며 날듯
뛰어갔다. 그런 그들을 끝까지 뒤쫓는 것은 셸리에게 벅찬
일이었으나 그녀는 끝까지 그들을 놓치지 않고 뒤쫓았다.
“생각보다 훨씬 잘 달리는군.”
“조금 천천히 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러지.”
흔쾌히 그러겠다는 대답에 되레 놀란 것은 셀리였다. 앞서가던
세 명의 살수들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에즈라를 땅 위에 철퍼덕
내려놓은 채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풀며 셀리를 훑어보았다.
“잠시만요. 뒤쫓아 올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그냥 조금 느리게
가는 건 어떠냐고 물었던 건데요.”
“주변을 좀 둘러봐. 사방이 완벽한 어둠이지. 게다가 지금은
달빛조차 어두워서 더 이상 마구잡이로 뛰어나가다가는 산에서
굴러떨어지기 십상이야.”
그제야 그들의 의도를 파악한 셀리는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들끼리 작게 두런거리던 살수들은 이내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단번에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숨을 죽였다.
갑자기 허리를 반쯤 숙인 그들은 칼로 손을 뻗으며 셀리에게
눈짓했다. 위험 상황인 것인가.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으나 그녀는 하라는 대로 입을 꽉 틀어막은 채
흙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즈라의 앞을 지켰다.
긴장감에 절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서늘한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한껏 몸을 움츠리는데 세찬 바람결에 섞여 옅은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시선을 교환하던 살수들은 잘못 들은 건가 했던
풀피리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오자 검으로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알겠으니 나와라.”
짧은 신호로 소통이 오간 것인지 높다란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살수 다섯이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어떻게 올랐나 싶을
정도로 키가 큰 나무인데도 그들은 금세 땅을 딛고 서 허리에 찬
검을 뽑는 게 아닌가.
“여자를 죽이러 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까이에 있던 살수 세 명은 새로 합류한
이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고, 셀리와 그들의 거리는 꽤 멀어진
상태였다.
“……여기서? 살려서 데려가는 것 아니었나.”
“아니다. 목적은 죽이는 것이다.”
“아브타크 님께서 그리 명령하신 건가?”
“그렇다. 그것이 본래 목적이시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이 정도 거리라면
괜찮을 듯했다. 셀리는 눈치를 보며 한 팔로 에즈라의 어깨
부근을 마구 흔들었으나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살수의 어깨에서 그리 흔들렸는데도 깨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이번에는
연약한 팔뚝을 꽉 꼬집어 버렸다.
혼자 움직거리는 그녀가 이상했는지 살수들의 시선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순간, 심장이 그대로 멎는 것만 같았으나 괜스레
뺨을 부비는 척하며 위기를 넘긴 후 에즈라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흔들어 보인 그때였다.
“으”
“정신이 드세요?”
“……셀리?”
“쉿 조용히 하세요. 제발…… 아무 말도.”
가느다랗게 눈을 뜨자 사방이 온통 검었다. 흐린 시야에 두어
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조금이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손목이 꽁꽁 묶여 움직여지지 않는 두 팔과 겹쳐 묶인
발목까지. 슬쩍 몸을 비틀어 보이던 에즈라는 문득 꿈인가
생각했다.
"에즈라.”
하지만 속삭이듯 제 이름을 부르는 셀리의 냉담한 얼굴은
이것이 절대 꿈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임을 알아차린 에즈라는 곧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발만 풀어 드릴 거예요. 제가 신호하면 저를 확 밀치시고 미친
듯이 도망가시는 거예요.”
에즈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오II,우리가 이런
곳에 함께 있는 걸까. 혹시 나 때문에 셀리까지 함께 납치당한 건
아닐까. 지금 상황에서 물어봤자 하등 도움 되지 않을 의문들을
떠올리며 눈물 고인 눈만 끔뻑이자 셀리는 뺨에 묻은 휽을 털어
주며 속삭였다.
“죄송해요. 이건 그냥 제 위선이에요.”
‘그럼 셀리는……?’
입 모양으로 또박또박 의사를 전한 에즈라는 혼자 도망칠 수는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게 참 우스워 헛웃음이 다
났다. 이런 와중에도 남는 나를 걱정하는 건가. 어떻게 하면,
어디로 가면 더 ‘빨리 도망갈 수 있는지 생각은 안 하고. 이리도
멍청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도저히 죽게 놔둘 수가 없어.
혼자는 갈 수 없다며 발버둥 치는 에즈라의 어깨를 꽉
부여잡으며 셀리는 엄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맞고 기절한 척하면 돼요. 그리고 어차피 저들은
황비님을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도망치다가.
안전한 곳에 숨죽여 계세요. 저들이 여기를 떠날 때까지 나오지
마시고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알겠어요?”
‘아기, 배속아기는?’
“아기. 요?”
눈가가 붉어진 에즈라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이는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분명했다. 울컥 치미는 감정에
당장이라도 이 여자의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사라질 수
있다면, 없었던 사람처럼 잊혀지고도 싶었다.
잘못된 선택은 이토록 사람을 후회하게 만든다. 하지만
돌이키고 회개하기엔 저는 너무 망가져 버렸다. 더 이상 저열한
위선을 떨며 그녀를 우롱하고 싶지는 않았다.
눈 깜짝할 새 비열하고 표독스러운 눈으로 에즈라를 쏘아보던
셀리는 귓가에 친절히 속삭여 주었다.
“멍청하긴. 이래도 모르겠어?”
셀리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이기죽거리는 목소리에
일순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심장이 머리끝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한껏 커다래진 녹빛
눈동자가 불안에 떨려 오자 결국 에즈라는 눈을 꾹 감았다.
아니. 나는 몰라. 듣고 싶지 않아.
“내가 지금까지 당신을 속인 거라고. 처음부터. 아주 처음부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거야.”
“난 단 한순간도 당신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어. 당신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 마녀거든.”
아아, 손이 풀려 있었다면 귀를 틀어막아서라도 듣지 않았을
텐데.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
빌었을텐데.
‘ 셀리.’
거짓말. 진짜 우스운 거짓말이다. 완전 거짓말이잖아.
처음 만났던 날. 나를 보며 해사하게 웃어 주었잖아.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내게 손 내밀어 함께 나가자고 말해 주었잖아.
장미 정원에서 꽃향기도 맡고. 내 옷을 매일 골라 주었었잖아.
함께한 시간 속에서…… 우리 되게 즐거웠잖아.
내가 추워하면 망토를 둘러 주고. 늘 나 대신 울고화내
주었으면서. 어떻게 그게 다 거짓일 수 있어. 아니야, 아니다. 나는
믿고 싶지 않아. 믿지 않을 거야. 내 머릿속의 너는 그런 잔인하고
냉혹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도 단 하나의 진실은 수십 개의 추억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조각이 되어 꿈처럼 하얗게 바래져
갔다.
싫어, 믿기 싫다. 왜, 왜 그런 걸까. 왜 나를 배신한 건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진 않았을까. 그냥 내가 싫었던 거라면, 그것만은
제발 가슴에 묻어 두고 살아가 줘.
비참하다. 또 허탈하다. 내가 생각한 만큼, 내가 소중히 여겼던
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소중하지 않았던 사람.
그저 마음의 크기가 같지 않았을 뿐인데.
그런데 비극은 항상 그 간극에서 시작된다.
“ 아아.”
무너져 가던 에즈라는 문득 신음을 흘렸다. 저도 모르게
셀리와의 오래된 추억을 기억해 냈다. 셀리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시작해서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마치 그림처럼 한 장씩 스쳐
지나가지 않았나.
정녕 이 기억이 진실이라면…… 왜 다른 기억은 흐린 거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느낌에 고개를 이리저리 흔드니 시야가
어지러웠다. 감당하기 벅찬 혼란에 눈앞은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에즈라가 누구나 알아챌 법한 새된 신음을 휼리자 셀리는 곧바로
꺅. 비명을 지르며 눈을 홉뜨며 무언의 말을 건넸다.
가! 발리 가!
이래서는 안 되겠던지 셀리는 흙을 움켜쥐곤 에즈라의 얼굴에
뿌렸다. 촉촉한 흙 내음이 얼굴에 번지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이리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즈라는 남은 정신을 긁어모아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도망가야 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그러니까……
뒤돌아보지 마.
이윽고 에즈라는 이를 악문 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에 홀로
남겨져 있을 셀리가 눈에 밟혔으나 달려야 했다.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발목이 꺾이고 무릎이 휘청거려도 에즈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쓰러지지 않도록 은 신경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