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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84화 (84/113)

84화

“물론입니다! 혹……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셀리는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다가 금세 걱정을 꾸며

냈다. 순진하게도 의심을 거둔 의사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황비님께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나날이 태아의

기척이 사라지고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거의

느껴지지가 않네. 우선 마지막으로 약을 하나 더 추가했으니

주무시기 전에한번더 올리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염려를 지우지 못한 채 의사는 손을 휘저으며 뒤돌아 멀어져

갔다. 노인의 뒷모습을 무감한 눈빛으로 훑어보던 셀리는 샐쭉

입꼬리를 실룩이다가 호위병에게 눈짓했다. 그들 중 하나가

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가 곧 의원이 맡겨 두었던 약병을 들고

돌아와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셀리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한 뒤 침실의

문턱을 넘었다.화창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침실 안,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에즈라가 므I 몸을 일으켰다.

“셀리!”

단번에 반가운 얼굴을 한 에즈라는 살랑이는 걸음으로

셀리에게 다가왔다. 셀리는 능숙하게 깜찍한 웃음을 꾸며 내며

애교를 떨듯 에즈라의 팔에 팔짱을 꼈다.

“몸도 무거우실 텐데 이렇게 마중 나오시기예요?”

“반가워서 그래요.”

반가움이 담뿍 묻어나는 말투와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에

셀리의 미소가 한순간 얼어붙었다. 분명 어색한 웃음이 되었을

것이다. 동요하기도 잠시,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한 셀리는

서글픔을 담아 부러 툴툴거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약을 내미는 것뿐이라니.

죄송해서 어떡해요. 정말이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정말 고마워요. 셀리가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외로운 삶 속에서 제

또래의 친구가 생긴 것은 셀리가 처음이었으니까. 종과 주인의

위치라며 말을 편히 해 달라 극구 부탁할 때도 그리할까 진실로

고민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셀리와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

무엇보다 셀리를 만날 때마다 어딘가 미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마치 아주 오래전, 셀리와는 달리 아주 딱딱한 표정을

하고 사무적인 말만 내뱉던 누군가의 상냥함이 떠올랐으니까.

알 듯 모를 듯 한 이를 향한, 가슴 한 켠이 슬퍼져 오는 그리움은

대체 누구를 향한 걸까.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아, 아니에요. 그보다 그거 오늘 약이죠?”

“네? 아……맞아요. 잠시만요, 황비님.”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약병을 내밀지 못했다. 휙, 뒤를

돌아 에즈라를 등진 채로 셀리는 또다시 머뭇거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믿고 의지하는 여자를 마주할 때마다 나날이

후회가 커져서. 그만큼 나를 원망하게 돼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온 주제에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자신의 위선이 혐오스러웠다.

“셀리?”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미 태아는

중독되었다고 했으니, 이제는 그만해도 되는 거 아닐까.

내리깔았던 두 눈을 반짝 빛낸 셀리는 다시 뒤를 돌면서

실수인 척, 손을 놓았다. 덕분에 손안에 들고 있던 약병이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얇은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놀란 에즈라는 뒤로 몸을 물렸다.

“괜찮아요, 셀리?”

가슴을 쓸어내리던 에즈라가 곧바로 멀거니 서 있는 셀리를

불렀으나 그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어리숙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죠?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치지 않았어요?”

“정말 괜찮아요. 황비 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이 상황에서도 자신을 염려하는 에즈라를 보며 쓴웃음을

짓던 그때였다.

“저도…… 아!”

“황비님!”

자신에게 다가오던 에즈라가 갑자기 머리 한편을 부여잡더니

테이블 쪽으로 휘청이자 셀리는 비명처럼 에즈라를 불렀다.

사방으로 흩어진 유리 조각을 피해 에즈라에게 급히

달려갔으나 그녀는 이미 바닥에 쓰러진 후였다. 으으, 간헐적인

신음을 흘리던 에즈라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괘. 괜찮으세요?”

“아기는……

“두툼한 융단이 깔려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머리가, 머리가깨질 것만 같아요.”

“잠시만요. 잠시만 여기에 계세요. 의사를,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악!”

조금 휘청인 것뿐인데 머릿속을 뾰족한 것으로 휘젓는 것만

같은 통증이 번졌다. 이어지는 끔찍한 고통에 차마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굳힌 채 발발 떨고만 있는데 감은 두 눈앞에

어느 날의 기억이 걸린 그림처럼 나타났다.

‘이건 뭐예요?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언제였던가. 며칠 전 밤이었던 것 같다. 녹진한 몸이 되어

침의를 힘겹게 걸치는 에즈라의 눈에 방 한편에 세워 둔 그의

검이 들어온 것은.

‘……되게 낡았네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이자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민망함에

화르륵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그래서 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검 앞으로 다가가 그 회색빛 천 조각을 감싸 쥐었다.

‘그건 부적이야.’

‘부적이요? 의외네요. 히폴로테스 님께서는 이런 거 안

믿으실 줄 알았어요.’

침상에 누워 에즈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히폴로테스는

그저 말없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적나라한 눈길에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 에즈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 조각을

살살 쓸어 보았다.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신경이 쓰였다. 누가 봐도 직접 기워

만든 것 같은 천 조각에 서툰 솜씨로 새겨진 글자. 마음을 담아

손수 만들었을 게 분명한 것을 낡아 빠졌는데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묶어 두다니.

그것도 어찌나 꽉 묶어 놨는지 매듭을 풀기란 어려워 보였다.

안 그런 척 질투를 숨기며 물어보자 그는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홈, 작게 숨을 내쉬며 턱을 괸 그는 곧

중얼거렸다.

‘그냥…… 이름이야. 내 이름.’

고작 이름이라면서 그렇게 아픈 표정을 지을 필요가 있었나.

일순, 가슴 한가운데가 꽉 죄어들며 숨이 막혀 오는 터라 감히

누가 이런 것을 주었냐며 따져 물을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그때 느꼈던 불편함이 발밑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에즈라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 시각, 집무실에서 쌓인

집무를 보던 히폴로테스는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란에 잔뜩

인상을 썼다. 들어오라 말하기도 전에 들이닥친 호위병들의

질린 표정을 발견한 히폴로테스는 그 순간 그대로 굳었다.

“무슨일이지?”

“화. 황비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쩌다가? 그런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을

채웠으나 몸이 더욱 빨랐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남자의 뒤로

금색 의자가 나동그라지고 히폴로테스는 체통도 잊은 채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어느새 몰려든 호위병들이 그를 피해 길을 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어찌나 짓씹었던지 피가 방울방울 비치고

있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혹시, 혹시라도……오

불길한 생각만 떠돌던 그때,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자 히폴로테스는 뜀박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시가 급한 이때 감히 제 앞을 가로막은 이를 노려보는

눈빛은 금방이라도 사냥감을 찢어 죽일 날짐승의 것처럼

살벌했다.

“뭐 하는 짓이지. 비켜.”

대답을 들을 시간도 아까워 막 스쳐 지나가려는데 라티아는

그의 뒤에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에즈라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군지 알아요?”

“……뭐?”

그렇게 만들다니. 에즈라를 정신을 잃게 만든 이가 있다는

말에 히폴로테스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게 누구인지,

어쩌다가 에즈라가 쓰러졌다는 것인지. 더 설명해 보라며

그녀를 재촉하려는데 뒤를 돌아 그를 마주한 라티아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바로 나예요.”

라티아는 쩌적쩌적 금이 간 남자의 마음이 부서져 내리는

꼴을 즐거이 지켜보았다.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그는 무척이나

동요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 주먹을 쥔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라티아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신경질적으로 걷어 올렸다.

“나를 봐요. 당신이 새긴 이 흉터를 보라고!”

볼록한 뺨에서 귓가까지 가로로 길게 이어진 붉은 흉터. 살이

엉겨 붙게 아물어 울퉁불퉁한 상처는 보는 이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히폴로테스는 아무 감흥 없는

무표정으로 그 흉터를 응시하다가 픽, 비웃기까지 할 뿐.

경멸도, 동정도, 죄책감이나 그 무엇도 내비치지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하지.”

히폴로테스가 그 말만을 남긴 채 뒤를 돌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티아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를 잡아 돌려세웠다. 짜증과

성가심. 신경질적인 남자의 새빨간 눈동자와 라티아의 새파란

눈동자가 정통으로 마주쳤다.

대충 라티아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이상하게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이 흐리멍덩해지더니 심장이 잠들기 전처럼

느리게 뛰었다.

“젠장……,”

무언가 말려들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힘 풀린 다리 탓에 무릎을 꿇은 히폴로테스는 두 팔로

몸을 힘겹게 지탱한 채로 제 앞에 버티고 선 라티아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아아, 재밌어라. 그런 표정도 다 보고.”

“무슨 짓을, 에즈라는……!”

이제는 입술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 히폴로테스는 그 어느

날의 자신의 실책을 떠올렸다. 하필이면 견디지 못할 만큼 잠이

몰려들었던 그 괴로운 날. 잠들지 않았더라면 소중한 이를 잃지

않았을, 그래서 삶의 매 순간마다 후회하게 만들었던 그 지독한

단하루를.

히 폴로테스가 무력하게 쓰러지자마자 헐레벌떡 뒤따라온

호위병들은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동안 라티아는 재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계획대로 에즈라의 침실로 향하자 마침

그녀를 어깨에 둘러멘 채 막 침실을 빠져나오는 호위병들과

마주쳤다.

“오늘만을 기다렸습니다.”

호위병으로 위장했던 살수들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흘렀다.

그것을 잠시 흡족하게 훑어보던 라티아는 곁에 멀거니 서 있는

셀리에게 날카롭게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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