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믿기지 않는 말.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도 어쩐지
불안감만 넘실거렸다. 에즈라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히폴로테스는 안심하라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 나가자.”
“진심이에요?”
“나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게 많아. 나는
황제가 되었거든. 처음에는 황제가 되었어도, 줄 수 있는 게
어마어마하게 많은데도 줄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는 네가
있잖아.”
여전히 내민 손으로 그녀는 참 어렵게도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찰나,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충만감에 휩싸였다.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혼자가 아니다. 내게는 이 남자가 남았고, 이 남자에게는
내가 스며들었다. 에즈라는 문득 이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내버리고 도망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울컥하더니 코끝이 찡해졌다. 그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손을 꽉 맞잡은 채로 침실을 나서고 복도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로질 렀다.
앞서가는 이의 굳건한 등과 지탱해 주는 손, 목덜미에서 잘게
흔들리는 머리칼까지. 익숙해 보이는 것이 가슴에 와닿는다.
복도에 내어진 여러 개의 창에서는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의
볕이 새어 들어왔다. 미로 같은 본궁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
인적이 드물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백색 계단을 내려갔다.
호위병들이 지키고 서 있지 않은 문 앞에 다다른 남자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조금 느리게
보였다. 눈앞에 드러난 광경이 시야를 꽉 채우고도 남자
에즈라는 얼굴을 환하게 빛냈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바람결에 몸을 부대끼는 들꽃들. 그
사이에는 산책을 위한 오솔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한편에는 황족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정원이 푸르름을 한껏
뽐냈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키가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퍽 깊어 보이는화였다.화의 잔잔한 수면은
노을빛 태양을 담은 채 잘게 일렁였다.
“흰색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에즈라는 들판 여기저기에 만개한 이름 모를 풀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답 대신 남자의 진득한 시선이 닿아 오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아닌가요? 저는 늘 풀꽃을 가까이 두시기에 그런 줄
알았어요.”
“맞아 좋아해.”
내가 네게 처음으로 선물한 것이거든.
그리 중얼거린 남자는 부끄러운지 손을 이끌었다. 괜스레
아픈 곳을 찌른 것만 같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히폴로테스가 가볍게 말아 쥔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고개 들고 좀 봐줘.”
퍼뜩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에즈라는 턱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화 가까이에 자리 잡은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그 탄탄한 가지 아래 매달려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네.
황홀한 노을빛 아래서 모든 건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은 너무도 상쾌했다.
“설마 나무를 심으신 거예요?”
“원래 있던거야. 그네만 매달았어.”
“그럼…… 저거는요?”
에즈라는 정원과 가까운 곳에 마련된 목재 그네를 가리켰다.
앉으면 앞뒤로 그네를 타듯 흔들릴 의자는 견고해 보였다.
“저건 그냥 만들어 봤어. 았아서화 구경하라고.”
“그, 도망갈까 봐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셨잖아요.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가슴이 벅찰 만큼 기쁘면서도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에 괜히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내뱉고 후회하며 애꿎은 입술을
괴롭히는데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성큼성큼화 쪽으로
나아갔다.
“그네 태워 줄게.”
“타는 법 아세요?”
“아니, 몰라.”
당당한 태도에 에즈라는 벙찐 얼굴을 했다. 이 자신감은
월까.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데 그는 아랑곳 않고 판판한 그네에
그녀를 앉혔다.
“조, 조금 무서운데요. 이거 잘못하다가 뒤로 넘어가거나
하면……"
“등만 밀어 줄게.”
에즈라가 배를 감싸며 웅얼거렸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째 태연자약한 것이 조금 의지가 되는 터라 에즈라는
그네를 매단 밧줄을 꽉 움켜쥐 었다.
“그럼 너무 멀어지지 않게 조금만 밀어 주세요.”
히폴로테스는 철석같이 자신을 믿고 등을 내어준 여자를
잠시 동안 눈에 담았다.
그네의 밧줄을 꼭 잡은 채 펼쳐진화를 구경하는 뒷모습에
문득 네가 나를 뒤로하고 아주 먼 곳으로 자유로이 날아간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나를 떠나가는 그날이, 내
마지막이면 되는 거니까.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등을 밀어 보았다. 대롱대롱 달려
있던 그네가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오누아, 작게 탄성을
내지르는 여자의 머리칼이 잔잔한 바람곁에 하릴없이
흔들렸다.
“조금만 더 밀어 주세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에 그는
내키지 않지만 그녀를 더욱 밀어 냈다.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자그만 등이 되돌아오기만을 바라며.
“조금만 더 밀어 주시면 안 돼요?”
“위험해.”
아이처럼 조르던 여자가 그 한마디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일 것이다. 손을 떼도 움직이는
그네를 지켜보던 히폴로테스는 그네 옆으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는데
바로 옆에서 에즈라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정말고마워요.”
히폴로테스는 행복은 쫓아가는 것도, 쟁취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아주 찰나인 것이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붙잡을 수 없어서 또 언제나 올까 기다리게
되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찰나.
이상한 일이다. 눈물은 아플 때만 나는 줄 알았는데, 이토록
충만한 순간에도 흘러내린다니 .
은은한 푸른빛 하늘 아래. 아직 태양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각이었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황궁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럼에도 보는 눈이 있을까, 여기저기 바쁘게 고개를
휘젓던 셀리는 하녀들이 머무는 별채에서 빠져나와 본궁
구석진 곳에 마련된 라티아의 침실 안으로 숨어들었다.
여전히 침침한 방 안의 풍경에 셀리는 역겨움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라티아의 방 안에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역한 냄새가 늘 가시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예. 믿을 수 없지만 그렇습니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고
어떤지 물어보았지만 점점 기력을 회복하기만 하십니다.”
평이한 보고에 창밖을 응시하던 라티아는 난처한 얼굴로
눈가를 마구 문질렀다. 쉽지 않은 상황에 계획은 점점 꼬여만
갔고 그만큼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안달복달하다 보니
궁지에 몰린 기분이 들었다.
라티아는 아브타크의 도움을 받아 기이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들을 수소문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와스터에서는
그런 이들을 악마에게 영혼을 판 앞잡이라며 두려워했고,
핍박하며 배척했기에 그들은 제국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았으니까. 가끔 돈 많은 상인들과 귀족들의 필요를 채워 주며
돈을 받는 것이 와스터에서의 그들의 입지였다.
그 꺼림칙한 것들과 말을 섞어야 한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에즈라의 죽음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피를 말려 죽이는 저주, 살이
썩어 들어가는 저주, 온몸에서 악취를 풍기고 머리가 빠지는
저주, 뼈가 녹아내린다는 저주나 어린아이처럼 정신을
퇴행시 킨다는 저주 등.
수많은 저주를 걸었음에도 에즈라는 멀쩡했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열 명이 넘는 이들을 이용해 이런저런 술수를
썼으나 무력해진 이들이 내놓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통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아마 그 누구의 저주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네 무력함을 포장하지 마!’
그리 윽박지르며 머리칼을 쥐어뜯을 때마다 음험하고 뜻
모를 시꺼먼 눈동자들이 라티아에게서 무언가를 뺏어 갔다.
라티아가 그들을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기운이 빠지고 몸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안 그래도 다들 에즈라에게는 술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덕분에 티텐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지.
에즈라는 그 어떤 기이한 능력에도 구애받지 않아. 능력을 가진
이들이 말하기를 그것 또한 에즈라의 능력이라더라.”
셀리는 그냥 그렇구나, 한 귀로 흘려 넘기며 숙인 고개를
조금 더 조아리기만 했다. 그런 비밀 따위는 저와 상관없는 것
아닌가. 그것보다 제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이 있었다.
“명령하신 대로 벌써 수일째 식사에 약을 타고 있습니다.
소량씩이라 아직까지 뚜렷한 증상은 없지만 머지않아 이상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는 의사가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테지만…… 약을 전한 저 역시도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라티아는 공손히 예를 갖춘 셀리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내뱉었다.
“그 전에 아버지가 손을 쓸 것이다. 그리고 태아는 예민해서
소량이라도 이미 중독되어 있을 거야. 에즈라, 그 여자만모르는
거지. 죽은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있다가 사실을 마주하고
자지러지는 꼴을 직접 볼 수 없다니. 아쉬워.”
그의 사랑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여자. 내 자리를 빼앗은
파렴치한 여자. 에즈라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괴로움 끝에서 모든 절망을 떠안고 삶을
비관하다가 죽어 버리도록.
그것이야말로 에즈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로이니까.
그것이 아침나절의 일로, 셀리는 완전히 미쳐 버린 추악한
여자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에즈라의 침실을 향했다. 넓고
호화로운 복도를 바삐 가로지르는데 마침 막 진찰을 끝낸
의사가 침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좀 늦었군.”
“죄송합니다. 혹시 손이 필요하셨나요?”
셀리가 이마에 맺힌 땀을 급히 훔쳐 내며 면목 없다는 얼굴을
하자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의사는 조금 엄한 어투로 물었다.
“아니야. 그보다 황비님께 약을 전해 드리는 건 잊지 않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