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끝까지 너를 이용한 내 치졸함을 알게 되었다면……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고작 이런 반응일 리 없잖아.
“원데?”
술렁이는 마음을 힘겹게 가다듬으며 물었으나 에즈라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결국 못 참고 다시금 입을 떼려던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네요. 그네를 탔던 것 같아요. 되게 커다란 나무 아래,
그네가 매달려 있었는데요. 그곳에 앉았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타는 법은 몰랐나 봐요. 그냥, 아주 잠깐 았아
있었거든요.”
한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깊이 안도하는 것도 잠시뿐. 그는
불편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돌탑 안에 갇혀 살아왔을 에즈라가
어떻게 그네를 탈 수 있었던 걸까. 실제로 티텐의화와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기는 했다만.
그 굵직한 나뭇가지 아래 매달려 있던 판판한 그네. 성인이
타기에는 너무 작던 그것은 아마 공주들이 어릴 적 타고 놀았던
것이 분명했다. 다른 공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에즈라는
어떻게……
“그것 말고는? 기억나는 거 없어?”
“네. 아직은요.”
잠기운이 물씬 어린 목소리로 대꾸한 에즈라는 곧 일정한
숨을 내쉬며 곯아떨어졌다. 조심스레 머리를 들어 올려
팔베개를 해 준 히폴로테스는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에즈라를
보고 또 보았다.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솜털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네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그 기억 아래, 설움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기에. 그는 작은, 그러나 그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아무 이득 없는 대거리를 포기한 이후,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의사가 드디어 침실을 찾은 것이다.
저만큼이나 반가운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이던 의사는
잘되었다며 몇 번이고 손등을 토닥여 주었더랬다.
허나 잘되었다 안도하는 것도 잠시뿐. 의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아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진찰을 내렸다. 아득한
충격에 허덕이던 에즈라는 정신을 차리고 매달리듯 방법을
강구했으나 그는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으며 안정을 취하라는
당부를 되풀이했다.
‘아기에게는 가장 위험한 때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웥 해야하나요?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심리적인 이유가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제부터라도
심신을 편안히 하시고 최대한 긴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는 게
최선입니다. 아, 식사도 거르지 마세요.’
의사는 누구에게나 위험한 시기이니 크게 마음 쓰지 말라
달랬지만, 딱히 위로가 되진 않았다. 여지껏 흩몸이 아님에도
몸을 돌보지 않았을뿐더러 함부로 혹사시켰다. 엄마가
되어서는 아기를 방치하고,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를 위협한 것은, 이 모든 건 다 제 탓인 것이다.
에즈라는 젖은 눈가를 가리며 남몰래 흐느꼈다. 이 아이에게
죄가 있다면, 저 같은 무능한 사람을 엄마로 둔 죄일 뿐일 텐데.
하필이면 왜 내 아이로 세상에 내려온 걸까. 너무도 부족한 내가
아닌, 더 건강하고 유능하며 잘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의 배
속에 자리잡았더라면……
“에즈라, 의사가 다녀갔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어때?”
하루 온종일 침상 구석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낸 에즈라는
들려오는 인기척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저벅저벅 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왜 궁금해하세요? 아이 따위, 상관없다고 하셨잖아요.”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뾰족하게 날이 선 말투는 안 그런 척해도 그를 탓하고
있었다. 자신의 슬픔은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는 남자에게 말이
곱게 나갈 리 만무했지만 이제는 그와 싸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위험하대요.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대요.”
무엇보다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슬퍼하고,
걱정하며 아프지 말라 하늘에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프게 만든
주제에 미안하다고 비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히폴로테스는 살짝 부른 배를 쓰다듬는 에즈라를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늘진 얼굴로부터 그녀의 절망과 자책을 읽을
수 있었다. 네 탓이 아니라고. 모든 건 욕심을 부려 너를 몰아간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두려웠다.
진정 나를 원망하며 평생 돌아봐 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
이보다 더 나를 미워하는 에즈라를 견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나 대신 차라리 너를 미워했으면 좋겠어.
“원래 의사들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게 일이야.
과장된 말에 미리 걱정하지 마. 오늘은 식사도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었다며. 이제부터라도 의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몸조리
잘 하면 큰 문제 없을 거야.”
“궁금한 게 있어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어깨를 으쓱이던 그때, 안색이 창백한
에즈라는 눈을 들어 올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선명한 녹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다.
“시프나드는 저보고 천애고아라고 했어요. 고아가 황비가 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혹시 고아가 아닌 건가요? 그렇다면 왜 제
어머니 아버지는 저를 찾지 않으시는 건가요.”
시프나드. 에즈라가 발음하는 이름에 신경이 곤두섰다. 꽤나
그럴듯한 추리를 내놓는 에즈라가 같잖게 느껴져서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저는 당신의 부인도, 제국의 황비도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 아이의 아버지 역시 당신이
아닌……!”
“그만.”
격앙된 목소리가 뚝 끊겼다. 가녀린 목덜미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채였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눈물이
눈꼬리에 맺혀 있다가 기어코 흘러내린다.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해 봐.”
“당신은 이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야. 그, 그럴 리가 없어.”
“듣고 싶지 않다니까.”
끝내 내뱉은 매정한 말에 그는 쓰라린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습관처럼 고개를 수그린 남자는 아픔을 감추려는 듯 뒷목을
쓸다가 곧 담담한 얼굴로 운을 뗐다.
“네 말이 맞아. 너는 고아야. 네 어머니 아버지는 죽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는 네가 고아여도, 덜떨어진
백치여도, 추한 용모를 가졌더라도. 설사 사람을 죽인 저주받은
마녀라 해도…… 나는 너를 손가락질할 수 없어. 왜냐면 황제인
나도 고아거든.”
상상도 못 했던 사실에 에즈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곧
의심 서린 눈빛을 하는 에즈라에게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와스터 제국에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 있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황자가 되어야 한다는 아주 지독한 전통이.
덕분에 형제들은 황제의 자리를 두고 피로 물든 진흙탕 싸움을
벌여야 해. 죽이지 않으면 죽임당할 테니 살기 위해서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무슨, 그런……"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힘으로 자신을 증명해 낸다는 건 어찌
보면 공평한 방법이야. 덕분에 측실의 소생인 나 같은 것도
황제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럼 당신도 형제를 모두 죽였어요?”
“그래. 모두 내 손으로 베었어. 아버지까지도.”
부러 무덤덤한 척 고백했으나 에즈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일
뿐, 끝내 경멸을 띠지 않았다. 기함하며 피하려 들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에즈라는 그를 아주 오래도록,
지그시 응시하기만 했다.
“많이 괴로웠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지금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결국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비꼈다.
“글쎄, 아버지를 벨 때는 딱히 괴롭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머니는요?”
묻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건만. 하늘은 악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 사람도 내가 죽였어.”
오래전 일을 회상하는 남자는 연기하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잊고 방치해 두었지만, 황비는 그렇지
않았거든. 한때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던 어머니를
눈엣가시처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 오로지 나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어머니를 가장 괴롭게 만들 방법이야 뻔하지
않겠어.”
“……원데요?”
에즈라는 그가 더 이상 상처받기라도 할까 봐 조금 주저했다.
“나를 죽여 버리는 거지. 덕분에 다섯 살 이래로 매일 밤을
지새웠어. 방심하고 까무룩 잠이 들기라도 하면 그날 밤이 내
생에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
그는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했다. 말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던
그는 그날의 어린아이가 되어 조금 울먹이고 말았다. 자신을
자책하며 절망하고 또 울부짖었을, 그날의 어린아이처럼.
“그런데 딱 하루, 정말 그날 밤만큼은 잠을 이기지 못하겠는
거야. 자꾸 정신이 흐려지고, 몸에 힘은 쭉쭉 빠지고. 끝까지
악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아주 잠깐이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멍청한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몰랐어. 상상도 못 했어. 나를
잠재운 어머니가 그날 밤, 나와 거처를 바꾸었다는 걸.”
어쩐지 가만히 듣고 있기가 힘겨워졌다. 물어본 것이 후회될
만큼이나. 이 남자가우는 걸 보는 게 버거웠다.
“나 대신 불에 타 죽었어.”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고개 숙인 남자는 천천히 침상맡에
주저앉았다. 가느다란 에즈라의 손등 위로 남자의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부모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가진 게 없고,
힘이 없는 그 바보 같은 여자는 내게 줄 수 있는 게 자신의
목숨밖에는 없겠다 생각했나 봐. 나를, 나를 버리고 지옥 같은
삶 속에 혼자 남겨 두고……"
그래,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불안에 떨며 절박하게 단도를
부여잡던 아이를 단 하루라도 마음 놓고 잠들게 하고 싶었던
거겠지. 남는 이의 마음은 모르는 채, 그렇게 훌훌 날아가 버린
거야.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닌데. 바보처럼 그런 것도 모르고.”
얼굴에 번진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각자의 얼굴이 각자의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우는 건 그의 일일 텐데, 왜 나는 그와 함께 울고
있는 건가.
이런 게 한낱 동정일 수 있는 걸까.
“웃지 말라니까 그렇게 우는 거예요?”
이제 와서 울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모든 치부를 제
손으로 들춰내 보였다. 사실은 그녀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울지 말아요. 당신이 울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에즈라가 겹쳐진 손을 마주 잡아 준 그 순간, 따뜻한 손이
젖은 뺨에 와 닿았다. 볼품없이 일그러졌을 얼굴을 들어 올린
여자는 조금은 괴로운 얼굴로, 하지만 분명 후련한 마음으로
고백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요.”
잠시 뻣뻣하게 굳어 있던 히폴로테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픈
표정으로 제 뺨을 훔쳐 주었다. 울지 마, 왜 울어. 작게 입
모양으로 속삭이는 것도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조금 진정된 모습의 히폴로테스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어 왔다.
“나갈래?”
“……네?”
“오늘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거든. 드디어 다
완성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