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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81화 (81/113)

81화

“아브타크 쪽의 움직임이 정말 심상치 않습니다. 혹시 오늘

독대하시며 어떤 말씀을 나누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네 예상대로야. 시프나드를 황제로 만들겠다던데. 반란을

위한 명분을 만들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더군.”

“명분이라니……,”

히폴로테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고뇌하는 카코스를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제 생각에 빠져 한참 골몰하던 카코스가 신음을

홀리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미 그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어디로 향했는지는 불 보듯 뻔했기에 그는 낮은 한숨만 폭 내쉴

뿐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명분을 만들겠다는 건, 히폴로테스 님을 자극할 만한 일을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 아닌가. 카코스는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아브타크는 황비님께 손을 뻗어 일을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한발 빨리 황비님을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한다.

빠릿하게 결정을 내린 카코스는 히폴로테스가 향한 쪽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황비님이 없을 때보다야

진정되긴 했다만 아직까지 그는 정상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여유가 없으신 것 같으니…… 다른 이들과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의논해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카코스는 뒤를 돌아

멀어져 갔다.

히폴로테스가 넋 나간 사람처럼 복도를 달려 나가자 줄 지어

지나가던 하녀들은 쭈뼛거리며 한편으로 비켜섰다. 시선을

내리깐 채로 황제를 흘깃거리던 그녀들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남몰래 입술을 비죽였다.

저리 유별나게 굴 것까지는 없는데. 요즘엔 내보내 달라는

아우성도 꽤 잦아들었고 식사도 거르지 않는다 했다. 한결

안정된 상황이건만. 대체 뭐가 그리 애가 탄다고 득달같이

달려가 뭐 마려운 개마냥 주변을 지키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딱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나 웃전의 일을 이해하는 건

그들이 할 일이 아니었다. 히폴로테스가 충분히 멀어지자

하녀들은 걸음을 옮겨 고요한 복도를 벗어 났다.

보는 눈이 있든 말든, 모퉁이를 돌아 복도의 맨 끝 방 앞에

멈춰 선 히폴로테스는 쿵쾅거리는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그가 호위병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양쪽으로 문을 당겨 열었다.

“에즈라.”

넓고 쾌적한 침실 안, 아직 해가 저물지는 않았지만 두터운

커튼을 쳐 놓은 터라 침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벽 한편에서

타오르는 램프의 불빛이 어 렴풋하게 방 안을 비추었다.

그 모든 것을 겁먹은 눈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던 남자는 곧

침상 쪽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잠들어 있다면 깨우고 싶지

않았고, 깨어 있다면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붉은 발을 거두자 침상 가쪽에 몸을 웅크린 여자가 보였다.

누워 뒹굴고도 남을 만큼 널따란 침상인데 굳이 귀퉁이에서

잠을 청하는 이유는 뭘까.

제 곁을 불편해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문득 깨닫게 될

때마다 닿지 못하는 것을 좇는 사람처럼 불안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잠시 한눈판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까 보느

“에즈라, 자?”

들릴 만큼 소리 내어 속삭여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빛을 가두는 커튼을 잠시 응시한 그는 시선을 옮겨 가녀린 등을

살폈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잠시 의심 어린 표정으로 눈살을 좁히던 그는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숨결에 살짝 안도했다. 운 좋게도 오늘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은근슬쩍 그녀의 곁을 파고들려는 찰나, 미약한 기척을

알아채곤 그대로 몸을 굳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거 내려놔.”

아늑했던 침실 안의 온도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히폴로테스는 유리 조각을 손안에 쥔 채 달달 떨고 있는 유약한

여자를 마주했다. 딱딱한 명령에도 여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 뿐,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아득해지는 공포를 들키지 않으려 차분한 얼굴을 꾸며 내자

그녀는 그를 시험하듯 더욱 자신을 몰아갔다. 결국 날카로운

조각을 목덜미에 바짝 가져다 대더니 대놓고 그를 겁박하기

시작했다.

“의사를 불러줘요.”

“그만해. 이럴수록 아프고 피곤해지는 건 너잖아.”

거짓말.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약점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대놓고 그에게 날붙이를 휘두를 때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칠게 제압했으면서, 제 손목 한 번 그은 것 가지고 온갖

난리란 난리는 다 떨어 댔으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에즈라는 온갖 것들로 제 몸을

혹사시키기 시작했다. 덕분에 뾰족한 물건들과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물건들은 싸그리 모아 버렸으나 에즈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둔탁한 것으로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내리쳐 멍을 남기거나

여린 살이 터지도록 만들었다.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나가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아이가 건강한지 그것만 알고 싶어서 그런 건데.”

말은 이어질수록 힘이 빠져 웅얼거림으로 끝을 맺었다.

“이 아이 아버지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그야 나한테는 네가 더 중요하니까.”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단 말이야.

에즈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경멸 어린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진정 소중하다 여기는 이를 이렇게 짐승처럼 가둬

두고 속박하는 게 정상인가. 지극히도 이기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낀 에즈라가 목을 그으려던 그때였다.

에즈라의 움직임을 귀신같이 알아챈 히폴로테스는 재빠른

몸짓으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뺏기지 않으려 잡힌 팔을

휘둘러 보았지만 손목을 저릴 정도로 틀어쥔 억센 손을 떨궈 낼

수 없었다.

무의미한 반항을 그만둔 에즈라가 주먹을 펴자 각진 유리

조각이 침상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아마도 다른 가구들 아래

깔려 있던 것이겠지.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들을 족칠 생각을

하던 그는 조각을 등 뒤로 휙 던져 버렸다.

“이런 짓, 어떻게 하면 그만둘래.”

“……들어주실 건가요?”

“들어 보고.”

“아기요. 아기의 상태를 알고 싶어요.”

에즈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눈을 빛냈다.

내보내 달라고 우길 줄 알았는데, 반쯤은 포기했는지 그녀는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때맞춰 의사를 부르면 되겠어?”

지금은 그것이라도 감지덕지였다. 에즈라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히폴로테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보면 이리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

에즈라를 가둬 둘 수도 없는 일이고, 출산을 위해서라도 의사의

진찰은 필요한 것이 니까.

“그, 오늘도…… 하실 건가요?”

샅샅이 훑어 내리는 집요한 눈길에 말을 꺼내 놓고 후회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애꿎은

손톱만 괴롭히던 그녀는 침묵을 긍정으로 여기고 흐트러진

침의를 벗기 시작했다.

사브작, 천이 스치는 소리 뒤로 에즈라의 향기가 짙어진다.

기다란 목덜미부터 그 아래로 빼곡히 새겨진 흔적들이

드러났다. 민망한 듯 조그만 손으로 그곳을 더듬다가 파르르

떨리는 눈을 질끈 감는다.

나른한 눈동자로 에즈라가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바라보던

히폴로테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좁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즈라의 손등 위로 손을 겹친 채 조각에 긁힌 부분을 엄지로

훑다가 여린 턱을 들어 올려 입술을 내렸다.

가볍고 조심스럽던 입맞춤도 잠시. 코가 부딪힐 만큼 고개를

틀어 그가 밀어닥치자 몸을 허덕이기 무섭게 탄탄한 팔이

온몸을 옭아맸다. 기운이 빠져 숨을 몰아쉬자 잠시 입술을 뗀

채로 그는 시간을 주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여자의

페리도트빛 눈동자가 몽롱하다.

일순, 심음이 귓가를 울릴 만큼 거칠게 뛰어 댔다. 흥분에

가쁜 숨을 내쉬며 잡아먹듯 입술을 겹쳤다. 저만큼이나

열렬하게 반응하는 입술이 기꺼워 그는 여자의 긴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휘어잡고 더욱 몰아세웠다.

으0으하

흐^

살짝 고개를 틀며 가슴팍을 밀어 낸다. 에즈라는 톡톡, 그를

두드리며 진정시키려 굴었지만 뜻대로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쉬이. 괜찮아.”

에즈라는 은근슬쩍 능구렁이처럼 파고드는 남자를 아연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저와 달리 그는

너무도 여유로웠고 능숙했다.

살짝 젖어 든 은색 머리칼이 자꾸 앞으로 내려와 그의 눈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귀찮은 듯 미간을 좁히면서도 제 허리를

끌어당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에즈라는 여유를

잃은 남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오, 오늘은 제발, 천천히요.”

“……언제는 안그런적이 있던가.”

양심을 내다 버린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픽, 웃음을

홀렸다. 땀 맺힌 이마를 훔쳐 주는 가느다란 손이 익숙해서

울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삼켜 냈다.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까는 것도,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해서는 도톰해진 입술을 우물거리는 것까지. 고개를 내려

입술로 다가가면 질끈 눈을 감는다. 여자의 존재 자체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는 코앞에서 눈을 감은 채 바들거리는 눈꺼풀을 엄지로

쓸어 주었다. 미리 미안했다. 오늘도 그녀가 원하는 천천히는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세 차례의 절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후, 에즈라는

초주검 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그로서는 머리가 돌아 버릴 만큼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지쳐 나가떨어진 에즈라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이 솔솔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금 전까지 울며 매달리다가 목에 팔을

두르던 에즈라를 떠올리자 또다시 괴로울 만큼 피가 몰렸다.

선잠이 든 에즈라는 보드라운 침상 자락에 뺨을 부비며

안정을 찾고 있었다. 저를 등진 것이 불쾌해 그는 불쑥 팔을

뻗어 에즈라를 끌어안았다.

답답해요.”

“너한테 야한 냄새가 나.”

불퉁한 목소리로 얼렁뚱땅 말을 돌린다. 굳은살이 박여

우둘투둘한 손바닥이 진득하게 등을 타고 내려가 허리를

지분거렸다.

그렇게 하고도 만족하지 못한 건가. 질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으나 그는 더욱 자신의 품속에 밀어 넣었다. 돌덩이

같은 가슴팍에 코끝이 뭉개졌다. 불편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으나 등을 토닥일 뿐,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끝까지 벗어나려 반항했겠지만 오늘은 그 역시

한발 물러나 주지 않았나. 이렇게 한 번씩 나아가다 보면 멀지

않은 날 밖으로 내보내 줄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보다 너무

곤해서 실랑이를 벌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축 처진 에즈라가 그에게 뺨을 부비며 일정한 숨을 내뱉자

히폴로테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에즈라를 숨 막힐 듯 껴안고 침상을 구르고 싶었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감정을 억눌렀다.

품 안의 에즈라에게 이 심장 소리가 들릴 것이다. 의미가

분명한 반응이 부끄러웠지만 이리 마주 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나치게 좋았다. 에즈라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는데 그녀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저. 기억난 거 있어요.”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두터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머리 위로 찬물을 부은 듯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더니 이내 손끝이 다 떨려 왔다. 설마…… 티텐에서의

과거를 기억해 낸 건가. 나라를 멸망시키고 친족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트린, 그 절망적인 기억을 떠올린 거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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