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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혼자 남아서-80화 (80/113)

80화

한편, 아브타크가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는 소문은 귀족들

사이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마치 소란스러워지기를 바랐다는

듯 주변의 의심을 한껏 떠안은 아브타크는 유유히 알현실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가 알현실 앞에 다다르자 각진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열댓

명의 호위병들은 무뚝뚝한 손길로 문을 열었다. 드러난 알현실

내부는 광활했고. 매일 쓸고 닦아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에는

냉기가 흘렀다.

여느 때처럼 수많은 귀족들과 함께 비켜서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든 아브타크는 저 멀리 열댓 개의 계단과

그 위에 자리한 황금 의자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피처럼 붉은 융단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직 황제만이 밟을

수 있는 붉은 융단. 발끝이라도 닿을까 조심조심 비켜서 한구석을

차지해야 했던 나날들. 아직도 고작 발끝이 닿는 정도라니. 품은

야욕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갈증이 난다.

“생각보다 늦었군.”

“데모스 가문의 아브타크.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는데 등지고 있던 문밖에서 호위병이

일러 왔다. 놀라 가쪽으로 비켜서기 무섭게 히폴로테스는 붉은

융단 위를 시원한 보폭으로 가로질렀다.

단정한 은발을 한 손으로 대강 털어 보인 그는 먼발치에 서

있는 아브타크를 발견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일찌감치 온 김에 융단도 좀 밟아 보고, 계단도 올라보고,

은근슬쩍 황금 의자에 엉덩이라도 찔끔 붙여 볼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은근히 고지식한 면이 있어.”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어찌 황제의 권위에 발을 들일 수

있겠습니까. 상상만으로도 두렵습니다.”

주절주절 입바른 소리를 지껄이는 아브타크를 뒤로한

히폴로테스는 황금 의자에 느른히 몸을 기대었다. 어디 한번 계속

짖어 보라는 듯 다리를 꼰 그는 벌써부터 지루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였다.

“황비님을 찾기 위해 슬럼을 여기저기 들쑤시는 것도 모자라

벌컥 뒤집어 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누구에게?”

습관처럼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칼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히폴로테스는 짜증스럽게 그것을 쓸어 넘겼다.

“발 없는 소문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법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나하나 잡아도 족칠 수도 없고 말이야.”

히폴로테스는 한탄하듯 과장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죽기는커녕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

아브타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낭비다. 저 늙수그레한 뱀이 또 어떤

술수를 부리든 말든 흥미가 일지 않았다. 히폴로테스는 훤히 뚫린

창밖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전의 볕과 부유하는 먼지를

구경했다.

저 붉은 커튼은 너무 촌스럽지 않은가. 미색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황비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는 것을요.”

“그래. 시프나드와 에즈라가 함께 있을 때부터 당신이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어.”

“……시프나드의 정체가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

시프나드, 그 이름 하나에 히폴로테스의 고개가 아브타크를

향했다. 톡톡, 시종일관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굳고

살짝 올라간 입매를 일자로 다물었다. 이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한

히폴로테스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반역을 공모하고 있는 건가?”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지요.”

“황실의 피가 섞인 놈을 굳이 옆구리에 끼고 있으니까. 근데

그걸 제대로 된 황족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어. 천한 피가

너무 많이 섞여서 그 정도면 그냥 길거리 촌부 같거든.”

“전전 대 황제께서 아끼시던 첩의 아들입니다. 그리 멀지도

않지요.”

“어쨌든. 늙은이가 무척 힘이 좋았던 모양이야. 그렇게 늦게

자식도 보고. 그런데 아꼈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어. 조부께서는

더럽게 노는 것을 좋아하셔서 측실을 스무 명도 넘게 두셨거든.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던데. 덕분에 아버지께서

황제가 되기 위해 퍽 애를 많이 쓰셔야 했지.”

얼굴도 모른 채 하직한 조부를 대놓고 조롱하는 히폴로테스는

마치 철 덜든 소년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을 요점은. 시프나드처럼 살아남기 위해 숨어

버린 황족이 꽤 있을 거라는 말이야.”

“정체를 밝히고 현 황권에 대적하겠다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보다는 헛된 희망으로 보는 게 맞겠지.”

황권에 대적하는 용기라니.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이의 도발은 우습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시프나드의 목적은

황권이 아니니까. 분명 제 곁에 있는 에즈라겠지.

바람 불면 쏠려 나갈 가벼운 감정을 품은 채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에 발을 담그다니. 어찌 보면 불쌍한 인간이기도 했다.

“가진 패는 그게 다인가? 그렇다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은데.

이럴 시간에 나가서 다른 수를 강구해 보는 게 좋겠어.”

히폴로테스는 예의 그렇듯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그가 턱 끝으로 알현실 문을 가리키자 아브타크의 눈가가 분노로

얼룩졌다.

“겨우 이것일 리가요.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오를 마땅한 이와 다수의 마음을 돌릴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대신 이 자리에 앉히려는 놈은 알겠고. 다른 고위 귀족들을

내게서 뒤돌게 할 명분을 만들겠다?”

“그렇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거치적거리는 아브타크를 이곳에서 베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것이야말로 반역의 명분이 된다. 황궁 병력을

총동원해 아브타크를 먼저 친다 해도 그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얼마나 될지 모르기에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기는 해도 생각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아닌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 점점

재밌게 느껴졌다.

“나를 뭘로도발할 생각이지?”

아브타크는 눈을 똑바로 치켜뜬 채 시선을 피하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보이기까지

하자 히폴로테스는 일어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히폴로테스는 아브타크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위압감을 내뿜는 남자는 나른한 얼굴로 아브타크를 깔아

보았다.

“황비님께서는 공식 석상에 아예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일순 태연자약하던 히폴로테스가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시뻘건 동공을 제대로 마주하자 아브타크는 본능적으로

움찔하고 말았다. 허나 금세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매를 늘어뜨렸다.

“그 문제는 네가 나설 일이 아닌데.”

“어찌 그렇게 쉽게 눈길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황손을 품으신

황비님의 안위는 비단 황실만의 일이 아닌 것을요.”

과장된 어조로 안타까움을 연기하는 모습은 역겹기 짝이

없었다. 이쯤 되면 물러날 법도 한데 아브타크는 정신이 나간

것인지 꿋꿋이 앞을 버티고 섰다.

“귀족들의 심정을 대변하자면. 큰 자리서나마 황비님을 뵙고

싶습니다.”

히폴로테스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브타크는 스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주 오래오래.”

오래오래. 강조하는 어조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짜증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는 새끼는 인내심을

시험하려 굴었다.

“황제께서 동요하시는 일이 에즈라 님과 관련된 일밖에 더

있겠습니까.”

완벽히 선을 넘은 말에 그는 곧장 허리에 찬 검을 빼 들었다.

히폴로테스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지 못할 만큼이나 재빨랐고 눈

깜짝할 새 목에 닿아 오는 날붙이를 느낀 아브타크는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건드린 것인가. 문득 황제가 앞뒤 재지 않고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칠지도 모른다 생각이 들자 온몸에 식은땀이 맺혔다.

게다가 여기에는 자신을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바짝 긴장한 꼴을 보며 히폴로테스는

해맑게 비웃었다.

“남 걱정 하기 전에 너야말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지.”

목덜미에 닿았던 칼끝이 어깨를 타고 내려오더니 팔뚝을 살짝

스쳤다. 읏, 순간적인 서늘함 뒤로 쓰라린 고통이 밀려들어

인상을 찌푸렸으나 칼끝은 자비 없이 가슴팍 쪽으로 옮겨 왔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듯 아슬아슬하고 근질근질한 촉감에

소름이 돋고 머리칼이 삐쭉 섰다.

“이렇게 날벌레처럼 귀찮게 굴면 건강할 때 죽지 않겠어?”

“갑자기 왜이러십니까.”

이윽고 명치끝에 닿은 칼끝은 아주 살짝 피부를 갈랐다. 어찌나

날이 섰는지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물컹한 살점을 파고든다.

아픔도 느끼지 못할 만큼이나 긴장해 마른침만 꼴딱 삼키자

히폴로테스는 이를 악문 채로 일갈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쓰겠나. 그 더러운 입에 담지도 말라는

소리잖아.”

“윽

“한 번만 더 네 입술 밖으로 황비의 이름이 나온다면 다음에는

주저 없이 베겠다. 네가 그토록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권력? 황권?

아니면 명예인가. 어쨌든 그런 것 따위 황비에 비하면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미치광이처럼 고개 숙여 키득거리던 남자는 곧 냉혹한 얼굴을

했다. 능숙하게 칼을 거둔 히폴로테스는 검집에 칼을 넣으며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네가 갖고 싶어 애타게 발 동동 굴리는 거 말이야……오 사실

아무 의미도 없어.”

발에 치이는 돌멩이보다 못하지.

자존심을 박박 긁어내리는 마지막 말에 아브타크는 두 눈을

부릅떴다. 손을 팔랑인 후 천연덕스럽게 멀어져 가는

히폴로테스를 쏘아보던 아브타크는 차마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과연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서도 저리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태생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오만방자한 히폴로테스의 콧대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리누르고 말 것이라 다짐하며 숨을 골랐다.

그제야 베인 팔뚝과 쑤셔진 명치에서 끔찍한 고통이 일었다.

피가 흐르는 상흔을 차마 틀어막지도 못한 아브타크는

히폴로테스가 사라져 버린 뒷문을 보며 끓어오르는 수치심을

삼켰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히폴로테스는 슬럼가의

상황까지 고려하지는 못하고 있는 데다가 정신을 어디다 둔

것인지 살아남은 티텐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방목하고

있었으니까. 무참하게 짓밟힌 민족이야말로 노여움과 원망에

가장 잘 휘둘린다. 그것뿐인가, 나라를 멸망시킨 공주에 대한

분노는 소리 없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이대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일을 벌여 나가면

승기는 제게 기울 것이 분명했다.

혼자뿐인 텅 빈 알현실에는 그를 추앙할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아브타크는 홀린 듯 황금 의자만 올려다보았다.

아브타크와의 하등 쓸모없는 독대를 끝낸 후, 에즈라에게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카코스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앞을

가로막은 그를 보며 잔뜩 미간을 찌푸렸으나 쭈뼛 눈치를

보면서도 물러나지 않는다.

“오늘 다들 피곤하게 왜 이러는 건지.”

“다들이라뇨, 히폴로테스 님! 아브타크 따위와 같은 취급을

하시다니

“지금 말대답해?”

“아닙니다.”

성가심을 펄펄 내뿜던 히폴로테스는 미려한 눈가를 두어 번

문지르며 성의 없이 물었다.

“할말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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