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에즈라가 눈을 뜬 것은 기민해진
감각 덕이었다. 문 앞을 떡하니 지키던 호위병들이 물러나고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틈 사이로 밀려들어 오는 그림자와 남자.
수많은 밤을 적막한 곳에서 갇혀 있는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이는
히폴로테스 한 사람뿐이었다.
“깨어 있었어?”
곧바로 몸을 일으키자 그는 다가오며 옷을 가볍게 끌렀다.
탄탄한 육체를 감싸고 있던 옷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무섭게 그는 침상의 발을 걷고 모습을 드러냈다. 여린 어깨를
감싼 손이 선명한 쇄골을 지분거리다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목을 감싸는 손바닥은 더없이 뜨겁고 농밀했다.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으나 거칠한 손끝이 턱을 잡아 올렸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정욕이
그득하다. 턱을 빼내려 힘을 주어도 억센 손아귀는 놓아 주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겹쳐 온 남자가 그 끝을 가볍게
비볐지만 에즈라는 굳은 채로 텅 빈 눈만 껌뻑였다.
"입열어."
“언제까지 이럴거예요.”
“네가 나를 사랑해줄때까지.”
하. 헛웃음이 비집고 나오자 남자는 입술로 그것을 막았다.
강제적으로 열린 입술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든 그가 어깨를 밀어
넘기더니 몸 위를 점령했다. 곧 들이닥칠 일들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바르작거렸을 뿐이건만. 금세 흥분한 것인지 여유를
잃은 남자는 여느 때처럼 성급하게 옷을 벗겨 냈다.
“ 아!”
귓불 아래서 목덜미로 타고 내려간 입술이 진득한 흔적을
남긴다.
또다. 아끼는 척, 사랑하는 척.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남자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숨이 가빠졌다. 그러니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말아 쥐었던 손을 들어 뺨을 내리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퍽 소리가 날 만큼 세찬 손찌검에 히폴로테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뺨과 찌릿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히폴로테스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큭큭거렸다.
“질리지도 않나 보느 이런다고 내가 봐준 적 있던가.”
“소름 끼치니까웃지 말아요……오 진심 아닌 거 다 아니까.”
고였던 눈물이 귓가를 타고 흐르자 히폴로테스의 얼굴은
단번에 식어 버렸다. 무표정해진 남자는 곧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 왔다.
“그럼 울까? 네가 그걸 원하면 그럴게. 매일 울게.”
“아뇨. 내가 원하는 건 나를 놔주는 거예요. 아니면 이
방에서만이라도 나가게 해 달란 말이에요.”
울라고 한 적 없는데. 웃음 대신 우는 걸 택했는지 형형한
눈동자에 눈물이 비쳤다.
“떠날 거잖아.”
“도망칠 거잖아.”
“……아니야.”
“거짓말. 도망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놔줄수 있겠어.”
얼굴을 찌푸린 에즈라는 그를 있는 힘껏 밀어 낸 후 침상을
벗어났다. 평소 같으면 놓아 주지 않았을 남자가 눈물만 뚝뚝
흘리자 되레 당황한 쪽은 에즈라였다.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던
시선이 수수한 들꽃을 품은화병에 닿았다.
그것에 손을 뻗자 아차 싶었는지 히폴로테스는 그녀에게
달려왔지만 에즈라가 한발 더 빨랐다. 잽싸게화병을 낚아채
사정없이 내던지자 귓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바닥에 흩어진 크고 작은 조각들을 둘러보던 히폴로테스는
에즈라의 움직임을 막으려는 듯 손을 뻗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히폴로테스로부터 뒷걸음질 치기만 했다.
한기가 흐르는 벽 끝까지 달아나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주변을 살피는 동안에도 남자는 흩어진 조각들 위로
서슴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퍼걱퍼걱, 날 선 유리 조각이
발바닥을 파고드는 소리가 섬뜩하다. 피 칠갑을 한 발 아래에서는
진득한 핏물이 고여 와 핏자국을 만들어 냈다.
그 참혹한 발자국을 아연한 얼굴로 훑어보고 있자니 울컥
구역질이 치밀었다.
“가만히 있어. 조각 때문에 위험해.”
“그러면오지 마.”
에즈라.’’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 여자는 경멸과 혐오만을 내비치며
그를 진심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 어느 날, 칼을 들이밀어도 두
팔을 뻗어 제 몸을 감싸 주던 여자가 아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애써 웃던 에즈라가 아니야. 너는 내가 아는 네가
아니야.
그게 나를 미치게 해. 미치도록 후회하게 해. 너는 나를 죽고
싶게 만들어.
“나, 나 포기 안 해요. 계속 이렇게 굴 거예요.”
“움직이지 말라니까!”
“그러니까 내보내 달란 말이야!”
윽박지르는 에즈라의 목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끝이
갈라진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끝을 맺었고 에즈라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시프나드가…… 데리러 온다고 했단 말이야.”
이름 하나에 쭈뼛쭈뼛 다가오던 팔이 멈칫거렸다. 이내 툭
떨궈진 커다란 손에는 쥔 것이 없었다. 나를 속박하는 당신이
미운데, 증오스러운데 마음은 또 이렇게나 아파 온다. 혼란과
슬픔이 맘을 뒤흔들고 지나가는 통에 그녀는 마구 머리를
헝클였다.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당신을 몰라, 모른다고! 당신 같은
사람…… 기억 안 나.”
“왜 이러는 거냐고?”
거칠어진 숨소리만 적나라했다. 얼마의 적막이 흘렀을까, 먼저
입을 뗀 것은 히폴로테스였다.
“이러면 살아갈 네가, 나를 기억해 줄지도 모르잖아.”
흘러 들어온 달빛이 남자의 미려한 얼굴을 비추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는 설움을 참듯 입술을 깨물더니 남은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왔다. 오는 걸음마다 남은 짙은 핏자국이 꼭 마음을
짓밟는 것만 같아.
고개 들어 마주한 그는 떨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감싸고 나서야 에즈라는 제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난 단 한 번도 너를 완전히 가진 적이 없어.”
그가 아픈 얼굴로 제 상처를 더듬었다. 조심스레 닿아 오는
손길에 결국 눈물이 터졌다. 여린 어깨를 품에 감싸 안은
히폴로테스는 힘 빠진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울음을 달랬다.
“그래서 못 보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나 이제는 정말 다 버릴 수 있는데.
“그러니까 그냥네가포기해.”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끝끝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숨 쉬는 동안만 곁에 있어 준다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수 있어.
제발, 나좀 살려줘.
그리 속삭이며 손등 위로 입술을 내렸다. 닿았다 떨어진 곳이
불현듯 뜨거워지더니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외로운 남자. 누구보다 강해서 홀로 남고 만,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남자.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그가 안타까웠다. 그렇게
자라나 버린 동정이 자꾸만 미움을 집어삼켜서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그를 밀어내는 일이 버거울 만큼이나.
영원히 묻어 두기엔 손등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했다.
“ 가뒀다고?”
“예. 저 역시도 황비님을 뵙지 못한 지 달이 넘었습니다.
어찌나 치밀한지 그날그날 다른 하녀들이 음식을 나르고. 하루 한
번 눈 깜짝할 새 침상을 정리합니다. 드나들던 의사조차 오래도록
황비님을 뵙지 못한지라 의사의 푸념을 엿듣기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셸리는 숨죽인 채 라티아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램프 몇
개만이 밝히고 있는 방 안은 공기가 텁텁하고 먼지가 일었으며
어찌나 관리를 하지 않는지 곰팡이 냄새까지 났다.
모든 것을 포기한 죽음의 향기였다.
“호위병은 몇이지?”
“ 다섯입니다.”
“셋이 늘었네.”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사랑받기 위해 여러모로 애쓸 줄
알았는데 가둬 두고 강제하다니. 우습게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등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나마 저만 미친 것은 아닌 듯해서
나름의 위안이 되었다.
“히폴로테스가 에즈라를 찾을 때 모습을 드러내. 에즈라가
들을 수 있도록 모시고 싶다고 말을 꺼내 보두. 패악을 부리는
에즈라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너를 허락할지 모르니까.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혹여 황제께서 제 목을
치시겠다면
“에즈라는 네가 죽는 걸 두고 볼 위인이 아니지. 그 부분은 걱정
마.”
그건 그랬다. 오랜 기간 에즈라를 곁에서 지켜봐 온 셀리는
누구보다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화살이 빗발치고, 피와
살점이 흩뿌려지는 상황에서도 저를 감싸고 도망치게 하던 이가
아닌가.
에즈라는 곧 죽어도 곁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관망할
사람이 못되었다.
“아버지가 곧 움직이실 거다. 히폴로테스의 감시가 시들해질
때를 노릴 거야. 너는 그때 내게 곧장 언질을 하면 돼.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예.”
공손한 인사와 함께 셀리가 물러나자 방 안에 홀로 남은
라티아는 답답한 베일을 내버렸다. 걸레짝처럼 바닥을 뒹구는
천이 마치 자신 같아서 신경이 곤두섰다.
아니, 아니다. 곧 있으면 모든 일은 잘 끝날 거다. 여기서
도망치게 해 주겠다고 꼬드기면 에즈라는 홀랑 넘어올 거고,
도와주는 척하면서 뒤에 칼을 꽂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방법이겠지.
“나는 마땅한 일을 하는 것뿐이야.”
아무도 남지 않은 곳에서 너무도 익숙해진 혼잣말을 지껄였다.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행복을. 내 노력을, 내 것이었던
남자를 가로챈 에즈라가 나쁜 거라고. 그러니 도둑년은 죽어
마땅하다고.
“……나는 죄가 없어.”
지독하게 자신 없는 목소리는 섬뜩했다.